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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권리

개인의 자유와 권리장전

-- CONTENTS --
들어가며  인권의 지침 권리장전
서문
1장  종교적 자유의 뿌리
2장  현대의 종교적 자유
3장  표현의 자유
4장  언론의 자유
5장  무기 소지의 권리
6장  프라이버시
7장  배심원에 의한 재판
8장  피고인의 권리
9장  재산권
10장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
11장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
12장  투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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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인권의 지침 권리장전



1787년 여름,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롭게 형성된 미국의 새로운 13개 주 대표들이 미합중국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9월까지 그들은 헌법 초안을 작성하여 주 의회에 승인을 요구했다. 새로운 헌법은 새로운 연방 정부의 기능에 대한 청사진을 담고 있었지만, 시민 개인의 권리에 대한 구체적 조항은 없었다. 즉시 공개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헌법 초안 옹호자들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보장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영국의 권리장전(1689)과 버지니아 권리선언(1776) 등 과거의 문서들에 자세하게 명시된 개인의 권리에 대해,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특정 조항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논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1787년 12월에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로 있던 토머스 제퍼슨이 친구이자 헌법 작성자 중에 한 명인 제임스 매디슨에게 서신을 보냈다. 제퍼슨은 “어떤 경우라도 국민은 이 땅의 모든 정부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올바른 정부라면 이를 거부할 수 없다네”라고 적었다.

제퍼슨의 주장은 호응을 얻어냈고, 타협이 이루어졌다. 주 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승인하면서, 새 헌법에 따른 첫 번째 연방회의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조항을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 일은 약속대로 진행되어 1791년에 ‘권리장전(Bill of Rights)’으로 알려진 10개 조항은 국가 최고법인 헌법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 민주주의 초기에 발생한 이와 같은 논쟁은 이후 미국 정치와 헌법이 발전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우선 양쪽으로 나누어진 격렬한 논쟁이, 복잡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타협을 통해 중재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퍼슨이 정부 권력에 대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사실 권리장전은 가장 미국적인 가치들을 결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개인이 정부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제목 《국민의 권리:개인의 자유와 권리장전》에서 나타나듯이, 이 책은 미국의 법 체계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핵심 개념이 현재까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 책은 다양한 독자를 위해 집필되었다. 우선 이 책은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여기에 관련된 질문과 배경 지식이 담겨 있는 온라인 토론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다. 웹 사이트 http://usinfo.state.gov/products/pubs/를 참조하기 바란다.

미국인이 아닌 독자들은 “미국의 권리장전이 나하고 무슨 관련이 있지? 우리나라의 법 전통은 미국과 다르고 우린 권리장전도 없는데 말이야”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미국의 권리장전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임은 분명하다. 권리장전은 미국 식민지를 지배했던 영국의 오래된 법 체계와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권리장전이 미국의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는 권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권리장전이 역사적 뿌리를 초월한다고 믿고 있다.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은 모든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벽돌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권리장전은 독재의 탄압을 받으며 살고 있는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어왔다.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에 막을 내리게 한 1989년 이후의 혁명을 생각해보라. 폴란드의 언론인이자 자유노동조합의 지도자인 아담 미치니크에게 동유럽에서 발생한 혁명에 비추어볼 때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 중 어느 것이 현대 유럽 인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미국 독립혁명은 유토피아 건설이 아니라 자유라는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토머스 페인을 따라 이루어진 미국 독립혁명은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국민들의 자연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혁명은 동등한 기회, 법 앞의 평등, 종교적 자유, 법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완벽하고 분쟁 없는 사회라는 개념을 의식적으로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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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문 |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확신한다. 즉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 또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국가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의 동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미국 독립선언문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이 글귀는 미국인들에게 항상 특별한 의미를 지녀왔다. 이 글은 미국인의 자유에 대한 헌장으로 독립기념일인 7월 4일마다 수많은 모임에서 낭송되고, 수세기에 걸쳐 학생들에 의해 암기되며, 모든 정당 정치인들의 마음속에 각인되고, 법원에서 판결을 내릴 때 자주 인용된다. 지난 2백여 년 동안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강한 울림을 담고 있는 이 글귀의 메시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은 국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선행조건이면서 명분이라는 의미이다. 독재 사회의 경우에서처럼 국민은 정부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는 1776년에 처음으로 나온 혁명적인 생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액톤 경, 《자유의 역사(The History of Freedom and Other Essays)》(1907)

자유는 더 나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 그 자체가 최고의 정치적 목적이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런 권리 중 상대적으로 중요한 권리들이 무엇인지, 그러한 권리들이 어떻게 서로 완벽할 정도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우리는 18세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21세기에 살고 있다. 미국 건국자들의 정신에 비추어 헌법으로 보호받는 권리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스스로 그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고 되살리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축복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가 진행된 직후에 제임스 매디슨은 새로운 미국 헌법 초안을 자신의 친구이자 정신적 스승인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냈다.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였던 제퍼슨은 그 원고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중요한 결점 하나를 발견했다. 권리장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제퍼슨은 권리장전에 대해서 “국민이 이 땅의 모든 정부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라고 설명했다. 제퍼슨의 논평은 헌법 초안을 작성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헌법 전체가 새로운 정부의 권력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권리장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의회는 교회를 설립할 권력이 없기 때문에 의회가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는 특별한 규정은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의 주요 작성자인 제퍼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 정부는 분명히 권한이나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은 영역을 너무나 자주 침범했으며, 그 결과로 개인의 권리가 축소되거나 상실되었다. 제퍼슨은 정부 권력이 제한적이라는 가정에 의존하지 말고 국민의 권리를 명시하여 정부가 그러한 권리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자고 촉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퍼슨의 주장에 동의했으며 일부 주에서는 새로운 헌법 승인의 조건으로 권리장전의 추가를 요구했다.

첫 번째 의회가 소집된 자리에서 매디슨은 권리장전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1년에는 주 정부들이 일반적으로 권리장전으로 알려진 미국 헌법의 첫 번째 수정조항 10개를 승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는 단순히 권리장전에 명시된 권리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후 국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혀가며 현실적으로 많은 업적을 일구어냈다.

이 책의 본문에 나올 테지만 수정조항에 명시된 권리들 다수는 영국이 미국을 지배할 당시 영국인과 미국인 식민 통치자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또한 명시된 권리들 모두는 미국 건국자들이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밀접한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반영해준다. 예를 들어 수정헌법 제1조에 포함된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으로 자유 정부를 구성하는 초석으로 여겨지고 있다. 벤저민 카도조 대법원장은 표현의 자유를 “다른 모든 형태의 자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기반”이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법적 절차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권리가 주어진다. 이들에게 방어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정부가 국민을 기소할 수 있는 수단뿐만 아니라 독재 정권의 경우 국민을 재판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지니게 되어 전제주의 정치의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독재 정부는 반정부 정치인들에 대해 영장 없이 수색련셕颱構킬? 재판 혹은 가석방 없이 오랫동안 감금하거나, 고문이나 조작된 재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부가 범죄의 재판을 어떻게 집행하느냐는 그 정부가 얼마나 민주적이고 법의 지배가 얼마나 잘 행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이다.

일부 권리에 대한 정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게 되었으며 프라이버시와 같은 새로운 개념이 헌법 용어에 추가되었다. 하지만 개념의 정의가 어떻든 간에, 이러한 권리 자체가 미국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핵심을 잘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국민의 권리 보장에 대한 전통은 미국에서의 생활 경험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의 정체성이 민족성, 기원, 조상, 종교, 역사 등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요소를 통해 우선적으로 정의된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은 이러한 공통적인 요소를 거의 지니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다채로운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 시민들은 지구의 모든 대륙, 모든 국가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며 그들의 종교 또한 매우 다양하다. 미국의 역사는 미국 자체의 역사만이 아니라 수백만 이주민들이 몸소 가져온 역사이기도 하다. 일부 미국인들의 조상은 169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온 사람들일 수 있고, 또한 일부 미국인들의 조상은 남북전쟁에서 직접 전투를 했었을 수도 있다. 20세기에 유럽과 아시아에서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채 옷 보따리만 달랑 들고 미국에 온 사람들도 일부 있다.

이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된 집단을 미국인으로 묶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국가 권력보다 우선한다는 공통된 믿음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 중에 미국을 “지구의 마지막 최고의 희망”이라고 지칭했을 때, 이는 미국이나 미국민들이 다른 국가나 다른 국가의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국민의 권리에 기초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자유 정부의 이상을 잘 보존해 민주주의 자체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음 글에서 드러나게 될 한 가지 사실은 이러한 권리의 중요성에 대해 미국인들 사이에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일부 권리가 실제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가 성조기를 태우거나 인터넷에 포르노를 올리는 행위까지 보호하는가? 정부의 국교 설립 금지 조항이 정부가 종교를 지원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특혜를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사형제도는 잔인하거나 비정상적인 처벌에 포함되지 않는가?

미국인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은 대중적으로 논쟁을 벌일 가치가 있는 정책 관련 사항들이다. 이러한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국민들이 이런 권리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그 의미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최소한 미국에서는 자유라는 개념이 여러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파악하는 일이다.

우선, 모든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자유와 책임 사이의 지속적이고 피할 수 없는 긴장 상태가 존재한다. 모든 권리는 상응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때때로 의무는 그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에게 놓여 있다. “너는 팔을 맘대로 휘두를 수는 있지만 내 턱 앞에서는 멈추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의 권리 행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억제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은 청중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다른 과격한 사상을 옹호할 수 있으며, 경찰은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방해할 수 없다. 집안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권리는 경찰이 적절한 영장을 지니지 않고서는 가택을 침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에드먼드 버크, 《자유 정부 수립의 어려움에 대해》(1790)

정부를 수립하는 일은 크게 신중을 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권좌에 앉아 복종을 가르치면 모든 게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부여하는 일 또한 매우 쉽습니다. 지도할 필요 없이 그저 통제의 고삐를 늦추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자유 정부를 구성하는 일, 즉 한번에 자유와 통제라는 서로 상반되는 요소들을 모두 조절하는 일은 많은 생각과 깊은 사고, 그리고 현명하고 강력하며 통합할 줄 아는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긴장은 자유가 무정부 상태로 퇴보하거나 통제가 독재로 전개되지 않도록 균형을 창조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건전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은 단순한 예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권리 축소가 다른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권리의 박탈을 의미한다는 기본적인 이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권리의 행사에서 두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권리에 대한 적절한 정의가 없다는 것이다. 존 마셜 대법원장은 헌법이 “정의의 문서가 아니라 나열의 문서”라고 묘사했다.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는 의회가 헌법에 의거하여 특정한 권한을 지니고 있지만, 그 권한이 나열되었다고 해서 그 권한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회가 주州간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2백 년 이상 ‘주간’ 무역이 정확히 무엇을 규정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정의가 명확하지 않지만 혼돈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헌법이 문서를 해석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미국 최고 법원인 연방 대법원이 특정한 권리의 의미에 대해 내린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법의 지배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 복종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의 구성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새로 판사가 된 사람들이 권리의 개념이 변화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또 반영하기 때문에, 대법원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헌법상의 권리를 유지시키는 주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세 번째 문제는 권리의 범위이다. 국민의 권리들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더욱더 증가하는 인구들을 포함하게 되었는지에 중점을 두어 미국의 역사를 기술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투표권은 한때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21세 이상의 백인 남성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되었다가, 남녀나 인종,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확대되었다.

상대적으로 직설적으로 보이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조항 또한 범위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 조항은 분명하게 주요 종교에만 귀속되지 않는다. 이 조항은 여러 교파뿐만 아니라 종교로부터 간섭받고 싶어하지 않는 비종교인의 권리 또한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동물 살해나 일부다처제 등 국가의 가치에 어긋나는 종교 행위를 하는 교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방 대법원은 2백여 년 동안 이와 관련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으며, 성조기를 태운 사례에 대해 앤터니 케네디 판사가 말했듯이 대법원은 아직도 특정한 권리가 어디까지 적용하도록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앤서니 케네디 판사, 텍사스 주 대 존슨 사건(1989)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은, 우리가 때로 좋아하지 않는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법과 헌법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올바른’ 결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법적 절차를 확실하게 따라야 하기 때문에 흔치 않은 이번 사례와는 달리, 우리는 보통 결과에 대해 혐오감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결정을 유도한 가치 있는 원리를 훼손하지는 않을까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사례는 흔치 않은 사례 중 하나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국민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르몬 교도들은 일부다처제를 포기하기 전까지 동부에서 추방당했고 서부에서 박해를 받았다. 남북전쟁으로 자유를 얻은 흑인 노예들은 곧 남부에서 ‘짐 크로(Jim Crow)’라고 알려진 법적으로 강요된 인종 차별에 고통 받아야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급진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은 첫 번째 수정조항과 크게 어긋나는 공산주의 동조자 근절운동을 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포로수용소에 강제로 감금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국민의 권리를 내세우는 국가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경우가 권리장전을 완전하게 무시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사건들은 권리장전이 미국의 존립에 큰 장애물이 되거나 주요 위협으로 여겨지는 것과 충돌할 경우 권리장전이 유용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발견한, 좋은 의도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헌법에 특정하게 명시되지 않은 권리와 연관이 있다. 첫 번째 수정조항 10개나 헌법의 다른 부분에 명백하게 언급된 권리는 헌법의 보호 영역 안에 있으며 분명히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모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명시되지 않은 권리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답은 헌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헌법의 의미와 해석이 항상 대중적인 토론의 주요 쟁점이 된 것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헌법을 명시된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려는 학파가 있다. 그들은 헌법에 나열된 권리는 보호해야 하며 헌법 수정 없이 새로운 권리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에 프라이버시 권리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휴고 L. 블랙 판사는 “저는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만큼 저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헌법 조항이 없는 한 정부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리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수정헌법 제9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부 학자들과 판사들은 수정헌법 제9조가 1791년 승인 당시 국민들이 지니고 있던 권리만을 지칭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에 특정한 권리가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헌법에 의거한다고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판사들은 헌법이 미국의 변화하는 정치렌英막경제적 상황에 맞춰 변화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믿음, 소위 ‘살아 있는 헌법’ 정신을 옹호하고 있다. 비록 해석이 문서에 있는 단어로부터 시작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문서를 작성한 이들의 정신보다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가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1920년대에 대법원이 도청에 대한 첫 번째 소송 사건에 직면했을 때 재판관 대다수가 실제 도청이 건물 밖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4조에 명시된 의미의 ‘수색’이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수색영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결국 새로운 기술 개발을 통해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집이라는 사생활 공간을 침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전의 판결을 뒤집으며 도청은 ‘수색’에 해당하며 영장이 필요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헌법이 처음 작성될 당시에는 전화기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도청 역시 상상할 수 없었다는 윌리엄 O. 더글러스 판사의 설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살아 있는 헌법’ 정신은 새로운 기술 발전을 고려해 도청이 사실상 수색에 해당한다고 판결함으로써 집이라는 사생활 공간을 보호하려 했던 헌법 작성자들의 의도를 폭넓게 해석했다. 1960년대에 대법원 판사 다수가 프라이버시를 헌법 작성자들이 보호하려 했던 권리 중 하나로 인정하게 된 일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로버트 H. 잭슨 판사, 교육부 대 바네트 사건(1943)

권리장전의 목적은 바로 일부 주제들을 정치적 논쟁에 휩쓸리지 않게 하고, 대중이나 관리들이 손댈 수 없는 곳에 위치시키며, 법원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적 원칙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생명, 자유, 재산,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 및 집회의 자유, 그리고 기타 기본적인 권리는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또한 선거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항도 아닙니다.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미국 건국자들은 연방 정부의 권력을 두려워하면서 이를 제한하기 위해 권리장전을 요구했다. 그들은 권리장전이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1689년에 권리장전을 만들었으며 미국에서는 펜실베이니아 식민지가 1701년에 자유헌장을 채택했다. 곧 이어 미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버지니아 주는 조지 메이슨이 작성한 권리선언을 택했는데, 이는 제퍼슨과 매디슨이 연방 수정헌법을 작성할 때 염두에 두었던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매디슨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권리장전의 중요성을 정부를 제한하는 데 두는 게 아니라 국민들을 제한하는 데 두고 있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이나 영국의 식민지에서 채택된 권리장전은 원래 정부를 지배하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18세기 미국 식민지에서 정부는 더욱 민주적이었고 이는 독립을 부추겼으며 1780년대에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정치 권력은 이제 다수의 손에 놓이게 되었고, 통치자들은 태생이나 경제적 부유함 때문이 아니라 대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에 통치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장전의 초점이 다수의 보호에서 소수의 보호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제임스 매디슨,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낸 서신(1788)

정부의 실제적인 권력이 어디에 놓여 있든지, 압제의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우리 정부에서 실제 권력은 다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 침해 문제는, 유권자들의 감각과는 다른 정부의 활동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유권자 다수의 단순한 도구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일부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특히 민주주의는 보통 다수에 의한 지배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수’는 복잡한 개념이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같은 의견을 지닌 사람들일지라도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강력한 이견을 지닐 수 있다. 민주주의 정부는 변화하는 다수 사이의 연속된 타협으로 이루어져, 최종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과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다수에게 인기 없는 화자는 침묵해야 한다고 누군가 요구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 역시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을 옹호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다수에 반대하는 의견을 말할 자유를 안전하게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자유 또한 보호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에 대한 한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적 견해를 지닌 사람들의 권리 또한 인정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대법원이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보호하기 위해 독특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법 행위로 직책을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종신제로 일하고 있는 대법원의 판사 9명이 국민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중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약간 역설적이다. 하지만 헌법과 권리장전은 법률의 집행자를 필요로 하며, 이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행동은 경찰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또한 필요하다. 찰스 에반스 휴스 대법원장은 “헌법은 대법원이 말한 바이다”라고 논평한 적이 있다. 국민의 권리가 대부분 법원에 의해서 정의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법원은 법을 집행하는 일 이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권리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대체로 의견을 달리할 수 있지만 공평한 법정에서 이러한 권리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면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대법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지난 2백여 년간 대법원에서 일한 판사들 또한 자신들에게 오류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결정 일부는 시행착오를 거쳤으며 또 다른 일부는 새로운 기술 발전에 따라 새로운 판결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법원은 이상적인 국민의 권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확립했으며, 민간인의 생활에서 이러한 권리가 위치할 수 있는 자리를 정해주었고, 휘트니 대 캘리포니아 주 사건(1927)에서 브랜다이스 판사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설명한 바와 같이, 대법원의 판결 논리는 미국 전통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사들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민주주의나 국민의 권리는 국민들 스스로 성실하게 기본적인 원칙을 이행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권리들은 자유로운 사회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바로 미국인임을 정의하기도 한다. 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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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1  종교적 자유의 뿌리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종교의 자유는 미국인에게 가장 소중한 자유 중 하나이며 미국이 비종교적인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왠지 모순처럼 보이는 권리이다. 수정헌법 제1조는 미국이 종교나 종교적 이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세속적인 가치들만이 일상적인 행동을 지배하는 사회임을 의미한다고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 미국에서 종교는 일상생활에 존재하고 있다. 오히려 헌법은 개인과 종교 집단이 종교의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체계를 만들고 있다. 여기서 자유는 정부 지배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의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교적 다양성과 신앙의 자유를 어떻게 결합하느냐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며, 이상적인 상황을 만드는 길이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아, 오늘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과정이지 완성품이 아니다. 모든 형태의 자유 또한 변화하고 있는 상태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은 인류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대두되었다.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종교에서 벗어난 종교를 인정해주는 사회가 있긴 했지만 이러한 관용은 다수의 국민 혹은 통치자의 변덕에 따라 달라졌으며 아주 쉽게 철회되곤 했다. 무엇보다도 종교의 자유는 국가 내의 종교적 생활을 정치 기관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로 시작된다. 종교와 정부의 분리, 소위 정교政敎 분리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이루어진 업적이다. 미국의 독립과 헌법 및 권리장전 채택에 수반된 위대한 사회적 혁명 중 하나가 정교 분리이다. 정교 분리는 처음에는 식민지 사회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연방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교 분리와 종교 활동의 완전한 자유라는 개념을 헌법에 삽입함으로써, 미국 건국자들은 일시적인 혜택에 머물 수도 있었던 것을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리로 변화시켰다. 이는 종교의 자유가 1791년에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종교의 자유를 이끌 수 있는 씨앗이 뿌려졌음을 뜻한다. 이 씨앗은 20세기에 꽃을 피우게 된다.



미국 식민지 초기 정착민들이 건너온 서유럽의 역사는 4세기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가톨릭이라는 공식적인 교회 체계로 통합되어 있었다. 혹자는 종교개혁이 일종의 관용을 유도했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뱅의 글을 보면 관용과 양심의 자유를 외치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신교도들은 힘을 얻게 된 지역에서 자체의 교회를 바로 설립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진실한 신앙은 하나밖에 없으며 다른 신앙은 뿌리 뽑아야 한다는 신념과, 어느 나라에나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개념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종교적으로 통일되어 있던 유럽을 분리시켰다. 일부 국가에서는 종교적 차이 때문에 유혈 내전이 발생했으며, 일부에서는 몇십 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기도 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이러한 역사를 마음에 두면서 “종교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추방해 종교적 불화를 해결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인구가 비교적 적었던 네덜란드에서만은 서로 경쟁하는 교파들 사이에 균형이 잡혔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선한 시민들은 가톨릭 교인들과 신교도뿐만 아니라 유대 인들 또한 서로 인내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공존공영 정책을 채택했다. 독립혁명 당시의 미국인들은 네덜란드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취한 행동은 주로 영국 식민지로서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17세기 초 북아메리카에 대한 식민화가 시작되었고, 영국인들은 종교적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비전을 가지고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중요한 점은 새로운 정착자 모두가 기존의 종교를 믿고 있었으며 식민지를 구성한 후에 바로 교회를 설립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예로, 1643년에 발간된 팸플릿 <뉴잉글랜드의 첫 번째 열매(New England? First Fruits)>가 있다. 여기에는 매사추세츠 만灣 식민지의 초기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는 “하느님이 우리를 뉴잉글랜드에 안전하게 데려다주셨다. 우리는 집을 짓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고 하느님에게 경배드릴 장소를 만들었으며 시민의 정부를 정착시켰다”고 적었다.

유럽 인들이 1607년 제임스타운에 정착을 시작한 후 1776년 미국 독립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에는 거의 예외 없이 여기저기에 교회가 세워졌다. 뉴욕과 남부 식민지에서는 영국에서처럼 영국 국교가 주축이었고, 뉴잉글랜드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회중교회주의(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영국 개신교 교회에서 일어난 운동-옮긴이)가 주도적이었다. 이들 식민지는 지속적으로 가톨릭 교도, 유대 인, 개신교 신도들을 차별했다.

1656년, 매사추세츠 만의 일반 법원은 퀘이커 교도의 활동을 금지했으며 퀘이커 교도가 발견되면 감금하고 매질을 한 후 추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퀘이커 교도들이 굴하지 않자, 이듬해에 입법자들은 추방된 남성 퀘이커 교도가 다시 돌아오면 한쪽 귀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 번째 돌아오면 나머지 귀를 자르도록 했으며, 여성의 경우 “혹독하게” 매질을 하도록 했다. 세 번째 돌아오는 경우에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달궈진 쇠로 혀에 구멍을 뚫도록” 했다. 하지만 퀘이커 교도들은 다시 돌아왔고, 1658년에 매사추세츠 만의 일반 법원은 이들에게 교수형을 명했다. 이러한 처벌은 추방된 후 돌아온 예수회 신자들과 가톨릭 성직자들에게도 내려졌다. 1659년과 1661년 사이 여성 1명과 남성 3명이 보스턴 광장에서 실제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식민지 거주자들이 영국에 강력히 반발하던 1774년에도 매사추세츠 침례교 지도자인 아이작 배커스 목사는 침례교도 18명이 노샘프턴에서 회중교회주의 목사를 지원하기 위한 세금 납부를 거절한 죄로 한겨울에 투옥되었다고 주지사와 주 의회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같은 해에 제임스 매디슨은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일부 지역에서 악마적이고 지옥에서나 나온 듯한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네. 이웃한 주에서는 자신들의 종교적 생각을 책으로 출간했다는 이유로 대여섯 명의 착한 사람들이 투옥되기도 했다네. 그들의 생각이 교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일세. 그렇기에 난 지금 자네에게 모든 이의 양심의 자유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네.


하지만 미국 정착 초기부터 특히 남부 식민지에서는 국교 수립이나 신봉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이미 1645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일반 법원에서는 대다수의 판사들이, 시민의 평화를 지키고 정부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고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유대 인이든, 가톨릭 교도이든, 아리우스파 교도이든, 소치니안 교도이든, 누구나 예외 없이 종교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근에 있는 로드아일랜드에서는 로저 윌리엄스가 거의 완벽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식민지를 건설했다. 윌리엄스는 이 영역에서 현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당시 그의 행동을 보면 이러한 칭송이 마땅해 보인다. 윌리엄스는 양심의 자유를 선호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권력 조직을 세우는 것에 반대했다. 권력 조직은 일반 사회에 해가 될뿐더러 종교 자체에도 해가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7세기 식민지 국가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공식적인 교회 설립은 1776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식민지에서는 사실상 어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허락해야 했다. 초기 정착자들은 출신지가 동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세계에 대한 유혹으로 영국 제도뿐만 아니라 유럽의 북부와 서부에서도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미국이 본국에서보다 더 나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미국에 왔다. 그들 모두가 중부와 남부 식민지에 있던 청교도나 영국 국교회의 회중교회주의적인 신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침례교도, 유대 교도, 가톨릭 교도, 루터 교도 등은 미국에 일단 정착하게 되자 자신들이 가지도 않는 교회에 세금을 내거나 자신들이 믿지도 않는 신앙을 억지로 따를 수 없다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독립혁명 초기에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버지니아 주도 영국 국교회를 해체했다. 당시 많은 식민지 개척자들은 영국 국교회를 영국 왕정과 동일시했다. 1776년의 버지니아 주 헌법은 모든 이에게 평등한 종교적 행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지만 주 정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이는 버지니아 주의 최대 반대파 단체인 침례교도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영국 국교회(이후에 성공회로 명명된다)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교파들은 세금을 통해 종교를 지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세금이 한 교파에 가지 않고 모든 개신교 교회를 지원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지니아 주에서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이룩하기 위해 펼쳐진 투쟁은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위대한 설립자 2명, 즉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과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제임스 매디슨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이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종교적 자유 법안’을 작성했는데, 이 법안은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든 종교적 집회나, 종교적 장소, 혹은 성직자를 억지로 방문하거나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이 법안은 버지니아 주 입법자들에 의해 통과되었다. 제퍼슨은 종교가 개인과 신과의 개인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정부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밖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신교도나 가톨릭 교도에 제한하지 않고 모든 종교 단체가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제퍼슨은 종교의 자유를 특정 행정부가 운영되는 기간에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 ‘인류의 자연권’ 중 하나로 간주했다. 1780년대 제퍼슨의 이런 생각은 다른 미국인들의 생각보다 시대를 훨씬 앞선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태어난 버지니아 주에서도 그의 제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의 지원을 바라고 있던 교회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

제퍼슨이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가 되어 파리로 떠나자, 종교적 자유에 대한 투쟁은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제임스 매디슨에게 넘겨졌다. 매디슨은 미국 종교의 역사상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인 ‘종교 과세 반대 진정렷戮퓬?Memorial and Remonstrance against Religious Assessments)’를 작성했다. 매디슨은 제퍼슨과 같이 종교의 기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면이 어떤 식으로든지 정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든 종교에 골고루 분배된다고 하더라도 과세는 국교를 설립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아무리 도움이 되더라도 혹은 경미한 일이라고 해도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2백여 년 전에 했던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종교 과세 반대 진정렷戮퓬?1786)

1. “종교, 혹은 우리가 창조주에게 지고 있는 의무와 그 의무를 이해하는 방법은 이성과 신념을 통해 이루어져야지 권력이나 폭력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기본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모든 사람에게 종교는 개인의 신념과 양심에 맡겨져야 한다. 그리고 양심과 신념에 따라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은 모든 이들의 권리이다. 이 권리는 본래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종교적 견해는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인간의 권리는 창조주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권리는 양도될 수 없다. 창조주에게 자기의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일은 모든 인간의 의무이다.

2. 종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권위 밖에 있기에, 행정 기관의 권위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행정기관은 사회가 창조한 것이며 사회의 대리인일 뿐이다. 정부의 관할권은 파생적이며 제한적이다. 정부의 관할권은 서로 협력해야 하는 부서들과 관련하여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자유로운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권력 부서들을 나누고 있는 경계가 항상 유지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위대한 벽을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3. 우리의 자유에 대한 첫 번째 실험에서 경계심을 가지는 일은 매우 적절하다. 우리는 이 신중한 경계심을 시민의 첫 번째 의무이자 최근 독립혁명의 고귀한 교훈 중 하나로 여긴다. 우리는 이 교훈을 깊이 아로새겨야 한다. 다른 종교를 배제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는 정부라면, 쉽게 다른 기독교 교파를 제외한 채 하나의 기독교 교파를 국교로 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종교를 지원하기 위해 재산의 일부를 바치도록 시민에게 강요하는 정부라면, 다른 모든 경우에도 권력 조직에 순응하도록 시민을 강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매디슨의 주장이 가지는 힘은 버지니아 주의 유권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설립하는 일뿐만 아니라 종교 기관을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일에 실제로 반대하는 입법부를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다음 총회에서 버지니아 주 의회는 미국 역사에서 기본적인 문서 중 하나인 종교의 자유를 위한 버지니아 주 법령을 채택했다. 토머스 제퍼슨의 논지는, 종교는 매우 중요하며 자유롭게 종교 행위를 하는 일은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기본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주 정부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지하지 않는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지지하는 교회를 위해서도 세금을 징수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교인들의 신앙심에 맡겨질 때 가장 잘 성장한다.


버지니아 주 종교의 자유 법령(1786)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인간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심에 따라, 일시적인 처벌이나 부담 혹은 자격 박탈 등을 통해 종교적인 믿음에 영향을 미치려는 모든 시도는 위선과 비열함이라는 습관을 낳게 한다. 이것은 우리 종교의 신성한 창시자의 계획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하느님은 육체와 마음의 주인이시며 강제로 종교를 전파하려 하지 않으셨다...

어느 누구든 종교적 집회나, 종교적 장소, 혹은 성직자를 억지로 방문하거나 지원해서는 안 되며, 신체나 물건에 대해 강요받거나, 구속되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담을 갖게 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적 견해나 신념 때문에 고생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주 의회에서 법률로 정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종교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논쟁할 수 있어야 하며 이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능력이 축소되거나 확대되거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법령에 명시된 권리가 인간의 자연권이며, 앞으로 현재의 법령을 폐기하거나 범위를 축소하려는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러한 법안은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임을 선언할 자유가 있으며, 따라서 이렇게 선언하는 바이다.


비록 오늘날 우리는 종교의 자유에 대해 수정헌법 제1조가 가장 많은 일을 했다고 여기지만, 버지니아 주 종교의 자유 법안이 채택될 당시 이 법률은, 주 정부가 하나의 특정한 신앙을 지원하고 강요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열려 있고 관용을 베푸는 사회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이정표 역할을 했다. 이 법령의 중요성은 종교적인 문제가 법으로 제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데 있다. 토머스 제퍼슨은 이런 견해를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담았다.


나는 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말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파악하려 하지도 않았다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려 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신념을 바꾸고 싶어하지도 않았다네. 또한 다른 사람의 종교를 판단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네... 우리의 말이 아닌 삶을 통해 우리의 종교가 읽혀야 하기 때문이라네.


헌법으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을 때 매디슨의 글과 버지니아 주 법령에서 구체화된 생각은 새로 구성된 미국의 각 주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비록 일부 주에서는 이후 몇십 년 동안에도 주 교회를 설립했지만, 미국 정부가 종교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공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존 애덤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국회의원들이 개인적으로 기도를 올리고 금식을 하며 1년에 한 번씩 감사를 표시하는 일 이외에, 의회가 종교에 대해 간섭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식민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자체의 종교를 지니도록 하라.


사실 몇몇 주에서는 의회가 종교에 간섭하지 않도록 하는 권리장전을 헌법에 포함한다는 조건을 두고 헌법을 승인한 바 있다. 특히 제임스 매디슨은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동원해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후 열린 첫 번째 의회에서 이 일을 성사시켰다. 그의 노력으로 10개의 수정헌법 조항이 나오게 되었고 이 조항들은 1791년에 승인되어 통틀어 권리장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1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표현, 언론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롭게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다양한 권리를 하나의 조항에 묶은 점은 단순히 말을 짧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이 조항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 자신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믿음과 개인적인 생각, 심지어 불만 사항을 표현할 때 정부의 강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다루고 있다. 매디슨이 이 수정조항을 작성했을 때 종교나 신앙이 종종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매디슨은 종교적 자유 법안의 시행을 위해서 정치적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했으며, 비슷한 정치적 투쟁이 다른 주에서도 발생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후에 미국 대법원에 상정된 수정헌법 제1조와 관련된 소송사건들 다수는 단순히 표현, 언론, 종교라는 인공적으로 부과된 범주를 넘어선 사례들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사례들은 정부의 권력이 한 사람의 마음을 구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면과, 국민이 구속받지 않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다루고 있다.

지난 2백 년 동안 미국에서는, 개인의 양심에 따라 믿을 권리 혹은 믿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교 분리를 유지하는 등 종교의 자유가 유지되어왔다. 그렇다고 미국에 종교적 편견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교도, 유대 교도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이 차별의 희생자가 되어왔지만 이는 정부가 승인하거나 강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별이었다. 신앙에 관련된 법적인 차별은 독립혁명 이후 약간 지속되다가 사라졌다.

독립혁명 당시부터 20세기에 들어서까지 미국에는 인종과 종교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미국인들의 과반수는 개신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주류에서 벗어난 종교 단체들은 종종 의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단체들, 특히 유대 교도와 가톨릭 교도들은 항상 다수인 신교도들 사이에서도 앞장서서 자신들을 변호했다. 또한 자신의 종교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신앙 활동을 할 권리를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잘 알려진 예를 하나 들자면, 19세기 초반 뉴욕에서 어떤 도둑이 가톨릭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도둑은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며 앤드루 콜맨 신부에게 훔친 물품을 자기 대신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요청했고 신부는 그의 말을 따랐다. 경찰은 콜맨 신부에게 도둑의 신원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신부는 고해성사를 통해 얻은 정보는 고해자와 신부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비밀이라며 이를 거절했다. 콜맨 신부는 공무 집행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뉴욕 시 지방형사법원에 서게 되었다. 검사와 변호사뿐만 아니라 판사 패널 모두 신교도였다. 콜맨 신부 측 변호사는 종교 행위의 자유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폈다.


고해성사 내용 누설 금지 변호(1813)

저는 다른 고려 사항을 제쳐두더라도 신부님의 예외적인 상황을 보호하는 첫 번째 법률 조항, 즉 뉴욕 주 헌법 제38조를 검토하는 것으로 변호를 시작하겠습니다.

제38조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시민에게 해가 되는 폭군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나약하고 사악한 성직자나 왕들이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사용했던 정신적 억압과 편협성에 대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이성적인 자유에 기초한 선의의 원칙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조항을 통해 차별이나 편애 없이 자유롭게 종교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이 주의 모든 주민에게 허락됨을 이 주의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권위를 대표하여 제정하고, 결정하며, 선언한다. 단, 여기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가 음란한 행위를 변명하거나 이 주의 평화와 안정에 반하는 행위를 합리화해도 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헌법에서 명시된 것보다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표현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 자유는 이 조항이 담고 있는 주제입니다. 당시 이 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이 모든 인간의 권리라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차별이나 편애 없이 종교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한을 모든 인간에게 보장해주려 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제와 균형 잡힌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한 바입니다.

이 조항이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직자와 고해자의 신원이 노출된다면 가톨릭에서 양심의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직자가 공권력에 의해 강요받는다면 양심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고해자가 고해성사에서 한 말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법정에 끌려온다면 그에게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까? 두 사람은 고해성사의 특혜를 받고 있습니까? 그들은 고해성사라는 종교적 행위를 자유롭게 누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헌법이 보호하고자 한 종교의 자유라면, 이는 과거에 물에 던져서 뜨면 유죄이고 가라앉으면 무죄라는 판결을 받았던 사람의 자유만큼이나 황당한 자유라고 생각됩니다.


19세기 초반에 최소한 종교적인 자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 일부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현대적인 입장에 도달해 있었다. 콜맨 신부 사건에서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고해성사의 신성함에 대해 손을 들어주었고, 1828년에 뉴욕 주 입법부는 오래된 보통법 교리인 신부와 고해자의 비밀 보장을 법으로 시행하도록 했다. 고해성사라는 의식은 가톨릭에만 있지만 한 사람과 그의 정신적 지도자 사이의 대화를 둘러싼 비밀성이라는 개념은 정신적 지도자가 가톨릭 신부이든, 기독교 목사이든, 유대 교 랍비이든, 이슬람 교 이맘이든 상관없이 미국에서 보통법과 법률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종교의 의식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된 이 판례는 모든 이의 양심의 자유를 한층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유럽에서의 유혈 충돌을 기억하는 신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을 의심스럽게 바라봄에 따라, 가톨릭 교도들은 계속 자신들을 변호해야 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존 타일러는 작지만 목소리가 큰 토착민 단체인 부지不知당(Know-Nothing Party:1850년대에 번창했던 미국의 정당으로 반反이민, 특히 반가톨릭 감정을 지닌 본토박이 신교도들의 단체-옮긴이)에 반대했다. 타일러는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지당을 비난하며 가톨릭 교도들을 칭찬했다.


(가톨릭 교도들은) 미국의 헌법에 특히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며 가톨릭 신부들은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모범을 보이고 있단다. 이 점은 서슴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심하게 다투면서 옷을 더럽히고 있는 북부 지역 다른 교파의 성직자들이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가톨릭 교도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못한다면... 미국인들 대부분에게 불만을 느끼도록 만들게야. 미국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이란다...


그렇다고 반가톨릭적인 편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오게 되었고 그들 중 다수는 남유럽과 동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신교도들에겐 이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보였다. 유럽에서와 같은 유혈 종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가톨릭 감정은 매우 높았다. 가톨릭에 대한 편견은 19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첫 번째 가톨릭 신자 후보 앨프레드 E. 스미스를 낙선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36년 후, 존 F. 케네디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편견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접 요청해 미국 남부 침례교 목사 회의에서 가톨릭 교도로서의 자신의 믿음과 미국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의무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었다. 전국적인 관심을 얻게 된 이 연설이 대통령 선거에서 종교 문제를 배제시키는 데 큰 몫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존 F. 케네디, 교회와 정부에 대해(1960)

제가 가톨릭 신자이고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이 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실제로 중요한 쟁점들이 종교 문제에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곳보다 책임감이 없는 일부에서는 교묘하게 저의 종교 문제를 이용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제가 어떤 교회를 믿느냐가 아니라 제가 어떤 미국을 믿느냐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와 정부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미국을 믿습니다. 대통령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더라도 가톨릭 고위 성직자가 대통령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말할 수 없으며, 개신교 목사가 교인들에게 누구를 찍으라고 말할 수 없는 미국을 믿습니다. 교회나 교회에 부속된 학교가 공적 자금이나 정치적 특혜를 받지 않는 미국을 믿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종교가 대통령의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공직을 박탈당하는 일이 없는 미국을 믿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는 가톨릭 교도도 아니고, 신교도도 아니고, 유대 교인도 아닌 미국인을 믿습니다. 정부 관리가 교황이나 미국기독교회협의회, 혹은 다른 성직자들에게 공공정책에 대한 지침을 요구하거나, 종교 단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을 믿습니다. 종교 단체가 관리들의 공적인 활동이나 일반 대중에게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단체의 의도를 강요하려 하지 않는 미국을 믿습니다. 저는 또한 종교적 자유는 분할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한 교회를 반대하는 법령이 전체를 반대하는 법령으로 간주되는 미국을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믿고 있는 미국이며, 제가 남태평양에서 싸우며 그토록 지키려 했던 미국이며, 제 형이 유럽에서 목숨을 바치며 지키려 했던 미국입니다. 그때는 아무도 우리가 “분리된 애국심”을 지닐 수 있다거나, 우리가 “자유를 믿지 않았다”거나,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 지켰던 자유”를 위협하는 반애국적인 단체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국가가 선호하지 않는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직책을 주지 않았던 곳에서 도망쳐 미국으로 올 때, 그들이 헌법과 권리장전, 그리고 버지니아 주 종교 자유 법령을 위해 싸울 때, 그들이 오늘 제가 방문했던 알라모 성지(미국인 결사대가 1836년에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독립시키기 위해 전투를 벌인 요새-옮긴이)에서 싸울 때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미국입니다. 보위와 크로켓 옆에 푸엔테스, 맥캐퍼티, 베일리, 베딜리오, 캐리가 목숨을 잃고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가톨릭 신자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습니다. 종교라는 척도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저는 제 교회를 대표해 말하지 않으며 교회 또한 저를 대신해 말할 수 없습니다.


신교도들이 유대 인들의 모의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사실 초기 청교도들은 유대 교를 선망했다), 유대 인들은 몇 세기에 걸친 종교의 편협성으로 고통을 겪었다. 신세계에는 반유대주의를 제도화했던 중세의 종교 관례들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를 전복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의 씨앗은 대서양을 건너왔으며 해변에 위치하고 있던 작은 유대 인 사회는 그 열매를 감수해야 했다.

가톨릭 교도들처럼 유대 인들 역시 미국에는 유럽에 팽배한 종교 박해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는 신교도들의 도움을 받았다. 조지 워싱턴은 뉴포트에 있는 유대 인 사회에 “다행스럽게도 종교적 편협성을 인정하지도, 종교 박해를 돕지도 않는 미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올바른 시민답게 처신할 것만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제퍼슨과 매디슨 또한 미국에서 독재가 아니라 종교적인 자유가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이 개신교 국가라고 생각했으며 가톨릭의 모의를 두려워한 만큼 유대 교도들에 대해서도 불편함을 느꼈다.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메릴랜드 주에서는 독립혁명 후 작성된 권리장전이 종교의 자유를 향한 중요한 발판을 제공해주었지만, 그 자유는 기독교인에게만 허용되었다. 1818년부터 메릴랜드 주 의회 의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토머스 케네디는 유대 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도 앞장섰다.

토머스 케네디, 메릴랜드 유대 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1818)

누군가 저에게 권리장전의 한 구절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이 제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떠나온 나라에서는 유대 인이 없었으며 저는 세계의 어느 유대 인과도 전혀 친분이 없습니다. 이 요구는 그들의 요청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러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두려워하는 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편견입니다. 우리의 편견은 우리에게는 소중하며 우리 모두는 정치적인 편견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또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종교적 편견은 이보다 훨씬 강합니다. 종교적 편견은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죽음을 앞둔 침상에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는 또한 한 세대, 한 시대, 한 세기만의 편견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약 1800년 동안 지속되어온 편견입니다...

미국에는 유대 인이 많지 않습니다. 메릴랜드 주에는 정말 소수입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를 정당하게 대우해야 합니다.


유대 인들이 소수이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주에서 유대 인들이 선량한 시민으로 여겨지기 때문인지, 혹은 유대 인에 대한 노골적인 편견이 많은 시민들에게 거슬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대 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다른 주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신문 사설들이 메릴랜드 주에 유대 인의 권리에 대해 다시 한번 고려하라고 촉구했다. 영향력이 있는 주간지 《나일스 레지스터(Niles Register)》는 “확실히 시대가 변했으며 인간이 창조주에 빚지고 있는 바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인 만큼, 양심의 자유를 부인하면서 공화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상식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압력은 효력을 발휘했고, 메릴랜드 주는 1826년에 유대 인들에게 완전한 정치적려쓩냅?권리를 허용했다. 남북전쟁 당시까지 유대 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던 주는 노스캐롤라이나와 뉴햄프셔였으며, 이 2개 주에서 유대 인 차별은 1868년과 1877년에 각각 사라지게 되었다.

남북전쟁 때까지 종교의 자유 개념이 초기 국교 설립 금지 문제에서 크게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주에서 개인적인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장전을 채택하고 실행했으며, 팽배해 있던 미국이 신교도 국가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도나 유대 인들에게 불리했던 개인적려ㅔ÷?조건이 사라지게 되었다. 수정헌법 제1조의 구속을 받고 있는 연방 정부는 종교적인 문제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고, 구세계에서 정치적인 문제만큼이나 종교적인 면에서도 압제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미국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했듯이 “자유의 마지막 최고 희망”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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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2  현대의 종교적 자유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인구 통계학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에 따라 종교의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문제들이 부상했다. 1868년에 수정헌법 제14조가 비준됨과 동시에 수정헌법 제1조의 조항이 전국적으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등장한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새로운 문제들은, 미국의 기초를 세운 이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19세기 프랑스 정치학자,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옮긴이)이 지적했듯이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중요한 안건들이 결국 사법상의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미국의 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에 있는 두 개의 ‘종교적인 조항’의 의미에 관련된 난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권리장전 채택 이후 150년 동안 연방 의회는 수정헌법 제1조를 따랐다. 그 결과 국교 설립 금지 조항과 관련한 사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있다 하더라도 그건 판례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47년에 대법원은 종교와 관련한 조항이 전국적으로 적용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휴고 L. 블랙 판사는 에버슨 대 교육부 사건의 판결에서 종교의 자유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했다.


휴고 L. 블랙 판사, 에버슨 대 교육부 사건(1947)

수정헌법 제1조의 ‘국교 설립’ 조항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는 교회를 설립할 수 없습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는 특정 종교 혹은 모든 종교에 도움을 주거나 특정 종교를 편애하는 법령을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는 누구에게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교회에 가게 하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강요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또 어느 종교에 대한 믿음이나 불신을 고백하도록 강요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혹은 종교를 가르치거나 실행하기 위해 어떤 형식을 이용하든, 종교적 활동이나 종교 기관을 지원하기 위해서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습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는 공개적으로나 비밀리에 종교 조직이나 단체의 일에 간섭할 수 없으며 종교 조직이나 단체 또한 정부 일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의 말대로 법으로 국교를 정하는 일을 금지하는 조항은 “종교와 정부를 분리하는 벽”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대법원이 결정한 거의 모든 종교 관련 사례의 기본적인 논리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국교 설립 금지 조항(정부가 하나의 종교적인 기능을 홍보하는 일을 금지하는)과 관련이 있든, 종교 활동의 자유 조항(정부가 개인의 특정한 종교 활동을 방해하는 일을 금지하는)과 관련이 있든, 상관없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결 때문에 에버슨 판례는 가장 의견이 분분한 공공정책 논쟁 중 하나가 되었다. 즉, 국교 설립 금지 조항으로 종교 프로그램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공공분야에서 행해지는 종교적인 의식을 정부가 어떤 부분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하는 논쟁이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몇 년 동안 미국 전역에 있는 각 학교의 조회 시간에 특정한 의식이 행해졌다. 공립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가 합창, 그리고 성경 구절을 읽는 의식 등을 행하도록 했다. 선택된 의식은 주의 법률, 관습, 교장이나 교사들의 취향에 따라 다양했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이렇게 널리 퍼져 있는 관행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식들은 미국의 역사 유산을 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윌리엄 O. 더글러스 판사의 말대로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중요한 문화유산을 구성하고 있었다. 뉴욕 주 공립학교에서 ‘초교파적인’ 기도를 준비했지만 학부모들이 “자신들과 아이들의 믿음, 종교, 종교적 관행에 어긋난다”며 이러한 정책에 반대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이 커져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모나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상관없이 아이들이 기도문을 억지로 낭송하는 관행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로써 한 학부모 단체가 법정에 가게 되었으며 결국 미국 대법원은 엥겔 대 비탈레 사건에서 학부모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휴고 L. 블랙 판사(20년 이상 주일학교에서 교사를 한 적이 있다)는 주에서 의무화하는 기도가 아무리 종교적으로 중립을 지킨다 해도 “국교 설립 금지 조항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기도라는 의식은 종교 활동을 의미하며, 수정헌법 제1조는 “(공립학교 체계를 통해) 정부가 종교적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사람으로 구성된 단체에게 낭송하도록 공식적인 기도문을 작성하는 일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함이 틀림없다”고 블랙 판사가 말했다. 블랙 판사는 국교 설립 금지 조항의 배후에 있는 철학으로 생각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계속 설명했다.


휴고 L. 블랙 판사, 엥겔 대 비탈레 사건(1962)

정부의 권력, 명성, 재정적 지원이 특정 종교의 배후에 놓여진다면, 종교적 소수에게 공식적으로 승인된 종교에 대해 순응하도록 간접적인 압력이 가해질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국교 설립 금지 조항에 깔려 있는 목적은 이를 금지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 조항의 가장 직접적인 목적은 정부와 종교가 결합하면 정부를 파괴하고 종교를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믿음에 놓여 있습니다. 또 다른 목적은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정부가 설립한 종교에는 종교 박해가 항상 수반된다는 깨달음에 놓여 있습니다.


블랙 판사에게 기도문의 내용이나 실제적인 단어, 혹은 초교파적인 특성에 기반한 중립적인 기도문이라는 사실 등은 이 사건과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기도 자체가 종교적이기 때문이며, 기도를 장려함으로써 주 정부는 종교적인 활동을 양성하여 국교 설립 금지 조항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강제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억지로 기도하도록 강요받은 학생도 없었다. 또한 대법원은 기도문이 특정한 교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수정헌법 제1조를 위반한 것은 주 정부가 공립학교에서 종교적인 관행을 장려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엥겔 판례는 때때로 사그라들긴 했지만 결코 꺼지지 않은 대법원에 대한 격렬한 비판의 불씨를 일으켰다. 대법원이 비록 때때로 규범을 따르지 않거나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처벌하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중요한 사회적 목적에 부응했던 종교적 관행에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했다. 한 신문은 “법원이 신을 무효화하다”라는 헤드라인을 실었다. 신교도 복음 전도사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하느님께 더 이상 호소할 수 없는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며 판결에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뉴욕의 스펠먼 대주교는 “미국의 자식들을 오랫동안 키웠던 종교적 전통의 심장부”를 강타한 판결이라며 비난했다.

대법원의 판결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종교 단체들은 이 결정을, 의미 없는 대중적 의식에서 종교를 분리시키고 종교의 진지한 관행을 보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조치로 간주했다. 자유로운 교파와 정통적인 교파가 섞여 있는 미국기독교회협의회는 엥겔 판결이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결정이라고 칭찬했다. 1960년 선거운동 당시 사회의 사악한 종교적 편협성으로부터 공격받은 바 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번 판결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면서, 기자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사례에 대해 우리는 아주 쉬운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판결이 미국의 모든 가족에게 집에서 더 많이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더 성심껏 예배에 참석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삶에서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더욱 중요하게 부각시킬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상식적인 접근 방법은 엥겔 사건에서 대법원의 의도를 잘 포착한 것이었다. 판사들 대다수는 기도나 종교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지만 권리장전을 처음 만들었던 조상들이 개인적인 자유를 보장하려고 했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무리 ‘중립적인’ 기도문이라고 해도 주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종교 행위를 강요할 수 없다. 블랙 판사에 따르면 정부의 권력과 명성이 특정 종교나 종교적인 관행에 놓여진다면, “공식적으로 승인된 종교에 대해 순응하도록 종교적 소수에게 간접적인 압력이 분명히 가해질 것이다.”

다음해에 대법원은 애빙턴 대 쉠프 사건의 판결을 내렸다. 펜실베이니아 주 법에 따르면 “수업이 있는 날마다 공립학교에서는 조회 때에 최소한 성경의 열 구절을 낭독해야 한다. 학생은 부모나 보호사의 서면 요청을 통해서 성경 낭독을 면제받을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은 함께 주기도문을 낭송해야 했다. 이번에는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탐 클라크 판사가 대다수의 의견을 대신하여 성경 낭독을 폐지하라고 선고했다. 그는 헌법에서 명령한 중립성은 역사로부터 배운 고통스러운 교훈에서 나온 것이라며,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와 정부가 결탁할 경우 어쩔 수 없이 공식적인 정통파 신앙을 믿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국민의 권리는 헌법에 선포되어 있지만 그 권리는 대법원에 의해 정의된다. 헌법은 법률을 믿을 수 있고 법률에 대한 확실한 해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대법원을 설립하도록 했다. 시민들 대다수가 학교에서 기도문이나 성경 낭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은 헌법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올리버 웬델 홈즈 판사는 표현의 자유가 우리가 동의하는 의견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의견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처럼 종교의 자유 또한 대다수를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수정헌법 제1조의 국교 설립 금지 조항은 대다수가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여 종교 관행의 통합을 강요하려고 할 때, 더욱 그 의미를 더하게 된다. 반대하는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대다수를 무시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미국의 헌법 작성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야 할 대가라고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개인적 양심의 자유가 종교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과 함께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하고 있는 견해이다. 존 폴 스티븐스 판사는 현대적인 한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개인적인 양심의 자유는 어떤 종교적 믿음을 선택하거나 혹은 아무런 믿음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종교적 믿음은 신앙을 믿는 사람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에서 나온 산물이다.”

모든 미국인들이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초반 미국과 같은 이질적인 사회에서는 다수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의 표현대로 “정치적 사회의 완전한 회원이 아닌 아웃사이더”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수정헌법 제1조를 작성한 사람들과 대법원 임원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피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종교적 반대파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회에서 열등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다른 의견을 지녔다는 바로 그 점이, 미국을 그렇게 독특하게 만들고 있는 다양한 문화를 구성하는 일부이며, 따라서 소중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일부 종교 집단들이 엥겔과 쉠프 사건 판결에 대해 계속 반대하고 있지만 주류에 있는 다수의 종교 단체들은 대법원이 실제적으로 종교를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종교를 장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제임스 매디슨은 2백 년 전의 글 ‘종교 과세 반대 진정렷戮퓬??【?정부의 적대감뿐만 아니라 지원 노력 또한 종교와 종교적 자유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지적인 후손들은 비슷한 맥락의 주장을 펼치면서 정부가 종교를 지원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종교를 가로막지도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어떤 형태든지 학교에서 정부가 인가한 종교 활동을 설정하는 일은 교파적인 적대감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더구나 진지한 신앙인이라면 정부가 그저 자신이 종교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놔두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신의 신앙심에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정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신앙이 개인의 문제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종교가 미국에서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면이라고 보는 진지한 신앙인들도 있다. 그들은 국교를 정하도록 노력하지 않지만 정부의 지원은 바라고 있다. 즉 그들은 특별한 종파에 대한 편애 없이 공평하게 시행된다면, 종교 관련 단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대법원은 50년 이상 종교 기관에 속해 있는 자선 단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 지급 문제로 고심해왔으며 일관성 있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자금이 종교 개종의 목적으로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교회나 종교 단체들은 다양한 사회복지 시설 및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여기서 손실이 발생하면 공공복지 체계에 상당한 부담이 생길 것이다. 대법원은 이러한 프로그램 일부를 지원하는 데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규정에 예외가 되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2002년 6월에는 타협적인 입장으로 나아가는 커다란 조치로 여겨지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판사들은 학생 가족을 대상으로 한 주 정부의 바우처(voucher:사립학교의 수업료 대신에 제출할 수 있는 정부기관의 공식적인 지불 증서) 발행을 승인했는데, 이 바우처는 그 학교가 종교 기관에 부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립학교에서 등록금으로 낼 때 사용될 수도 있다. 이 결정으로 바우처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막고 있었던 주요 법적 장애물이 제거되었지만, 완전한 바우처 이용 계획 채택 여부에 대한 궁극적인 결정은 50개 주 입법부에게 맡겨질 예정이다. 이는 계획의 적법성이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바우처에 반대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정치적인 바람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말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의 해결은 향후 미국에서 교회와 정부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줄 것이다.



수정헌법 제1조에는 두 가지 종교 관련 조항이 있다. 국교 설립 금지 조항은 대다수가 원한다 해도 정부가 하나의 종교적인 관행을 국민에게 강요하지 못하도록 한다. 자유로운 종교 활동 조항은 특히 주류 종교의 통제를 받고 있는 정부로부터 소수의 교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소수 보호의 가치는 21세기 초반에 미국이 역사상 가장 다종교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가면서 더욱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헌법 작성자들은 정부를 종교로부터 보호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를 정부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지배적인 종교를 설립하지 못하도록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모든 종교적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헌법 작성자들은 종교의 손아귀에 있을 경우 정부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종교가 미국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한번 어떻게 정부를 종교 문제에서 완벽하게 중립성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종교는 문화의 일부로서 많은 미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며, 정부가 이것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가장하는 일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자유로운 종교 활동 조항은 서로 다른 종교를 보호하고 모든 종류의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에게 똑같은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조항은 다원주의를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각 개인과 단체가 자신의 사상과 신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식민지 미국이 가장 우선적으로 영국인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1776년까지 스칸디나비아, 서유럽과 중부 유럽, 아프리카에서도 많은 이주자들이 식민지 미국에 오게 되었다. 비록 현대의 미국에 비해 당시에는 그렇게 다원주의적이지는 못했지만, 당시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할 때 식민지 미국은 이미 수많은 국적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는 곳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역동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남기 위해서는 지적인 이종교배가 필요하고, 또한 각 국민의 삶에 가장 중요한 면 중 하나인 종교적인 믿음이 정부의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어떤 종교 단체들은 인기가 없었지만 계속 살아남았으며, 결국 대다수 국민들은 심지어 경멸받는 단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신을 경배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러 도덕적인 기반을 둔 다수의 요구가 관철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일부다처제에 대한 반대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판결 중 하나를 끌어냈다.

모르몬 교 혹은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는 19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발생하여 일부다처제 때문에 기독교 단체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서부 개척지로 이주하라는 압력을 받은 모르몬 교도들은 현재의 유타 주에 정착하여 번영을 이루었다. 그들의 식민지는 크게 성장하여 미합중국의 하나의 주로 승인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모르몬 교도들이 일부다처제를 계속 유지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방법은 일부다처제를 범죄로 간주했지만 모르몬 교도들은 일부다처제가 자유로운 종교 행위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법원에 판결을 요청했다.

대법원은 당연히 미국 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비난하는 관행을 헌법으로 승인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은 종교적 관행을 분명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모리슨 웨이트 대법원장은 이 문제를 교묘한 방법으로 처리했는데,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자유로운 종교 활동 사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종교적 신념과 종교 행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웨이트 대법원장은 “종교는 인간과 신 사이에만 놓여 있는 문제이다... 정부의 행정 권력은 의견이 아니라 행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했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대법원은 “연방 의회는 단순한 의견에 대해서는 모두 행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회적 의무를 침해하거나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권한을 행사할 자유가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일부다처제는 명백히 사회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의회는 이 행위를 범죄로 여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모리슨 R. 웨이트 대법원장, 레이놀즈 대 미합중국 사건(1879)

연방 의회는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정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수정헌법 제1조는 명백하게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의회의 간섭과 관련이 있는 한 종교의 자유는 미국 어디에서나 보장됩니다. 결정해야 하는 문제는 현재 고려중인 사건이 이러한 금지 조항에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법은 정부가 행동을 취하도록 만들어졌으며, 법이 종교적 신념이나 의견에 대해 간섭할 수는 없지만 관행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종교적 숭배 의식의 하나로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믿는데 정부가 그러한 희생을 막기 위해 간섭할 수 없다면 정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혹은 자신의 죽은 남편의 화장터에서 종교적으로 자신도 태워야 한다고 믿는 부인이 있다면, 그녀가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정부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 미국이라는 국한된 영역 내에서는 사회 조직법으로 일부다처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념이라는 이유로 이와 반대되는 관행을 묵인할 수 있습니까? 이를 허락하는 일은 종교적 신념의 원칙이 영토의 법보다 우월하도록 만드는 일이며 실제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하도록 허락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정부는 그저 이름뿐일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판결이 다른 교파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종교 단체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에 대해, 대법원이 부결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라는 점이다. 대법원이 이러한 판결을 내린 이유는 종교와 관련된 행위, 즉 일부다처제가 시민 사회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행위와 신앙을 구분지은 점은 중요한 헌법상의 원칙을 마련했는데, 바로 신앙 자체는 공격받을 수도 없고 불법화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종교 활동과 관련된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성조기 경례 거부 행위에 대한 판례이다. 미국의 군소 종교 단체 중 하나인 여호와의 증인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에 대한 조항의 기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대법원을 계속해서 방문한 결과 종교 활동의 자유라는 이상을 현실로 바꾸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교파였으며 현재도 그렇다. 더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자신들의 글을 배포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종종 현지 당국과 마찰을 초래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오명을 얻게 되었는데,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는 일은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성조기에 경례를 올리는 조회 의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전쟁이 임박해오면서 그들이 이러한 믿음을 고수하자 여호와의 증인 교도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고 교인들은 벌금형을 받거나 범죄 심문을 받아야 했다. 릴리언 고비타스의 말을 들어보자.


릴리언 고비타스

나는 학교를 좋아했고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인기가 많았다. 나는 7학년 반장이었으며 성적도 좋았다. 난 내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로 두려웠기 때문에 선생님이 내 쪽을 쳐다보면 재빨리 손을 올리고 입술을 움직였다.

내 동생 윌리엄은 1935년 가을에 5학년이었다. 다음날 빌은 집으로 와서, 나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았어, 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부모님이 우리에게 강요한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결정이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행위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고 성경책을 확인한 다음, 진정으로 내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담임인 안나 쇼프스탈 선생님에게 찾아갔다. 더 이상 꽁무니를 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 설명을 경청했으며 놀랍게도 나를 껴안고는 그런 용기를 내다니 참으로 훌륭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끔찍했다. 나는 학급 전체에 설명을 해야 했지만 두려웠다. 나는 일어서 있어야 옳은지 앉아야 옳은지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몸동작과 말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경례를 할 때 자리에 앉았고 학급 전체가 깜짝 놀랐다. 그후 내가 학교에 갈 때마다 친구들은 자갈을 던지거나, 여기 여호와의 증인이 납신다, 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그저 나를 비웃었다...

내가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해 내 입장을 취한 지 50년이 더 지났지만 나는 언제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지체 없이 말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나를 박해했으니 너희들도 박해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번 판례는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는 그 교훈을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 피터 아이런스, 《신념의 용기(The Courage of Their Convictions)》 중에서


1939년에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 사건에 대해 심리를 열기로 합의했다. 당시 모두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이 공립학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처럼 여겨졌다. 유대 인 판사였던 펠릭스 프랭크퍼터는 모든 교파에게 종교의 자유를 줘야 한다는 생각과 법적으로 학교는 학생들에게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다. 대법원에 있는 한 동료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적어 보냈다.

법정에 서서 이 사건을 맡은 이후로 내 양심은 상당한 무게에 짓눌리게 되었다네. 내 성향은 모든 다양한 종교적려ㅔ÷蹊경제적 견해를 허락하는 것이네. 그런데 한편에는 헌법의 힘이 놓여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유와 관용, 분별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견해가 놓여 있는 영역에 이번 사건이 들어오게 되었다네.


대법원의 판사 9명 중 8명은 교육 당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얼마나 무력해졌는지 바로 드러나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과 반대되는 판결이 나오자 특히 작은 마을이나 시골 지역을 중심으로 교인들에 대해 수백 건의 공격 사례가 발생했다. 1940년 말까지 여호와의 증인 교인 1,500명이 공격을 당했으며 다수가 심하게 맞은 일도 350건이 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은 2년 이상 지속되었다. 당시는 미국 전체로 보면 좋지 않은 시기였지만 경험을 통해 배우는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격을 보며 무언가를 깨닫는 동안에, 그들은 유럽에서 히틀러가 무력한 소수에 대해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과,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6백만 명이나 되는 남녀노소를 없애려는 히틀러의 ‘최종 해결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대법원은 국기에 대한 경례 사례를 다시 한번 심의하기로 합의했다. 이번에는 로버트 H. 잭슨 판사가 여호와의 증인에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헌법이 정부의 활동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잭슨 판사는 후에 나치 전범을 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미국 측 검사가 되었다.

로버트 H. 잭슨 판사, 웨스트버지니아 교육부 대 바네트 사건(1943)

권리장전의 목적은 일부 주제들을 변화무쌍한 정치적 논쟁에서 분리시켜 다수나 정부 관리가 손댈 수 있는 범위 밖에 위치시키고 법정에서 적용할 수 있는 법적인 원리로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 및 집회의 자유, 그리고 기타 기본권들은 투표로 결정되거나 선거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권리가 아닙니다.

이번 사건이 까다로운 이유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원칙이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과 관련된 성조기가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양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될 수 있는 자유가, 사회 조직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없이 헌법의 제한 사항을 적용할 것입니다. 애국심이 강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애국심이 번성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자유로운 정신을 장려하는 우리 사회제도의 매력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적 개인주의를 지닐 수 있으며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 또한 지닐 수 있는데, 이는 때로 괴상한 행동이나 비정상적 태도라는 대가를 통해서만 성취되는 예외적인 사람들의 정신 덕택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처럼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국가에 무해하다면 그 대가가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를 수 있는 자유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현재 존재하는 질서의 핵심을 건드리는 일처럼 본질을 시험해보는 일이 바로 다를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 헌법이라는 은하수에서 붙박이별이 있다면, 그것은 직책에 상관없이 관리들이 정치나 애국심, 종교, 혹은 다른 사항에 대해 무엇이 정통성을 지닌다고 말하거나 시민들에게 말로 고백하거나 자신의 신념을 따라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예외를 허락하는 상황이 있다 해도 지금 당장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사건의 판결 이후 다른 사례가 있었지만 모두 다 정부 관리가 무엇이 정통한지를 명령할 수 없다는 잭슨 판사의 설득력 있는 ‘붙박이별’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해결되었다. 모든 판결이 소수 교파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가 어떤 사상이나 사고에 대해 처벌을 가할 수 없다는 개념은 반세기 전과 미국이 건국될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


종교는 여전히 미국 시민들의 개인 생활과 시민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국가의 공적인 문제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일반인들이나 학자, 입법자, 변호사들은 교회의 활동과 국가의 활동 사이 어디쯤에서 선을 그어야 하는지, 그리고 소수 교파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어느 정도까지 실행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항상 합의가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모든 논쟁에서 이길 수도 없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의 한계에 대해서 논쟁할 때처럼, 이러한 논쟁을 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진지함과 열정이 바로 헌법상의 자유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종교의 자유는 미국인들에게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는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도전하고 부딪치는 생동감 있는 자유이다.



| 참고 서적 |


* Gregg Ivers, Redefining the First Freedom: The Supreme Court and the Consolidation of State Power (New Brunswick: Transaction Books, 1993).

* Leonard W. Levy, The Establishment Clause: Religion and the First Amendment (2nd ed.,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4).

* John T. Noonan, Jr., The Lustre of Our Country: The American Experience of Religious Freedo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 Frank J. Sorauf, The Wall of Separation: The Constitutional Politics of Church and Stat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 Melvin I. Urofsky, Religious Freedom (Santa Barbara: ABC-CLIO,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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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3  표현의 자유



연방 의회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 수정헌법 제1조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당시를 지배하는 정치적인 견해에 도전하며 정부의 반격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 국가와 독재 국가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국민 권리의 신전이나 다름없는 연방 대법원에서 1932년에서 1938년까지 일했던 벤저민 카도조 판사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른 모든 형태의 자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기반”이라고 적었다.

미국인들은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라고 여기고 있지만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는 자유의 범위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조항이 특정한 민족 단체나 종교 단체에 대한 증오 섞인 발언을 보호하는가? 이 조항은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도록 선동하는 발언을 보호하는가? 음란한 자료들이 제1조에 의해 보호받고 있지는 않은가? 기업 광고도 헌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표현에 해당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정부 내에서, 그리고 일반 대중의 토론의 장에서 계속 논의되었지만 아직 대부분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놀랍거나 불안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변하는 개념이며 새로운 사고에 접할 때마다 뜨거운 논쟁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지금 사회에서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도전장을 던지고 있지만, 이는 표현의 자유의 의미에 대한 많은 도전 중 하나일 뿐이다.




표현의 자유가 항상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을 망라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18세기 중반에 윌리엄 블랙스톤 경은 《영국 법률에 대한 논평(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집필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사전에 억제하는 일이 없음”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정부가 한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출판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지만, 일단 개인이 말을 내뱉었을 경우 그 발언이 금지된 것이라면 처벌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고대 그리스 인들처럼 영국인들은 세 가지 유형의 발언에 대해 법적으로 제한을 두었는데, 바로 선동(정부에 대한 비판), 중상(개인에 대한 비판), 불경(종교에 대한 비판) 등이었다. 이 세 가지 금지된 발언 중에서 정치적 자유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발언은 선동이었다. 블랙스톤 경이 살았던 당시 지배층은, 정부나 정부 관리에 대한 비판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훼손함으로써 공적 질서를 전복시킨다고 믿었다. 블랙스톤에 따르면 정부는 개인이 정부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지만, 정부를 비난한 사람을 처벌할 수는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영국의 왕실은 수백 건의 선동죄 사례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고 종종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윌리엄 트윈은 국민에겐 정부에 대항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 뒤 체포되어 선동죄와 “왕의 죽음을 상상한 죄”를 범했다는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그에게 교수형을 집행한 다음 거세하고, 내장을 꺼낸 후 몸을 사등분하고 목을 베라는 선고를 내렸다. 자신의 의견을 발표한 다음 이러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별 의미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북아메리카의 영국인 정착자들은 영국의 법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정착 초기부터 이론과 실천 사이, 성문법과 그 법의 적용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했다. 식민지 의회에서는 표현을 규제하는 법령을 다수 통과시켰지만 통치자들이나 지방 법원은 엄밀하게 이 법령을 집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언론의 자유’ 부분에서 다루게 될 존 피터 젱어의 유명한 사례가 있은 뒤, 식민지 지도자들은 그 발언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따라 선동죄 혐의를 변호할 수단으로 설정했다. 즉 정부나 정부 관리를 비난할 경우 고발을 당할 수 있으나 피고인은 자신이 발언한 내용이 진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이 진실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일은 배심원에게 맡겨졌다.

주 정부들이 연방 의회가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수정헌법 제1조를 1791년에 승인하고부터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의회가 표현을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유일한 사례는 1798년의 선동법뿐이었다. 이 법률은 프랑스와의 허위 전쟁에서 비롯된 잘못 만들어진 법령으로 3년 후에 폐기되었다. 이 법령이 크게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진실 여부를 변호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지속된 남북전쟁 당시에는 국가 선동을 대상으로 한 몇몇의 규정들이 있었지만, 수정헌법 제1조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 부분의 의미에 대해 진정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17년 간첩법과 1918년 소요법이 제정되었을 때였다. 논쟁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논쟁은 미국 국민과 의회, 대통령이 모두 관여했으며 법정에서 이루어졌다.

대법원까지 가게 된 첫 번째 사례들은 정부에 대한 비난과 군대의 분열을 막기 위한 전쟁 당시의 조치들 때문이었으며, 처음에 대법원은 이러한 조치들을 인정했다. 판사들은 표현의 자유가 규정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특정한 시기, 특히 전시에는 대중의 안위를 위해서 표현이 제한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올리버 웬델 홈즈 판사, 셍크 대 미합중국 사건(1919)

우리는 피고인들이 많은 장소에서 전단지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을 말할 때, 평상시에는 이런 행동이 헌법이 규정한 권리에 포함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모든 행동의 특성은 그 행동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극장에서 허위로 불이야, 라고 소리쳐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야기한 사람을 법으로써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례에 있어 문제는, 연방 의회가 막을 권리가 있는 실제적인 악을 가져올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을 지닌 상황에서 혹은 그런 의도를 지니고 그 발언이 이루어졌는지 여부입니다. 나라가 전쟁 중에 있을 때, 평화시에 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이 전쟁 노력에 방해가 된다면 전쟁이 진행 중인 한 그러한 발언은 용인할 수 없으며, 대법원 또한 이러한 발언이 헌법으로 보호받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이라는 홈즈의 척도는 매우 그럴듯하게 들렸다. 표현은 자유로워야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다.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과 상식(사람이 많은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소리친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때때로 표현의 자유를 축소할 필요성을 가져온다.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이라는 척도는 법원이 50년 가까이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은 경우를 판단하는 아주 편리하고 간단한 척도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척도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으며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 전통은 너무 강력해, 비평가들은 반전을 외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면서, 이를 승인한 대법원에도 도전장을 던졌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목소리를 낸 사람 중 한 명은 하버드 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부유하고 저명한 집안의 자제인 제처리어 채피 주니어이다. 채피 교수는 평생 모든 국민이 정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변호했다. 그는 당시나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급진적으로 들리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채피는 전쟁 중에도 표현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시라는 상황은, 국민이 정부가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뿐만 아니라 다른 의견 또한 들을 필요가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제처리어 채피 주니어, <표현의 자유>(1920)

우리는, 전쟁이 진행중이고 헌법이 연방 의회에 군대를 양성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말하며 표현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수정헌법 제1조는 전쟁을 막 겪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조항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의회에 주어진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조항은 우편 서비스나 전쟁 수행 등 국민들의 자유로운 토론을 방해하기 쉬운 정부의 활동에 적용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이와 같다고 생각된다. 사회나 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해 진실을 발견하고 유포하는 일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제한이 없는 토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논쟁에 권력이 개입되면 한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있으며, 진실은 논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질서, 젊은이에 대한 훈련, 외부의 공격에 대한 보호 등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다. 때때로 무한한 토론은 이러한 목적에 방해가 되며, 표현의 자유와 정부의 목표 사이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이때에 표현의 자유를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수정헌법 제1조는 현명한 정치적 판단을 하도록 하는 구속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따라서 전쟁 수행에 직접적으로 위험한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전쟁 기간에도 표현은 자유로워야 한다.


채피는 이전에도 이러한 논의를 펼쳤으며, 홈즈 판사가 셍크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자 그를 만나 잘못된 판결이라고 말했다. 1919년에 또 다른 소요법 사례가 대법원에 상정되자, 과반수는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이라는 척도를 사용해 피고인들에게 선동죄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척도를 만든 홈즈 판사는 동료 루이스 D. 브랜다이스 판사의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올리버 웬델 홈즈 판사, 에이브럼스 대 미합중국 사건(1919)

제가 보기에 의사 표현을 제한하는 일은 완벽할 정도로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권한이나 전문지식을 확신하고 있으며, 정말로 어떠한 결과를 원한다면 자연스럽게 법을 통해 자신의 바람을 표현하고 모든 반대되는 생각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반대되는 발언을 허락한다면,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이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 발언이 별로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거나, 혹은 그 결과에 대해 여러분이 크게 관심이 없거나, 혹은 자신의 권한이나 전문지식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믿음들이 뒤집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사람은 최고의 선善이 생각을 자유롭게 교환할 때 더 쉽게 달성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즉 사람이 진실을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척도는 무엇일까요? 진실에 대한 각 개인의 생각은 경쟁이 심한 시장에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또한 진실은 원하는 바를 안전하게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이 우리 헌법의 논리입니다. 인생이 실험이듯이 헌법도 실험입니다. 우리는 매년 불완전한 지식에 기초한 예언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가늠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실험이 대법원 체계의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의사 표현을 억압하려는 시도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표현들이 법의 정당하고 강압적인 목적을 위협하여 즉시 제어해야만 국가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을 유도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저는 수정헌법 제1조가 선동에 대한 보통법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했다는 정부의 주장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는 그런 개념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이 지난 몇 년 동안 1798년에 만들었던 선동법에 대해 죄과를 지불하면서 참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을 수정하는 일을 시간에 맡겼기에, 직접적인 위험이 존재하는 위급한 상황에만 “연방 의회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라는 법령에 예외를 둘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 의견의 표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제 의견은 모두 밝혔지만, 이번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미국 헌법에서 명시된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저의 확신을 더욱 인상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에이브럼스 사건에서 홈즈의 반대 주장은, 대법원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중요한 권리로 보기 시작한 경우라고 간주되고 있다. 또한 그의 주장은 민주주의의 개념이 사고의 자유 시장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어떤 사상은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사상은 불안정할 수도 있으며 어떤 사상은 그릇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잘못되고 조악하며 쓸모없는 사상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진보를 용이하게 할 좋은 사상에 의해 떠밀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러한 사고들 모두에 똑같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홈즈의 시장에 대한 비유는 지적인 자유를 옹호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표현이다.

“사고의 시장” 이론은 민주주의의 토대 중 하나인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관련이 있다. 2세기 전에 토머스 제퍼슨은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판단 능력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통치자가 아니라 국민들이 자유로운 선거와 자유로운 논의를 통해 그날의 주요 쟁점을 결정해야 한다. 한 단체가 급진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모든 대중은 최고의 결과에 다다르기 위해 고려할 필요가 있는 모든 사실과 이론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홈즈나 다른 사람 누구도 표현에는 제한이 있다는 점을 제시하지 않았다. 곧 알아볼 것이지만, 오히려 지난 몇십 년 동안의 논쟁들 대부분은 보호받은 표현과 보호받지 않은 표현 사이에 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가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는 “이런 유형의 표현에 대해 왜 헌법적인 보호 범위를 적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었다. 일반적으로 합의가 되고 있는 한 가지 영역은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 문항이 어느 범위까지 포함하든지 간에 정치적인 표현은 보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제퍼슨과 매디슨이 아주 잘 이해했듯이 정치적인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민주주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선동죄 관련 사건에 대한 루이스 D. 브랜다이스의 견해는 이러한 논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미국 역사상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법원 판사 대다수는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이라는 잣대를 이용해 캘리포니아의 선동 금지 법률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들의 주장은 “범죄를 조장하고 공공의 평화를 교란시키며 정돈된 정부의 기초를 위험에 빠뜨리고 정부를 전복시킬 위협을 가하는 경향이 있는 공공복지에 유해한 표현으로”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주 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브랜다이스는 홈즈와 함께 반대하면서 수정헌법 제1조와 정치 민주주의를 결부시켜, 표현의 자유를 카도조가 말한 “다른 모든 형태의 자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현실화시켰다.

루이스 D. 브랜다이스 판사, 휘트니 대 캘리포니아 주 사건(1927)

이러한 문제에 대한 건전한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는 왜 한 정부가 대다수 시민들이 그릇되고 사악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믿고 있는 사회적럭姸╂蹊정치적 주장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권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독립을 얻어낸 헌법 작성자들은 미국의 최종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에서 신중한 권력이 마구잡이식 권력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목적이며 수단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행복의 비밀이며 용기가 자유의 비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정치적 진실을 발견하고 널리 퍼지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표현과 집회의 자유 없이는 토론이 불가능하고,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있기에 토론을 통해 유해한 사상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는 데 적절한 보호막을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인 토론이 정치적 의무이자 미국 정부의 기본적인 원칙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모든 기관이 쉽게 처할 수 있는 위험을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질서가 위법시 처벌받으리라는 두려움만으로는 유지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질서는 사고, 희망 그리고 상상을 억제할 위험이 있고, 두려움은 억압을 낳고, 억압은 증오를 낳으며, 증오는 안정적인 정부를 위협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안정적인 길은 고충이 되는 사항과 이에 대한 해결책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기회에 놓여 있으며, 악한 위원회를 위한 적절한 해결책은 선한 위원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적용되는 이성의 힘을 믿으면서 법으로 논쟁의 최악의 형태인 침묵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통치자들 중 다수가 때때로 압제를 휘두를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고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헌법을 수정했습니다.

심각한 위해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자유로운 표현 및 집회를 억압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마녀를 두려워해 그들에게 화형을 가했습니다. 비이성적인 두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표현의 기능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행사된다면 심각한 악이 초래된다고 믿을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막으려고 하는 악이 심각한 악임을 믿을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혁명을 통해 우리의 독립을 쟁취한 사람들은 겁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유를 희생시켜 질서를 쟁취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이성의 힘을 적용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닌 용기 있고 자신에 찬 사람들에게 표현을 통한 위험은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토론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악이 실행될지도 모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토론을 통해 오류와 그릇됨을 드러내고 교육을 통해 악을 피할 시간이 있다면, 이에 적용해야 할 치료법은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만이 억압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권위가 자유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이를 규칙으로 정해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것이 헌법이 명령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위급한 상황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표현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령에 항상 도전할 수 있습니다.


브랜다이스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시민’이며, 시민은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대중적이지 않은 생각을 말하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면 토론에 참여할 수 없으며,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이 믿는 바를 표현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모든 선택사항을 고려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적 과정의 핵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실은 너무 자명한데 사람들은 왜 미국에서조차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대중적이지 않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일어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며, 홈즈와 브랜다이스가 지적했듯이 다수는 기존에 받아들여진 의견에 도전하는 견해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수가 다수에 반대하는 소수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헌법 작성자들은 수정헌법 제1조를 만들었다. 홈즈의 유명한 말처럼 자유로운 사고의 원칙은 “우리와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생각에 자유를 주는 것”이다.

이는 쉬운 개념이 아니다. 전시와 같은 중요한 때에는 민주주의적인 도구를 통해 민주주의의 기초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허락하기가 쉽지 않다. 홈즈와 브랜다이스가 가르치려 했던 교훈은 남북전쟁 초기에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1940년대 후반에 미국 정부는 정부를 힘으로 전복시킨다는 생각을 옹호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을 박해했다. 1920년대 이후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보호 견해를 더욱 강조하던 미국 대법원의 과반수는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다. 대법원은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을 거의 가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주장이 사회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사악한 성향”을 나타낸다는 판결을 내렸다.

홈즈와 브랜다이스가 한 세대 전에 대중적이지 못했던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를 옹호하게 되었듯, 이번에는 휴고 블랙과 윌리엄 O. 더글러스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고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판사, 데니스 대 미합중국 사건(1951)

표현조차 헌법적인 면역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 시기에 악의 없는 발언은 다른 시기에는 공화국의 안정을 위해 멈추어야 하는 아주 파괴적인 불꽃에 부채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이라는 판단 기준의 의미입니다. 상황이 아주 극한적이어서 표현이 위협하는 악을 피할 방법이 없을 때가 표현을 멈출 시기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의 힘인 표현의 자유가 미국 파괴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입니다. 합법적으로 제한을 가하려면 두려움 이상이 필요하고 표현에 반대하는 감정 이상이 필요하며 표현의 내용에 대한 혐오감 이상이 필요합니다. 표현을 허락했을 경우 사회에 직접적인 피해가 있는 경우여야만 합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원하지 않는 생각을 파는 비참한 상인들입니다. 그들의 제품은 팔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재판상 공지의 사실(judicial notice)에 입각하여 재판을 진행한다면,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이 아주 강력하고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그들의 표현을 억압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제 의견이고 재판상 공지의 사실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되는 생각을 진술한 것 자체가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사실을 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냅니다. 편견이나 증오, 터무니없는 두려움이 이 장엄한 재판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이 임박했다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위험의 증거가 없는 한 표현의 자유를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냉전이라는 광란이 끝나면서 미국인들은 홈즈와 브랜다이스, 그리고 블랙과 더글러스의 주장에 담겨 있는 지혜를 파악하게 되었다. ‘나쁜’ 표현에 대한 치료는 억압이 아니라 ‘좋은’ 표현이다. 사실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가 옳고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 다수는 한때 이교도적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예로 노예제도 폐지 혹은 여성의 참정권 등이 있다. 비록 다수는 자신들의 소중한 믿음을 공격하는 급진적인 사고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겠지만, 헌법에 따르면 아무리 대중적이지 않다고 해도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정책이다. 1969년에 대법원은 마침내 선동법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 다수가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고 비난하는 사상을 옹호하는 자를 기소할 수 있다는 개념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에 대한 반대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이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당시처럼 다시 한번 국민에게 억압을 가할 것인지 궁금해했다. 놀랍게도 미국 정부는 항의 시위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 전체가 시위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동조했다거나, 시위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거나 체포해서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에서는 사람들에게 시위할 권리가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 참전에 대한 엄청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모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이오와 주 데모인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13세의 메리 베스 팅커와 다른 학생들은 베트남 전 참전에 대한 항의 표시로 검은색 완장을 차고 다녔다. 학교 당국은 이들의 행동이 교육 과정에 피해를 준다며 이들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다. 사실 학생들에 의한 교육 피해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학교 당국은 오히려 학교에서 반전 시위를 허락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 시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 걱정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소송사건 중 하나인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고등학생들이 정치적인 표현과 관련하여 교문을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들의 헌법적인 권리를 잃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오히려 학교가 시민을 가르치는 훈련장이라면, 학생들은 대중적이지 않은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학교 당국에 의해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었다.


메리 베스 팅커

자치 활동을 하는 10대 단체가 있었다... 우리는 검은 완장을 차고 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다. (1965년) 당시는 베트남 전 반대운동이 막 확산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물론 나중에 진행된 규모에 비해서는 초라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전국적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위대한 생각으로 한데 뭉치다니. 난 어린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그 일에 참여해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전쟁이란 어른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며, 이 일에 관한 어린 사람들의 의견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할 말이 있을 때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완장을 하고 학교에 간다는 조그만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일은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이전에 이미 작은 규모의 데모를 한 적이 있었지만 별일이 없었기에 그렇게 크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완장을 차고 등교하기로 했던 전날, 수학 시간에 일이 발생했다. 수학 선생님은 몹시 화를 내면서 학교에 완장을 차고 온다면 교실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게시판에는 완장을 금지하는 학교 정책을 알리는 글이 실렸다... 완장을 차는 학생은 정학을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 가서 오전 내내 완장을 차고 있었다. 아이들은 수군거리기는 했지만 나에게 모두 친절하게 대했고 전혀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점심식사 후에 수학 수업을 받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들어왔으며 모두가 쑥덕거렸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교실 문으로 와서는, 메리 팅커, 복도로 나와,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장 선생님은 내게 꽤나 적대적이었고, 결국 난 정학 처분을 받았다.

- 피터 아이런스, 《신념의 용기》 중에서


몇 년 후, 정부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시위 도중 성조기를 태웠다가 즉시 체포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법적인 권리를 주장했고, 이 사건은 대법원에 상정되었다. 대법원은, 그들의 행동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비난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징적인 정치 표현”이며 따라서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대법원의 보수적인 판사로 알려진 앤서니 케네디 판사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케네디는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처럼 자신도 그들의 행위가 불쾌하지만, 그런데도 대법원이 성조기를 태운 자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를 설명했다.


앤서니 케네디 판사, 텍사스 주 대 존슨 사건(1989)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은 우리가 때때로 좋아하지 않는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법과 헌법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올바른’ 결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법적 절차를 확실하게 따라야 하기 때문에 흔치 않은 이번 사례와는 달리 보통 우리는 결과에 대해 혐오감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결정을 유도한 가치 있는 원리를 훼손하지는 않을까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사례는 흔치 않은 사례 중 하나입니다...

상징이란 우리가 만들기 나름이지만, 성조기는 미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믿음, 즉 법과 평화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정신을 유지하는 자유의 상징입니다. 이번 사례는 이러한 믿음 때문에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인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국기가 그 국기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점은 괴롭지만,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이 판결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사그라들게 되었고 상식에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중 과거 베트남 전 전쟁포로였던 제임스 H. 워너의 말처럼 표현의 자유를 확실하게 옹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제임스 H. 워너,  

1989년 7월 11일 《워싱턴 포스트》에 보낸 편지(1989)

저는 (베트남에서 전쟁포로로 잡혀 있다 석방된 후)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성조기를 보았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보다 미국을 더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유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미국 국기가 태워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성조기를 태우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북베트남 사람들에게 받은 심문이 기억납니다. 그들은 내게 성조기를 태우며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의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이걸 보시오”라고 관리가 말했습니다. “당신 나라의 사람들은 당신이 지금 싸우고 있는 전쟁에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소. 이는 당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일이오.”

“아닙니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이는 제가 옳았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것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의견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 관리는 화가 나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제게 입을 닥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가 소리칠 때 저는 그의 눈에 담긴 두려움과 고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성조기를 태우는 사진으로 그에게 반박할 때 느꼈던 만족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조기를 태우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헌법을 수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고 자유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조기를 태우는 것입니다. 자유의 개념을 역이용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유를 퍼뜨립시다... 자유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무기입니다.


70여 년 전 브랜다이스 판사가 남긴 교훈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좋지 않은 표현에 대한 대응은 더 많은 표현의 기회를 주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은 배우고 논쟁하며 선택할 수 있다는 교훈 말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다른 형태의 표현은 어떠한가? 1937년부터 1971년까지 대법원에서 일했던 휴고 블랙 판사가 말했듯이 수정헌법 제1조가 절대적이어서 정부는 어떤 형태의 표현도 검열하거나 처벌할 수 없는가? 표현의 자유 조항이 보호하지 못하는 표현의 형태가 존재하는가? 작가나 예술가, 혹은 사업가, 저항가, 인터넷 이용자 등은 헌법에 의한 보호를 주장하면서 아무리 공격적이고 아무리 사람들을 동요시켜도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쉬운 정답은 없다. 표현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일반 대중의 합의도 없으며 대법원의 확실한 판결도 없다. 대중의 감수성이 변하고, 미국이 더욱 다양하고 열린 사회가 되어가며, 새로운 전자 기술이 생활의 곳곳에 스며들면서, 수정헌법 제1조의 의미 또한 과거에도 그랬듯이 다시 한번 유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비정치적인 내용일 경우 그렇다.

1940년대 초반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가 음란하거나 선동적인 표현, 전투적인 언어, 상업적인 언사 등은 보호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선고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몇십 년 동안 대법원은 이 모든 부분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모든 부분에 대해 헌법상의 보호를 확대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많은 면들을 표현의 자유 조항의 보호에 두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법원이 고심한 만큼 일반 대중의 의견에도 혼란과 불일치가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었다. 대법원은 판결을 내리고 국민들이 아무 말 없이 복종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대법원은 변화하는 사회적려ㅔ÷?관습을 반영한다. 대법원 판사들은 헌법 작성자들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동시에 현대 생활 속에 그 정신을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일 수 있지만, 성조기 소각 사례처럼 대법원이 어렵고 논쟁이 많은 의견을 내릴 때에는, 왜 이러한 판결이 필요한지 어떻게 이러한 판결이 현대적인 생활에 대체적으로 들어맞는지에 대해 대중이 이해할 만한 여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대법원과 국민들에게 어려운 문제는 어떤 표현이 보호를 받고 어떤 표현이 보호를 받지 말아야 하는지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하는가이다. 음란물과 같은 일부에서는 법적인 선을 긋는 일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음란성 자체가 객관적이고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지적했듯이, 한 사람이 음란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한 사람에게 불쾌한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려던 그러한 자유인가? 예술적 표현, 특히 현재의 미적인 도덕적 규범에서 벗어난 예술적 표현이 헌법 작성자들이 수정헌법 제1조를 통해 보호하려던 표현인가?

비슷한 경우로 미국에서는 돈이 선거 과정에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에 대해 20년 이상 논쟁이 진행되어왔다. 선거 자금을 모금하는 방법과 사용하는 방법을 통제하고 기부자들이 낼 수 있는 돈의 한계를 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몇 년 전에 정치 자금 또한 일종의 표현에 속하며 자금이 정치적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통제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어떻게 해야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이 공정한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의 소중한 개념과 부딪치지 않게 유지할 수 있는지 명백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법제도뿐만 아니라 미국인이 직면한 가장 쉽지 않은 일은 아마도 수정헌법 제1조가 새로운 전자 기술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결정하는 일일 것이다. 웹사이트는 홈즈 판사가 말했던 “사고의 시장”의 또 다른 예에 불과한가? 언젠가 세계의 모든 가정에서 이미 웹사이트에 있는 자료들에 접근하고 각자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세계에 말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수정헌법 제1조는 필요없게 되는 건 아닌가?

이와 같은 문제는 현재 미국의 법정에서, 의회 청문회에서, 정부 위원회에서, 대학에서, 대중 포럼에서, 각 가정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권리 중에서 표현의 자유만큼 소중히 여겨지는 것은 없으며 또 그렇게 변하는 견해에 민감한 권리 또한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 미국인들은 브랜다이스 판사가 지적했듯이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지니고 민주주의의 진행 방식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대중적이지 않은 견해에 반대할 기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 또한 들어야 함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항상 만족하지는 않지만, 홈즈 판사가 “수정헌법 제1조는 우리가 동의하는 표현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표현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선언했던 그 진리는 받아들이고 있다.



| 참고 서적 |


* Lee C. Bollinger & Geoffrey R. Stone, Eternally Vigilant: Free Speech in the Modern Er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2).

* Zechariah Chafee, Jr., Free Speech in the United State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41).

* Michael Kent Curtis, Free Speech: The People? Darling Privileg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0).

* Harry Kalven, A Worthy Tradition: Freedom of Speech in America (New York: Harper & Row, 1988).

* Cass R. Sunstein, Democracy and the Problem of Free Speech (New York: The Free Pres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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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4  언론의 자유



연방 의회는...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 수정헌법 제1조



언론의 자유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권리이지만,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제도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자유와는 차이가 있다. 언론의 자유는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출판할 수 있는 권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쇄 및 방송 매체들이 정치적인 견해를 표현하고 뉴스로 다루어 발행할 권리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 사항 중 하나이며, 20세기 미국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이 말했듯이 “언론의 자유는 특혜가 아니라 위대한 사회를 구성하는 유기적인 필수품”이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신문렀捉嘲윷텔레비전에 의존하여 세계의 뉴스나 의견, 정치적 견해들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로운 언론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신호 중 하나는, 반민주적인 정치 세력이 한 국가를 통치하게 되면 맨 처음 하는 조치가 바로 언론을 통제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토머스 제퍼슨, 자유로운 언론의 필요성에 대해(1787)

우리 정부의 기초는 사람들의 의견에 있기 때문에 첫 번째 목표는 그 의견을 올바르게 유지하는 일이어야 한다. 누가 나에게 신문이 없는 정부와 정부가 없는 신문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정부가 없는 신문을 택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의 기원은 거의 비슷하다. 영국법에서는 문서로써든 말로써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쇄된 사항의 진실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부는 비판이 공무원들의 도덕성과 신용에 의문을 던지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간주했다. 사람들이 정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들의 견해를 출판할 수 있는 진정한 언론의 자유를 향한 행진은 멈추어 있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의 위대한 법 논평자인 윌리엄 블랙스톤 경은 언론의 자유가 자유로운 국가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윌리엄 블랙스톤 경, <영국 법률에 대한 논평>(1765)

영국 법률에 의해 불경스럽거나, 비도덕적이고, 반역적이며, 종파 분리를 유도하고, 선동적이며, 중상 모략적인 죄가 처벌되는 경우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언론의 자유는 전혀 침해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론의 자유는 자유로운 국가의 본질에 필수적이지만, 이러한 자유는 출판에 대한 사전 제재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출판되었을 때의 범죄성 여부에 대한 비난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자유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생각을 대중 앞에서 내보일 수 있는 분명한 권리가 있다. 이를 금지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적절하고 사악하며 불법적인 내용을 출판한다면 그 무모함에 대한 결과는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불경스럽거나, 비도덕적이고, 반역적이며, 종파 분리를 유도하고, 선동적이며, 중상 모략적인 죄”를 구성하는가? 사실 그러한 죄들은 정부가 규정하기 나름이었으며, 실제로 심하지 않더라도 정부 정책이나 정부 지도자들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을 출판했을 경우에도 징역형 이상의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주관적인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진실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식민지 미국의 지도자들은 영국 보통법을 미국으로 가져왔으며 식민지 관리들은 영국의 지도자들이 그랬듯이 언론에 대해 관용을 거의 베풀지 않았다. 1735년에 뉴욕 식민지 총독 윌리엄 코스비는 신문 발행인 존 피터 젱어를 선동죄로 고소했다. 코스비가 중요한 사안에서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는 판결을 내린 판사를 직위 해제시킨 일을 젱어가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블랙스톤 경이 선언한 전통적인 원칙에 따르면 젱어는 비판의 글을 발행할 권리가 있었지만 이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렇지만 젱어의 변호사인 앤드루 해밀턴은 젱어가 발행한 글이 사실이라는 점에서 배심원들이 젱어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고 확신했다. 비록 영국과 미국의 법률에서 진실이라는 개념이 선동죄에 대한 완벽한 변호 수단으로 사용되기 몇 해 전 일이었지만, 이 사건은 중요한 정치적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미국 배심원들은 진실 혹은 심지어 하나의 의견을 발행한 이유로 한 사람을 기소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식민지에서 선동죄 사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독립혁명 당시에는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출판사들이 영국 왕실과 왕실의 산하에 있는 식민지 미국의 지방 지도자들을 자유롭게 공격했다.

수정헌법에서 언론의 자유 조항을 만든 작성자들이 젱어의 사례로부터 얻은 교훈을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모든 주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법령을 포함해 영국의 보통법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연방 의회는 1798년에 프랑스와의 가짜 전쟁 동안 선동법을 통과시켰지만 미국의 대통령과 정부에 반하는 선동죄의 변론으로 진실 여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이 법은 제퍼슨의 공화당에 반대하기 위한 비열하고 당파적인 목적으로 집행되었다. 연방주의 판사들은 사실상 진실 여부를 변론으로 사용한다는 부분을 무시했으며 영국인들이 그랬듯이 모든 발언을 선동죄로 몰아붙였다. 예를 들어 버몬트 주의 신문 발행자였던 매튜 라이언스는 존 애덤스 대통령이 “우스꽝스러운 허위의식과 바보 같은 아첨, 이기적인 욕심에 대한 끝이 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런 발언 때문에 라이언스는 1천 달러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징역 4개월 만에 벌금을 모금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선동법은 1801년에 폐지되었으며 연방 정부는 남북전쟁 당시에 약간 제한을 둔 점을 제외하고는 이후 백 년 동안 언론의 자유 조항을 전혀 침해하지 않았다. 선동죄는 점점 더 범죄가 아닌 민사상의 문제가 되었으며 유명 인사들이 자신들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연방 의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선동법을 통과시켰고, 표현의 자유를 다룬 이전 장에서 설명했듯이 선동법 사례들은 우선 표현으로 간주되었으며,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이라는 척도가 만들어지도록 유도되었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 면에서는 1930년대 초반까지 눈에 띄는 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30년대 초반에 사전 제재라는 원칙이 다시 한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신문사들은 대법원에 아주 강력한 동맹자가 있음을 발견했으며, 대법원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포함되어 있는 ‘언론의 자유’라는 구절을 언론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방패로 사용했다.



언론의 자유 조항에 관련한 현대적인 법원 판결은 1931년 니어 대 미네소타 주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사전 제약에 대한 블랙스톤 경의 견해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강력하고 독립적인 언론 구성의 원리를 구축하는 첫걸음이었다.

미네소타 주는 다른 주와 비슷한 법령인, “악의적이고, 중상하며, 명예를 훼손하는” 등 공적으로 방해가 되는 발행물을 제재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법령에 따라 《새터데이 프레스》라는 한 신문이 폐간될 위기에 놓였다. 《새터데이 프레스》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공격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과 사업계 거물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글을 실었다. 주 법원은 《새터데이 프레스》의 폐간을 판결했고, 《새터데이 프레스》는 대법원에 항소했다. 그곳에서 에반스 휴즈 대법원장은 수정헌법 제1조 언론의 자유 부분을 미국의 모든 주에 적용시켰고(이전에는 연방 의회에만 적용되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정부가 헌법에 명시된 신문사의 출판권을 박탈할 수 없다는 점을 되풀이했다. 이는 신문사가 어떤 식으로든지 처벌받을 수 없으며 개인의 명예 훼손 문제에도 기소당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판결은 30여 년 후 자유로운 언론의 두 기둥을 세울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첫 번째 기둥은 1960년대 민권운동 상황에서 마련되었다. 당시 모든 주에서는 실제적으로 사전 제재를 가하지 않았지만, 인쇄된 정보에 악의가 있거나 잘못되었을 경우 피해자가 명예 훼손으로 민사소송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었다. 당시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민권운동가들과 경찰 간에 충돌이 발생했는데, 민권 관련 단체와 개인들이 《뉴욕타임스》를 통해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라는 제목으로 한 페이지짜리 광고를 실었다. 이 광고에는 민권운동가들이 직면한 어려움과 민권운동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몽고메리의 경찰국장인 I. B. 설리반은 광고에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공무 수행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는 사실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며 《뉴욕타임스》를 고소했다. 현지 배심원들은 설리반의 손을 들어주었고 신문사에 50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설리반이 신문사에 소송을 걸었던 이유는 사실과 다른 오류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광고에 마틴 루터 킹이 4번이 아니라 7번 투옥되었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남부 사람들이, 인권 투쟁에 대해 언론이 일반인들의 의견에 반하는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시위자가 구타당하거나 체포될 때마다 언론은 전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이 소식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일 뿐만 아니라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공한 신문 중 하나였다. 《뉴욕타임스》가 엄청난 벌금형(1964년에 50만 달러는 상당한 금액이었다)을 받는다면, 그보다 규모가 작고 덜 알려진 신문사들은 민권운동 기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판결이 실행되면 수정헌법 제1조에 명시된 언론의 자유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번복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영국의 유산으로 받아들였던 단순한 사전 제재 금지 규정에서 훨씬 더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대법원은 신문사가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공무원의 명예에 해를 가하려는 악의적인 의도로 기사를 인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무원과 공무원의 임무 수행에 관련한 기사일 경우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판결은 언론이 아무렇게나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시민 개인들에게 명예훼손에 대한 소송을 걸 수 있는 권리를 주면서도, 정부나 정부 관리들에 대해 완전하고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유 언론의 중요한 문제 하나를 건드린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뉴스를 “맹렬히 추적하다” 보면 실수가 생길 수도 있는 법이므로 때로 의도치 않은 실수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들은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으며 신문사가 그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위협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 브레넌 주니어 판사, 《뉴욕타임스》 대 설리반 사건(1964)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공적인 문제에 대한 논쟁은 제약받지 않고 개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논쟁엔 격렬하고 통렬하며 때로 불쾌할 정도로 정부와 정부 관리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이 포함될 수 있다는 원칙을 국가가 따르고 있는가를 다루는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주요한 공적인 문제 중 하나에 대한 불만과 항의를 표현하고 있는 광고는 명백하게 헌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어 보입니다. 문제는 일부 사실과 관련된 언급이 잘못되었으며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헌법적인 보호를 무효로 만들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바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들은 이제까지 진실 여부에 대한 척도에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화자에게 진실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하는 경우엔 특히 그랬습니다. 법적인 보호는 진실성이나 대중성 혹은 제공된 믿음이나 사상의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실상의 오류가 언론의 억압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공직자의 명예에 피해를 준다고 해서 언론의 억압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공직자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 공직자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이유만으로는 법적인 보호를 무효화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 언론의 두 번째 기둥은 ‘국방부 보고서 판결’로 알려진,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에 반대하는 한 민간인 직원이 국방부에서 몰래 훔친 자료가 발간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보고서는 1967년에 국방부의 명령으로 집필된 대규모 조사 보고서의 일부로, 당시 동남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군사 활동에 관계된 기밀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에 더욱더 개입하도록 이끈 판단의 오류뿐만 아니라 정책 입안자들의 의도가 드러나 있었다. 비록 새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백악관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닉슨 대통령은 이 보고서가 발표되면 국가안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보고서 공개에 반대했다.

《뉴욕타임스》는 1971년 6월 13일에 국방부 보고서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정부가 곧바로 일시적인 금지 명령을 내렸을 때 《워싱턴포스트》가 자신들이 입수한 국방부 보고서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워싱턴포스트》가 국방부 보고서를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건을 법원으로 끌고 갔고, 그러자 이번엔 《보스턴글로브》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하급 법원들에서는 사전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정부가 이 사안을 신속히 해결하고 싶어했기에 대법원이 사건을 맡아 처리하기로 했다. 이전까지 사안을 너무 느리게 처리한다는 비판을 받곤 했던 대법원이 이번에는 아주 빠른 속도로 판사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금요일에 이 사건에 대해 재판을 열기로 합의하고 다음날 구두 논쟁을 벌인 후 화요일, 즉 《뉴욕타임스》가 기사화한 지 17일 만에 판결을 내렸다.

그렇지만 대법원의 판결은 아주 명쾌했다. 대법원은 정부가 신문을 검열하거나 당혹스러운 정보일 가능성이 있는 내용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판사 3명은 정부가 하급 법원에서 금지 명령을 통과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며 사전 제재 시도를 묵과한 하급 법원들을 비난했다. 대법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전 제재를 가할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전시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명백하게 민감한 정보는 여전히 예외가 되었다), 국방부 보고서에 적혀 있던 문서는 사전 제재 대상 범주에 들어 있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판사, 《뉴욕타임스》 대 미합중국 사건(1971)

이렇게 신문사가 폭로한 사실이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능성이 언론에 대한 사전 제재를 가할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수정헌법 제1조의 주요한 목적은 널리 퍼져 있는 당혹스러운 정보에 대한 정부의 억압 관행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해 전국에서 상당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적인 사안에 대해 열려 있는 논쟁과 토론은 우리 국가의 건강에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판결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인 맥스웰 테일러는 대법원의 결정에 대해 정부 관리 다수가 느끼고 있는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시민의 알 권리는 “좋은 시민이 되고 자신의 직분을 이행하기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에 제한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대법원 판결의 목적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도록 허락하는 일이었다. 더글러스 판사는 베트남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전국적인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시민들이 중요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시민으로서의 직무를 다하고 이러한 논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그리고 다른 주요 신문사들은 개인이 아니라 수천 명의 직원과 수백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기업이다. 사업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언론 매체에 그렇게 많은 허용 범위를 부여하는 일이 국민들의 권리와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시민의 의무에 대해 브랜다이스 판사가 한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는 “공개적인 토론은 정치적인 의무이며 미국 정부의 기본적인 원칙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토론을 통해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정확한 정보는 항상 정부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출처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출처에 대한 두려움 없는 완전한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토머스 칼라일, 언론에 대하여(1841)

버크는 국회에 세 가지 권부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기 기자들의 회랑에 그 세 가지보다 훨씬 중요한 네 번째 권부가 앉아 있다. 이는 은유적인 표현이나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며 요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버크는 언론을 ‘네 번째 권부’라고 부르며 언론이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한 국가의 통치에 있어서 중요한 출처가 된다는 점을 시사했다. 현대에 우리는 자유 언론의 역할을 이런 식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언론은 준기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포터 스튜어트 판사는 정치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정치 과정을 정직하게 유지하는 데 자유 언론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스튜어트 판사의 동료인 윌리엄 O. 더글러스 판사는 언론이 ‘대중의 알 권리’를 가능하게 하며 “알 권리는 국민이 지배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포터 스튜어트 판사, 자유 언론의 역할에 대해(1975)

언론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헌법의 구조적인 조항이다. 권리장전의 다른 조항들 대부분은 특정한 자유와 개인의 특정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언론의 자유 조항은 한 기관까지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언론이 이런 구조적인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사법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시민들은 피고의 권리 보호는 별도로 하더라도 입법부의 사법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 신속히 처리되었는가, 아니면 늦춰지는 바람에 고충이 생겼는가?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현지 법원에 가서 재판을 볼 시간이 없으며 심지어 케이블 TV에서 방영되는 재판 중계를 볼 시간도 없다.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즉 조간신문이나 저녁 TV 뉴스,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언론이 재판정에 참석하지 못한다면 언론은 “국민이 지배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공정한 재판을 위한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범죄가 특히 혐오스러울 경우, 현지 시민들의 감정이 아주 격해 있는 경우, 지나치게 공개해서 공평한 배심원을 선택하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 언론이 배제되어야 하는가? 대법원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워렌 E. 버거 대법원장은 “언론과 출판에 대한 사전 제재는 수정헌법 제1조에 명시된 권리에 대한 가장 심각하고 가장 참을 수 없는 침해이다”라고 말했다. 판사들은 이러한 사안들을 다룰 수 있는 나름대로의 수단을 다양하게 지니고 있다. 가령 원고 및 피고 측 변호사들에게 보도 금지령을 내리거나 좀더 감정이 격하지 않은 환경으로 재판 장소를 옮기거나 혹은 배심원들을 따로 고립시키는 등의 방법이 있다.

재판에 대한 언론 취재와 관련하여 주요한 사례는 리치몬드 신문사 대 버지니아 주 사건으로, 이 사건은 자유 언론의 노력을 통한 국민의 알 권리를 확립시켰다. 한 남성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세 번이나 무효 심리가 이루어졌다. 네 번째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판사럭講渶변호사 모두 관객과 언론인들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로 합의했다.

현지 신문사는 판사의 결정에 도전하는 소송을 걸었으며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 언론의 자유와 제6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사이의 무게를 가늠해본 후 두 조항이 서로 상치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6조가 보장하고 있는 “신속하고 공개적인 재판”은 비밀 재판으로부터 피고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대중이 법정에 참석해 재판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권리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버지니아 주의 모든 사람 혹은 리치몬드에 사는 모든 사람이 법정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언론이 자유롭게 재판 과정을 보도하고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워렌 E. 버거 대법원장, 리치몬드 신문사 대 버지니아 주 사건(1980)

권리장전은 재판 과정이 공개되었던 오래된 역사적 배경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일반인이 재판 과정에 접근하는 일은 재판 과정 자체의 중요한 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여 법정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 재판 행위는 “자유로운 영국 헌법의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장점”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표현과 언론 등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는 이러한 명백한 권리 보장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재판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수정헌법 제1조는 대중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정보 창고를 정부가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언론과 개인의 자기 표현까지 보호합니다.” 언론의 자유는 듣는 자유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러 맥락을 통해 이 법정은 수정헌법 제1조에서 보장된 정보 및 사상의 권리에 대해 언급해왔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권리가 의미하는 바는 수정헌법 제1조가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정부는 수정헌법 제정 당시에도 대중에게 오랫동안 열려 있었던 법정의 문을 닫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정헌법 제1조는 불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1조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회라는 맥락에서 읽는다면, 명백한 언어로 광범위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판결이 범죄 재판과 관련이 있지만 민사소송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1902년부터 1932년까지 대법원 판사로 일했던 올리버 웬델 홈즈는 대중의 감시는 사법 행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모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의 이해관계와 관련한 재판은 대중이 직접 보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함이 바람직하다. 이는 두 시민 사이의 논쟁이 대중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공무 수행 과정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정의를 집행하는 사람들이 항상 공적 책임감을 지니고 행동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최근에는 기술 개발을 통해 법정에 참석한다는 개념이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현재 법정에 카메라를 설치해도 된다는 헌법상의 권리는 없지만, 여러 주에서는 재판을 중계하도록 허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처음 텔레비전이 나왔을 때는 카메라가 너무 큰데다 밝은 조명이 필요했고 모두에게 마이크를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중계가 불가능했다. 오늘날에는 법정 전체를 소형 카메라 몇 대로 다 찍을 수 있으며 옆방이나 주차해놓은 차량 안에서도 카메라를 통제할 수 있다. 비록 실험으로 시작했지만 TV 재판 중계는 매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미국에는 현재 변호사와 법학 교수들의 논평과 함께 재판 과정을 중계하는 ‘코트 TV’라는 케이블 TV 방송국이 있다. 이런 식으로 언론 매체는 계속 대중과 사법 체계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청자들이 법정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연방 의회 상하원의 회의 과정, 의회 청문회, 주 의회의 회의는 케이블 방송인 C-SPAN을 통해 중계된다. 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의정 활동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언론 매체의 또 다른 예이다.)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 및 언론의 자유 조항에서 추론할 수 있는 ‘알 권리’라는 개념은 미국의 정치 및 사법 사상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민주주의 및 그와 관련된 자유는 정체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변하면서 함께 변화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국민의 알 권리’는 언론의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민주주의라는 더 넓은 개념과도 관련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대로 민주주의를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고 정의한다면, 정부의 일은 즉 국민의 일이 된다. 따라서 정부의 일은 자유 언론의 구조적인 역할과 시민의 민주적인 관심사가 상호 작용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딱 떨어지는 사안은 아니다. 국민이나 언론이 정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안보, 외교 정책, 정책 개발에 대한 내부 논쟁과 관련한 문제들은 현재 대중의 감시 대상이 되지 않는다. 수정헌법 제1조에 대한 권위자인 로드니 A. 스몰라 법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 정부는 대체적으로 개방되고 투명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개방된 민주 정부라고 해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일부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의 비밀성과 기밀성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이 매우 상식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 서로 경쟁하는 힘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한편에서는 정부 관리들이 언론이나 대중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려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의 힘을 등에 업은 언론이 종종 필요 이상의 정보를 얻고자 한다. 이러한 긴장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 연방 의회는 1967년에 정보자유법(FOIA)을 통과시켰다. 대중이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의도된 현행 연방법이 종종 역효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여론에 따라, 정보자유법은 언론 및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정보자유법이 해석되는 동안 법원에서는, 이 법안의 원칙은 정보가 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므로 연방 정부의 기관들은 정보를 원하는 시민들의 요구에 즉시 성실하게 응해야 한다는 판결을 계속 내렸다. 연방 법안을 보충하기 위해서 모든 주에서는 주 정부의 업무 및 기록 문서와 관련하여 유사한 정보의 자유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따르면 시민과 언론은 정보공개 요청을 문서로 제출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정부 문서 요청서의 대다수는 언론에 의해 제출되었다. 아무리 훈련된 연구자라고 해도 개인은 정보공개 요청으로 얻어낼 수 있는 자료에 한계가 있지만 신문사나 방송사는 직원들이 많기 때문에 팀을 구성해서 한 문제를 다룰 수 있으며, 대량의 문서를 복사하는 데 필요한 비용 또한 지불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문 매체나 방송 매체가 정부 업무의 모든 것을 조사하고 모든 재판을 다루며 모든 행정 청문회에 대해 보도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이런 불가능성이 언론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사항으로 만들고 있다. 개인은 방송 매체나 현지 신문을 통해 제공되는 통합적인 취재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텔레비전을 통해 청문회나 재판을 직접 볼 수 있고, 심지어 인터넷에서까지 많은 뉴스와 논평을 접할 수 있다. 이렇게 한 개인이 정부의 업무에 대해 원하는 정보를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이러한 정보는 한 개인이 현명한 투표를 하고 일부 제안에 대해 탄원서나 청원서를 제출하며 입법부에 서한을 보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자유로운 언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언론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지나친 자유는 방종이 된다. 정부의 타락상을 들추어내는 데 언론이 큰 몫을 했다며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정부 관리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고 하다 보니 사생활 침해가 이루어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실재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들이 우선적으로 답변을 해주었다. 법원들은 수정헌법 제1조의 범위를 확대하면서 동시에 일부 제한을 가했다. 언론 매체는 이런 제한 사항들이 헌법이 보장한 언론의 자유를 어느 정도 훼손한다며 불만을 표시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제약 대부분은 자유 언론이 사회에 부여된 일반적인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상식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제한에는 주 정부가 범죄인 처벌을 위한 증거물을 필요로 할 때 그 증거를 제공해준 사람을 기자들이 비밀로 해야 한다는 제약, 공직자가 아니라 개인이 명예 훼손을 당한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민사소송에 대한 책임, 그리고 교도소와 같은 일부 정부 시설에 대한 접근 제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언론은 미국이 군사 작전을 수행중일 때 기자들이 최전선에 접근할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해왔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기자가 아니라 개인에게 이러한 제약을 내렸을 때 말이 되는가를 한번 물어보는 일일 것이다. 대부분 경우 이렇게 제약을 가하는 것에 일리가 있다. 한 개인이 교도소를 돌아다니고 전쟁터 최전선에서 움직이도록 허락할 만한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언론이 우리를 위해 정보를 모아주기를 기대하는 한편 언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한편 언론이 공직자의 공적 업무 수행과는 상관없는 문제들을 보도하면서 공직자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난이 계속되어왔다. 최근엔 특히, 인터넷과 케이블 TV가 성장하면서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사생활에 대한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다루어졌으며, 이런 경향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혹은 언제까지 방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공무와 사생활은 뚜렷하게 구별되어 한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은 공직자의 사생활을 드러내는 일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그 사람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는 또한 공직자를 선거할 때 국민들이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 기자들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던 미국 상원의원의 간통 사건을 기사로 다루었다. 이 기사로 인해 그 상원의원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는 언론을 공격하면서 “이런 상황은 2백 년 전 미국 건국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원의원의 지적이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 미국 건국자들의 일부에도 폭로 중심의 언론이 공격을 한 적이 있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애정 행각이 기사의 주제가 되긴 했지만 둘 중 누구도 언론에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밀턴은 언론을 통해 기사에 대응했다. 그는 마리아 레이놀즈와의 관계를 인정했지만 다른 비난에 대해서는 반박했다. 해밀턴은 죽기 직전에 명예 훼손으로 기소된 뉴욕의 한 출판사를 변호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에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좋은 의도로 진실을 출판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된다”고 선언하며 자유로운 언론의 가치를 옹호했다. 한편 제퍼슨은 자신의 노예 샐리 헤밍스와의 관계에 대해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언론이 자신과 자신의 동맹자들에 대해 독설로 일관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는 필수 사항이라는 믿음을 견지했다. “그들이 허위와 비방으로 신문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나는 거짓을 말하고 비방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를 보호할 것이네”라고 제퍼슨은 한 친구에게 말했다.



20세기 초에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서 언론 자유의 역할에 대한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몇 년 동안 라디오와 TV는 다른 활자 매체에 비해 덜 보호받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많은 방송국이 전파를 통해 프로그램을 전송하는 방식에 기술적인 제약이 많다는 잘못된 믿음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연방 의회는, 전파는 대중의 소유이며 방송국은 특정한 주파수로 방송하도록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고 법원도 이에 동의했다. 라디오와 TV 방송국들은 인가를 받는 대신 정부의 규제를 받아야 했으며, 이러한 규제들은 종종 뉴스 정보를 수집하거나 의견을 방송하는 데 제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케이블과 위성 방송 체계의 개발로 방송이 제한적이라는 개념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방송 매체는 전통적인 인쇄 매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으며 이에 대한 해답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 개인이 아주 작은 투자로도 자신의 의견을 현지 주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개인이 신문사나 방송사처럼 뉴스를 모으는 능력을 지닐 수는 없다 해도 의견 면에서는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일부 개인들은 정치럼?쓿주식 시장 등 특정한 정보를 즉시 제공할 수 있는 인터넷 뉴스 서비스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제 세계는 인쇄 매체와 방송 매체에 이어 세 번째 언론 매체인 온라인 서비스를 지니게 된 것이다.

국민의 권리 면에서 뉴스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많은 미국 신문들의 발행인 난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이 실려 있다.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개인을 정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브랜다이스 판사는 자유로운 언론이란 한 개인이 시민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파악했다. 아마도 언론에 의한 정보 수집과 배포처럼 권리의 특성이 빠르게 변하는 영역은 없을 것이다. 수정헌법 제1조 언론의 자유 조항은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와 국민의 구조적인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참고 서적 |


* Fred W. Friendly, Minnesota Rag (New York: Random House, 1981).

* Elizabeth Blanks Hindman, Rights & Responsibilities: The Supreme Court and the Media (Westport: Greenwood Press, 1997).

* Anthony Lewis, Make No Law: The Sullivan Case and the First Amendment (New York: Random House, 1991).

* Lucas A. Powe, Jr., The Fourth Estate and the Constitution: Freedom of the Press in Americ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

* Bernard Schwartz, Freedom of the Press (New York: Facts on File,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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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5  무기 소지의 권리



규율 있는 민병들은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 소지 및 휴대에 관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 수정헌법 제2조


수정헌법 제2조에 명시된 무기 소지의 권리를 해석하는 일은 국민의 권리 중에서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이다. 대법원은 표현의 자유나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을 보호하는 권리와는 달리 무기 소지의 권리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 조항의 의미에 대한 권위 있는 사법적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 국민과 연방 의회, 주 정부 입법자들은 수정헌법 제2조의 의미에 대해, 헌법이 총기에 대한 행정적인 규제를 허가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럴 경우 어느 선까지 허가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총기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높은 범죄율과 매년 총기에 의해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를 지적한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총기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국가보다 미국의 개인이 휴대하고 있는 총기의 수가 더 많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할리우드 영화나 TV 쇼의 영향으로 인해, 미국인은 무기를 사용하여 분쟁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국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논쟁 때문에 수정헌법 제2조의 기원과 이 조항이 권리장전에 포함된 이유, 그리고 수많은 미국인들이 사냥이나 스포츠 등 범죄와 관련 없는 활동에 사용하기 위해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논쟁의 열기 속에 종종 무시되곤 한다. 양측의 논리가 지나칠 정도여서 엄청난 열기를 유발하지만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현대 총기의 선조는 머스켓 소총으로 1500년대 중반에 개발된 무기이다. 현대 소총들에 비해 머스켓 소총은 사용하기 힘든 불편한 무기였지만 전투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17세기 중반 영국 청교도혁명 당시 머스켓 소총이나 이보다 작은 권총 피스톨은 상류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영국민이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킬 당시 제임스 2세에 대한 불만 중 하나는 그가 영국에서 가톨릭 부활 정책을 펼칠 때 가톨릭 교도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반면, 신교도들은 무장해제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이 통과되었을 때 총기를 소지할 권리가 국민의 권리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블랙스톤 경, <영국 법률에 대한 논평>(1765)

다섯 번째이며 마지막인 부가 권리는... 상황과 정도에 따라 적절한 방어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법이 허락하는 방식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는 사회와 법의 제재가 억압적인 폭력을 제어하기에 충분하지 못할 경우, 저항과 자기 보존을 위한 자연권이며, 적절한 제재 조치를 통해 공적으로 허가된 권리이다.

이 구절은 가끔 논쟁에서 간과되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총기 소지가 영국에서는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귀족이나 상류층만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으며 일반 시민들은 무기를 소지할 권리가 없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국 식민지에서도 개인의 총기 소지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적대적인 원주민들의 위협 때문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해야 했으며 좀더 정착이 진행된 지역에서도 직업 군인들이 아닌 민병대에 방어를 의존해야 했다. 사지가 멀쩡한 남성들은 공동 방어에 참여해야 했으며, 공동체마다 무기 창고가 있어 필요할 때나 훈련 시에 무기를 나누어주도록 하고 상황이 종료되면 무기 창고에 다시 반납하게 했다. 주요 읍내에서 떨어져 있는 가택의 경우 정착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각 개인의 보호를 위해 적어도 남성 한 명당 총기 하나가 필요하게 되었다. 종종 여성들 또한 총기 사용법을 배우곤 했다.

식민지 시대와 독립 직후에 정부는 총기 소지를 면밀히 규제했다. 정부는 한편으로 현지 법을 통해 18세부터 45세 사이의 남성이 민병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총기 소지를 허락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 교도, 노예, 계약직 하인 등 일부 주민들에게는 총기 소지를 금지했다.

새롭게 탄생한 미국은 반정규군으로 구성된 식민지 군대와 주 민병대가 함께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치렀다. 이후 민병의 역할이 크게 과장되었고 조지 워싱턴이 정치적 목적으로 민병을 칭찬하긴 했지만, 사실 워싱턴에게 민병대는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면에서 눈엣가시와 같았다. 민병대는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규율 또한 거의 없었기에 믿을 만한 군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받은 훈련은 마을 잔디밭을 행군한 후에 파티를 벌이는 일이 고작이었다.


조지 워싱턴, 민병에 대해

민병에 의존하는 일은 부러진 막대기 위에서 쉬고 있는 것과 같다. 민병들은 편안한 가정에서 생활하던 남성들을 그냥 끌고 온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요란한 무기 소리에 익숙하지도 않고, 모든 종류의 군사 기술도 모르며, 자신감 또한 결여되어 있고, 정규 훈련을 받고 규율이 있으며 군사 지식도 풍부하고 무기를 훨씬 더 잘 다루는 군대를 만났을 때 소심해져 그림자만 봐도 도망칠 준비를 한다. 만약 내가 전체적으로 민병대가 유용한지 유해한지 선언해야 한다면 유해하다고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독립전쟁 당시 40만 명의 민병이 전투에 배치되었다는 사실 말고도 민병이 유용한 점은 있었다. 민병은 미국의 거의 모든 읍내와 마을에서 워싱턴 장군의 지휘하에 참여함으로써 독립혁명을 진정한 전국적인 규모의 위업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1790년대 민병은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 정부들은 그들의 무기 통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누가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가를 규정하는 법령은 독립전쟁 당시와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주 법률에 따르면 정부가 군사 목적으로 무기가 필요할 경우 개인 소유자들은 무기를 정부에 건네주어야 했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는 주 정부와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시민들만이 총기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맹세를 거절한 사람들은 무기를 주 정부에 내놓아야 했다. 많은 주에서는 가톨릭 교도, 유대 인, 노예, 계약직 하인, 재산이 없는 백인 등에게는 총기 소지를 금지했다. 더구나 주 정부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소유하고 있는 총기의 유형과 소유자를 조사해왔다. 한 학술 연구서에 따르면 1790년 당시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전체 성인 백인 남성의 약 14%가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 정부가 수정헌법 제2조를 채택할 당시 영국에서 독립한 13개 주 모두에서는 상당한 총기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정헌법 제2조의 전개 상황은 상비군에 대한 미국인의 불신이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이 불신은 영국에서 온 것으로 1776년 미국이 독립하기까지 20년 동안 영국 정부의 행동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에서 조지 3세에 대한 식민지 미국인들의 불만 사항을 나열하면서 “조지 3세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우리 입법자들의 동의 없이 상비군을 유지했다. 그는 군대를 민간 권력에서 독립시켜 민간 권력보다 우월하도록 만드는 데 힘썼다”고 적었다. 독립선언문에 기록된 다른 불만 사항들은 미국 땅에 있는 상비군의 존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의 무기와 탄약을 몰수하려는 영국의 시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787년 헌법 회의가 열렸을 때 대표들은 민병대에 반대되는 상비군의 장점에 대해 논쟁을 벌였지만 연방 의회에 육군과 해군을 양성하고 지원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 개인의 무기 소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헌법 비준에 대해 논의를 벌이는 동안 헌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헌법에 권리장전이 결여되어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민병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들이 무기를 지녀야 한다는 권리 또한 헌법에 들어 있지 않은 권리로 여겼다. 상비군에 대한 오래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고 연방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가 상비군의 힘을 받아 국민의 자유를 유린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많은 주에서는 헌법 비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가능한 한 빨리 권리장전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거기에 포함된 권리 중 하나가 민병 목적의 총기 소유였다.


버지니아 비준 회의(1788)

우리는 국민들이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무기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잘 정비된 민병이 자유로운 국가의 적절하고 자연스러우며 안전한 방어 수단임을 믿는다. 우리는 평화시에 상비군이 자유에 위험한 존재이므로 사회의 보호를 위해 상황이 허락하는 한 피해야 함을 믿는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군대가 민간 권력에 엄격하게 종속되어야 하며 민간 권력에 의해 지배되어야 함을 믿는다.


헌법이 승인된 후 처음 열린 의회에서 권리장전이 작성되었으며 주들은 1791년에 권리장전을 비준했다. 수정헌법 제2조에 대해서는 단어 선택에 대한 약간의 논쟁 이외에는 거의 논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권리장전 작성자들은 시민들이 주와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서 민병으로 복무할 헌법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민병 활동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에 합의했다. 당시 이 수정안의 중요성은 개인의 권리에 놓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정안은 연방주의, 즉 중앙 정부와 주 정부 사이 권력의 균형에 대한 논쟁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헌법이 연합헌장보다 더 강력한 중앙 정부를 규정하고 있지만 상비군에 힘입은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민병이 주와 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단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연방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부패한 중앙 정부에도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줄 것으로 보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1792년 의회는 통일민병법(Uniform Militia Act)을 통과시켰다. 통일민병법은 누가 민병대에 복무할 책임이 있는지 규정하고 복무 자격이 있는 모든 시민들에게 각자 무기와 탄약, 기타 장비를 마련하도록 요구했다. 민병 자격은 18세와 45세 사이 “자유롭고 건강한 백인 남성 시민 모두”였다.


통일민병법(1792)

민병에 등록된 모든 시민은 스스로 성능 좋은 머스켓 소총이나 화승총 1개, 총검과 벨트 하나, 부싯돌 여분 2개, 배낭 1개, 24개의 탄약통을 담을 수 있는 박스 달린 탄약통 주머니 1개를 준비해야 한다... 각 탄약통에는 적절한 양의 화약과 총탄이 들어 있어야 한다.

 여러 면에서 이 법률은 민병운동이 최고조에 다다랐음을 의미하고 있다. 몇 년 후에 민병의 무용성을 주장했던 조지 워싱턴의 의견이 정확했음이 드러났다. 비록 주 정부 민병이 인디언 부족과의 일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794년 위스키 반란(펜실베이니아 주 서부의 농민들이 위스키에 대한 세금에 반대하여 일으킨 폭동-옮긴이) 당시 상당한 힘을 과시하긴 했지만, 조지아 주와 버지니아 주에서 연방군과 전투를 벌일 뻔한 사례가 최소한 두 차례 이상 발생했다. 시민 민병의 명성은 1812년 미영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바람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1840년대에는 수정헌법 제2조와 1792년 통일민병법에 존재하고 있던 시민 민병에 대한 비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방 민병은 19세기 내내 소위 ‘소집’을 통해 계속 모이긴 했지만 역사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는 여성들 앞에서 뽐내며 걷다가 선술집으로 들어가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는 일에 불과했다.

1901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민병제 개혁을 요구하면서 “우리의 민병법은 구식이며 쓸모없다”고 선언했다. 연방 의회는 1903년에 민병법을 통과시키면서 미국 독립혁명 당시에 흔했던 민병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현대전에서는 현대 무기를 지닌 훈련된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법령은 1903년에 설립된 방위군과 정규군을 위한 것이었다. 방위군은 여러 가지 면에서 조직적이지 못했던 과거 영국 민병 제도의 유산이긴 했지만, 프로그램이 정규군이 정한 높은 기준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민병대에 비해 더욱 확고한 규율을 갖춘 잘 훈련된 조직이었다. 방위군 요원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무기를 지급받았으며 개인적으로 무기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수정헌법 제2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민병대의 목적으로 총기를 소장하고 휴대할 권리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조직적이지 못한 구식 민병을 소집한 주는 없었다. 더구나 민병 소집에 맞춰 스스로 무기를 지참할 필요성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역사학자 로버트 스피처가 지적했듯이 “수정헌법 제2조는 현대 미국인의 생활에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게 되었다.”

헌법 작성자들의 원래 의도 면에서 이는 맞을 수 있지만, 민병에 많은 변화가 있었듯이 개인의 총기 소유 문제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정헌법 제2조가 제정 당시 무엇을 의미했든 오늘날에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논쟁을 살펴보기 전에 대법원이 수정헌법 제2조와 그 의미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기타 국민의 권리 문제에 대해서는 결국 미국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 헌법 조항의 의미를 권위 있게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정헌법 제2조에 대해서 대법원은 침묵을 지켜왔다. 이 문제가 대법원에 상정된 경우는 몇 차례 되지 않았으며 대법원의 판결은 현대적인 논란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결정이었다.

미합중국 대 크룩생크 판결(1876)에서 대법원은 두 가지 원칙을 선언했다. 첫 번째 원칙은 수정헌법 제2조가 총기 규제에 대해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으며, 두 번째는 이 조항이 주 정부가 아니라 연방 정부에만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수정헌법 제2조가 총기 규제에 대해 어떤 한계를 규정하든 이는 주 정부에 적용되지 않으며, 주 정부는 총기 규제에 대해 무제한의 권한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판결이다.

10년 후 대법원은 프레서 대 일리노이 주 판결(1886)에서 준군사 조직이 주지사의 허가 없이 훈련을 하거나 행군하지 못하도록 하는 주 정부법에 손을 들어주었다. 다시 한번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2조가 연방 정부에만 적용됨을 지적했으며, 주 정부는 시민 개인의 무기 소유 및 사용에 대해 마음대로 규제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할 권리는 민병의 필요성에만 관련이 있었다. 대법원은 주 정부의 총기 규제에 대한 다른 사례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반복했다.

대법원에 상정된 사건 중 수정헌법 제2조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1934년 미합중국 대 밀러 판결이었다. 이 사건은 다양한 무기를 다른 주로 운송하는 일을 규제하는 1934년 국가총기법의 합법성에 관한 것이었다. 두 남성이 등록되지 않은 총신을 작게 자른 산탄통(강도 행위에 자주 사용되는 무기) 하나를 주 경계선 밖으로 운송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들은 수정헌법 제2조에 보장된 자신들의 권리를 국가총기법이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총기를 규제할 수 있는 의회의 권한뿐만 아니라 연방법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수정헌법 제2조는 민병이 무기를 지니도록 하는 원래의 의도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C. 맥레이놀즈 판사, 미합중국 대 밀러 사건(1934)

“길이가 18인치가 채 되지 않는 총신을 지닌 산탄총”의 소지 및 사용이 규율 있는 민병의 유지 및 효율성과 합리적인 관련이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수정헌법 제2조가 이러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재판상 공지의 사실을 따질 때, 확실하게 이 무기가 일반적인 군사 장비이거나 이 무기의 사용이 공동 방위에 기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법원의 판결 어느 것도 민병 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개인의 총기 휴대가 불법인지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다. 사실 1994년 한 소송사건에서 대법원은 “이 나라에는 개인이 합법적으로 총기를 휴대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러한 오래된 전통이 수정헌법 제2조나 헌법의 다른 조항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논쟁은, “미국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민병의 상황 밖에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최근에 이러한 논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전 입법부는 수정헌법 제2조가 명시적으로 개인의 무기 휴대 권리를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밀러 사건 당시의 대법원 판결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에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장관은 총기 통제 관련 사건에 관한 정부 브리핑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수정헌법 제2조가 사실상 총기를 휴대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시사했다. 이러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이 미래의 수정헌법 제2조 관련 사건에서 대법원이 내릴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비록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할 권리는 민병과 관련된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서부 개척지에서의 자기 보호, 사냥, 사격대회와 같은 스포츠 등 다른 목적으로도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했다. 1800년대 미국 서부의 많은 지역은 사실상 무법 지대였고, 그곳엔 소도적 떼들과 목장 거주자들이나 여행자들을 노린 노상강도들이 횡행했다. 미국의 연방 보안관과 현지 보안관들이 보호하긴 했지만, 많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스스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19세기에는 개척지가 서쪽으로 더욱더 확산되어 결국에는 없어지게 되었지만 총기 소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권리’가 되었으며 말이나 재산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주 정부가 총기 소유를 규제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근거가 있으면(가령 중죄를 진 사람들은 교도소에서 석방된 후에도 총기를 소지할 수 없다) 총기 소유를 금지하도록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1960년에 법학 교수 스튜어트 헤이즈가 처음으로 개인의 총기 소유는 수정헌법 제2조에 의해 보호받는 특권이며 민병에만 적용하려는 과거 법원의 판결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헤이즈는 수정헌법 제2조가 민병 의무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선적으로 자기 방어를 위해서라도 총기 소지에 관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수정헌법 제2조가 개인의 ‘혁명의 권리’를 규정하며 무장한 시민이 부당한 방식으로 행동한 정부에 대해 무장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본질적으로 헤이즈의 주장은 수정헌법 제2조의 실제 목적은 미국 독립혁명 당시 애국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제정치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미래 세대에게 주기 위함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헤이즈가 논문을 발표한 지 3년 후에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리 하비 오스왈드에 의해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오스왈드는 전국총기협회(NRA)의 공식 간행물인 《아메리칸 라이플맨(American Rifleman)》에 있는 광고를 보고 우편 주문을 통해 대통령을 살해하는 데 사용한 라이플 소총을 구입했다. 이틀 후에 오스왈드는 잭 루비에 의해 저격당했는데, 잭 루비는 댈러스 경찰서에 권총을 숨기고 들어갔었다.

헤이즈의 논문과 케네디 암살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정헌법 제2조의 본래 의미와 현대적인 의미에 대해 학계에서 논쟁이 일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강력한 총기 통제 법안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정치 단체 사이에도 헌법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논쟁은 총기 소유의 규제를 원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총기를 보유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를 지지하는 총기 옹호자들과 헌법에 총기를 소지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열기를 더하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NRA와 동맹자들이 수정헌법 제2조에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절대적인 권리이고, 기본적인 사항 이외의 어떠한 통제도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며, 결국 권리를 완전히 박탈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시민들이 범죄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가 필요하다는 논리와 사냥이 미국의 전통이라는 논리를 앞세운 것이었다. 좀더 과격한 총기 보유 옹호자들은, 총기 규제 법률의 배후 목적이 시민들을 무장 해제시켜 독재 정부의 완벽한 통제로 국민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현대식 ‘민병’을 제창하면서 수정헌법 제2조가 자신들의 활동을 완벽하게 보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매년 수천 명이 총기로 사망하고 있으며 이들 다수가 가정 내 분쟁이나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들은 또한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 주 리틀톤에 있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 총기 4종을 들고 들어간 10대 소년 2명을 예로 들어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무기를 얻기 쉽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소년들은 순식간에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사살했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했다. 총기 규제 반대자들을 위한 헌법상의 권리는 없다. 사실 총기 규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시각을 지니고 있으며 개인적인 총기 소유를 완전히 불법으로 하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누가 총기를 구입할 수 있는지 통제하고, 총기와 소유자를 등록하도록 하며, 엽총을 구입하는 데 엄격한 조건을 만들고, 시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무기의 종류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무기 종류의 제한에 관한 의견은 경찰들이 옹호하고 있는데, 경찰들은 범죄자들이 종종 자신들보다 성능이 더 좋고 더욱 치명적인 무기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정한 사냥꾼이라면 반자동 기관총이 아니라 라이플 소총이나 엽총을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는 여러 가지 사안이 있으며 양측의 주장을 열거하는 것이 논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 논쟁의 강렬함과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 정치적인 분규 등을 문자로 모두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주요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개인주의   총기 소유 옹호자들은 미국이 오랫동안 주 정부의 권한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받는 민주주의 정부와 사회를 즐겁게 누려왔다고 주장한다. 한 시민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자격이 있고, 다수와 다른 방식으로 신을 숭배할 권리가 있으며, 범죄 혐의를 받았을 때도 일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시민 개인은 총기를 소유할 권리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수정헌법 제2조가 권리장전의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건국자 중 한 명인 패트릭 헨리는 “큰 목적은 모든 사람이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능력이 되는 모든 사람은 총기 하나씩은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미국에서 헌법적인 권리가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조차도 법원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더구나 총기 통제 지지자들은 수정헌법 제2조가 채택되기 이전에도 무제한의 총기 소유가 아니라 철저한 총기 소유 통제가 규범이었으며, 법원들은 계속해서 무기 소유권이 수정헌법 제2조 자체의 표현에 의해 제한된다고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기 소지의 권리는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민병대를 함께 구성할 때에만 해당되는 전 국민의 권리라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패트릭 헨리의 인용 부분도 사실은 민병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패트릭 헨리, 버지니아 비준 회의에서(1788)

권력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연방 의회뿐만 아니라 주 정부에서도 민병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켜 우리의 민병이 두 개의 무기를 지니고 두 벌의 군복 등을 입게 되어 이중으로 무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큰 목적은 모든 사람이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두 종의 무기를 구입할 돈이 있습니까? 능력이 되는 모든 사람은 총기 하나씩은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경험에서 배웠듯이, 무기를 보유하는 일은 필요하고 우리 의회가 몇 년 동안 연속적인 법령을 통해 민병들이 모두 완벽하게 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지만, 그렇게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국민’의 의미   수정헌법 제2조의 ‘국민’은 수정헌법 제1조의 “국민이 평화롭게 집회할 권리”라는 표현에서처럼 다른 곳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국민’은 수정헌법 제4조에 명시된 자신의 가택과 신체의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도 지니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 주장에 대해 법원들은 계속적으로 수정헌법 제2조는 다른 조항과 다르며 ‘국민’이라는 표현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수정조항이 채택되었을 당시에도 주 법률은 총기 소유자를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18세부터 45세 사이의 일부 ‘국민’으로 제한했다.


자기방어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해왔으며, 서부 개척지에서 총기는 인디언, 도둑, 약탈자, 약탈 동물 등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한 필수 도구였다. 현대인들은 강도, 강간, 폭행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개척지를 만들어가던 세대에게 존재하던 위험만큼이나 현대의 도시 생활에서는 범죄가 큰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 자신을 방어할 권리는 독립선언문에서 밝힌 생명, 자유, 행복이라는 자연권의 일부이다. 총기 소유는 이러한 자연권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이 점은 영국법과 미국법에서 각 개인은 육체적인 피해나 재산에 대한 절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음을 오랫동안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2조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사살하기 위해 총기를 사용했다면 이는 헌법상의 권리 문제가 아니라 형법상의 문제이다. 수정헌법 제2조는 이런 전통적인 권리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려는 의도가 결코 없었다. 총기 규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범죄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거부하고 싶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미국 법률연구소, <모범 형법안 및 논평(Model Penal Code and Commentaries)>(1985)

각 개인은 분명하게 알려진 중죄를 행하려는 의도를 지닌 개인이나 다수에 대해 자신의 신체, 거주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힘으로 물리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그는 도망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험에서 벗어날 때까지 상대방을 추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양자 사이에 마찰이 생겨 그가 상대방을 살해하게 되면 그 살해 행위는 정당하다. 이와 같은 경우 자기방어 권리는 자연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사회의 법에 의해 폐기되지 않으며 폐기될 수도 없다.


혁명의 권리   미국은 왕권에 대한 혁명으로 태어난 국가이며, 미국인은 어릴 때부터 “자유는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의 대가”라고 배우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2조가 혁명의 권리를 지지한다는 주장이 흡인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백여 년 전에 액톤 경은 “권력은 타락하기 쉽고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고 선언했으며, 헌법과 권리장전을 작성했던 사람들은 비록 액톤 경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정부는, 심지어 민주주의 정부라 해도, 권력을 축적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력을 축적하는 동안 그 권력을 축소시키려는 시도를 물리치려 한다. 시민이 무장을 하지 않으면 정부의 권력에 부딪쳤을 때 자신들의 자유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 무장을 해야 저항할 수 있다. 1776년에 식민지 미국에 살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하버드 법대 대학원장이자 주목받는 학자였던 로스코 파운드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주장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로스코 파운드, <헌법상 자유 보장의 전개 상황(The Development of Constitutional Guarantees of Liberty)>(1957)

시민이 정부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는 용인될 수 없다... 정부의 압제에 저항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무기를 소지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권리가 오늘날 산업도시사회에서는 깡패 집단이 권리장전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법률 권한 밖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독립혁명이 정부에 대한 무장 봉기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한 정부가 영국 정부에 대해 벌인 전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독립혁명은 주 정부의 도움으로 대륙회의(미국 13개 식민지의 대표자 회의-옮긴이)에 의해 조직되고 관리되었지, 무기를 지닌 개인이나 돌아다니는 민병대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미국인들 대부분은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투표, 정치적 이익 단체, 자유로운 언론, 법원 등 민주주의의 공인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전제주의 정부여서 무장된 세력으로 그에 저항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일부 단체들에 대해, 미국인들은 거의 공감하지 않고 있다. 사실 헌법이 제정된 후 미국의 역사에서 시민들이 대규모로 저항한 사례는 남북전쟁뿐이었으며 남부가 혁명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할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헌법은 연방 정부에 폭동을 진압할 권리와 권력을 주고 있다.

널리 퍼져 있는 총기 소유 옹호자들은 연방 입법자들이나 주 입법자들이 더욱 강력하게 총기 규제를 하지 못하게 하고, 미국 국민들에게 개인적인 총기 소유는 사실 헌법상의 권리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개인주의와 자기방어 등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NRA가 앞장서고 있는 총기 소유 옹호자들은 무기 소지 권리를 알리는 편지와 팸플릿을 통해 신문사와 시민들, 의회 임원 및 주 정부 입법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NRA 회원 뉴스레터

정부는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를 빼앗으려 노력하고 있다... 총기를 금지하는 사람들은 그저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들은 당신이 총기를 소유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모든 무기를 정부에 건네주도록 강요받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NRA가 수정헌법 제2조의 자유를 회복하는 데 실패한다면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부당한 수색 및 체포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NRA나 미국 총기소유자협회 등의 단체들은 대중에게 수정헌법 제2조가 개인의 무기 소지 권리를 보호한다는 점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수필 경연대회를 개최하거나 편지 쓰기 캠페인을 벌이거나, 연방 의회나 주 입법자들이 통과시킬 수 있는 총기 규제 법안에 대한 법정 투쟁을 준비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사이에 연방 의회는 총기 규제 관련 법안 3개를 통과시켰고 이들 중 2개는 대법원에 의해 무산되었지만 수정헌법 제2조가 근거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1989년 1월, AK-47 소총을 들고 다니던 떠돌이가 캘리포니아 주 스톡턴에 있는 한 학교 운동장 울타리 밖에 서 있다가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아이들 5명이 사망했으며 29명은 부상을 입었다. 이에 대해 미국 의회는 1990년에 학교 구역 경계선 안쪽 구역에서 총기를 소지하면 연방법에 위배된다는 내용의 ‘학교 지역 총기 휴대 금지법’을 제정했다.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서는 12학년 학생 1명이 38구경 소총과 총탄 5발을 들고 등교했다. 그는 새로운 총기 휴대 금지법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연방 의회가 월권했다는 근거로 이 법안에 대해 항소를 했다.

5 대 4로 대법원은 이 학생의 손을 들어주었다. 최근 대법원은 연방 정부보다 주 정부에 더 많은 권한이 있다는 새로운 연방주의 개념을 아주 잘 받아들이고 있다. 미합중국 대 로페즈 판결(1995)에서 대법원은 연방 의회가 학교 지역 총기 휴대 금지법에서 권한을 남용했다고 선언했다. 이번 판결에서 수정헌법 제2조가 어떤 역할을 했다는 언급은 없었다. 오히려 대법원의 판사 5명은 의회의 권한이 본질적으로 지방법으로 규제되고 처벌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브레이어 판사, 미합중국 대 로페즈 사건(1995)

연방 의회는 ‘학교 지역의 폭력적인 범죄’가 ‘교육의 질’에 영향을 미쳐 상당하게 (혹은 실제적으로) 주州간 교역과 국가간 교역에 영향을 미치기에 이것이 연방 규제의 범위에 해당된다고 파악한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미국 전체 학교에 널리 퍼져 있는 폭력은 학교 교육의 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연방 의회는 틀림없이 총기와 학습이 서로 배타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의회는 교사가 가르칠 수 없고 학생이 학습할 수 없는 실제적인 교육적 문제를 발견하고, 학교 인근의 총기 유무가 그 문제의 규모와 범위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판결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 때에 저격자는 레이건 대통령의 대변인인 제임스 브래디에게 뇌가 부분적으로 손상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브래디와 그의 부인 사라는 연방 총기 규제법 제정을 열렬하게 지지했고, 큰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3년 자신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브래디 권총 폭력 예방법’은 권총을 구입할 경우 5일 대기 시간을 갖도록 했으며, 총기 구입 예정자가 경찰이 수배하고 있는 중범죄자가 아닌지, 불법 체류자가 아닌지, 혹은 정신이상자가 아닌지 배경 조사를 하도록 요구했다. 이 법은 또한 배경 조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컴퓨터에 입력된 범죄 기록을 업그레이드하도록 주 정부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NRA를 비롯하여 이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즉시 법원에서 브래디 법에 대해 도전했다. 그들은 수정헌법 제2조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지방 법 집행 관리들이 배경 조사를 해야 한다는 법의 규정에 초점을 두고 이것이 주 정부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법원은 다시 한번 연방주의 원칙을 상기시키며 프린츠 대 미합중국 판결(1997)에서 근소한 차이로 NRA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판결에서도 수정헌법 제2조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이 판결에 찬성했든 반대했든 상관없이 대법원 판사들은 주 정부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 한 연방 의회가 소총 규제를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헌법상의 근거는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1994년, 연방 의회는 폭력 범죄를 통제하기 위한 거대한 법안의 일환으로 1994년 공격무기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전국 경찰서장들이 폭력 범죄를 통제하려고 할 때 범죄자들이 종종 경찰관들보다 성능이 더 뛰어나고 더욱 강력한 무기를 사용한다며, 연방 의회에 조치를 취해달라고 촉구했다. 이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두 가지 사건은 캘리포니아 주 스톡턴에서 발생한 학교 운동장 총기 난사 사건과 텍사스 킬린에서 발생한 카페테리아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킬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23명이 사망했고 23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으며, 같은 종류의 참사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다. NRA가 몇 번 연방 의회에서 이 법안을 폐기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총기 규제를 선호하는 의회 지도자들과 클린턴 행정부의 지지에 의해 이 조치는 결국 통과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법안은 연방주의 문제에 어긋나지 않도록 명백하게 작성되었기에 실제적인 법적 소송은 발생하지 않았다.

콜로라도 주 리틀턴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사건 때문에 불만이 많은 두 학생이 총기 4종을 쉽게 얻게 되었다는 점에 대한 전국적인 충격은 연방 의회에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상원은 즉시 총기 구입 절차를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 법안은 총기 규제 반대 단체들의 성공적인 로비로 결국 무산되었다. 이는 총기 규제 반대 단체들이 여론과는 상관없이 연방 의회에 영향을 미치는 등, 미국에서 총기 관련 로비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미국인 다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총기 규제 논쟁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무기의 수가 수백만 개에 이르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총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대부분은 총기 소유 자격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무기 종류에 대해 엄격한 규제가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법원에서 해석 및 한계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다른 국민의 권리와는 달리 총기 소지의 권리는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고, 총기 소유는 헌법으로 보호받는 권리이기에 법률의 통제 범위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총기 규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지금까지 대법원은 총기 규제 노력 두 가지를 무산시켰지만 수정헌법 제2조를 근거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2조에 기초한 총기 규제 조치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법원의 목소리는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에 대한 논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 참고 서적 |


* Saul Cornell, ed., Whose Right to Bear Arms Did the Second Amendment Protect? (Boston: Bedford/St. Martin?, 2000).

* Robert Cottrell, ed., Gun Control and the Constitution (New York: Garland Publishing Co., 1994).

* Wilbert Edel, Gun Control: Threat to Liberty or Defense Against Anarchy? (Westport: Praeger, 1995).

* Robert J. Spitzer, The Right to Bear Arms: Rights and Liberties under the Law (Santa Barbara: ABC-CLIO,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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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6  프라이버시



부당한 수색, 체포, 압수에 대하여 신체, 가택, 서류 및 동산의 안전을 보장받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 수정헌법 제4조


이 헌법에 특정한 권리들이 열거되어 있다는 이유로 국민이 가진 그밖의 권리들을 부인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  - 수정헌법 제9조


어떠한 주 정부도 미국 국민의 특권 또는 면책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다.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에 대해서도 생명, 자유,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  - 수정헌법 제14조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국민의 권리도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대부분의 경우 국민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하지만 말하는 방법과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 등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그 결과로 그 권리의 특성 또한 변하게 된다. 사회적레???변화와 기술적인 발전은 우리가 특정 권리를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그 권리를 규정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이러한 권리의 예로 가장 적절한 것이 프라이버시의 권리이다. 이 권리는 헌법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법원이나 국민에 의해 헌법적인 위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윌리엄 피트 경과 채텀 백작, 영국인이 자신이 집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에 대해(1763)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오두막 안에서 왕의 권력에 반항할 수 있다. 오두막이 허름하여 지붕이 흔들리고 바람이 집을 뚫고 지나가고 폭풍우가 집안에 몰아칠 수 있지만 영국 국왕은 이 오두막에 들어올 수 없다. 왕이 병력을 다 동원한다 해도 이 폐허가 되어가는 오두막의 문지방을 감히 넘지 못할 것이다.


피트 경의 유명한 글귀는 최근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프라이버시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권리를 요약하고 있다. 즉 정부의 권력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며 자신의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권리 말이다. 미국에서는 수정헌법 제4조가 국민들이 자신의 집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또한 군인들이 사유지에서 숙영할 수 없다는 수정헌법 제3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개인적 행동이나 사업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일이 없도록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의미의 프라이버시 개념은 산업사회에서 발전한 것이다. 남들에게 간섭받지 않고 혼자서 자기만의 공간을 지닌다는 의미의 프라이버시는 과거 18세기까지 부유한 사람들이나 귀족에게만 통용되던 개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고 허름한 주택에서 살았고 가족 전체가 한 방에서 잠을 자는 예도 있었다. 실제로 법적 용어인 ‘프라이버시’는 원래 명예훼손의 한 형태로, 이름이나 초상화를 당사자의 허락 없이 사용한 경우를 의미했다.

하지만 서구 사회가 부유해지고 중산층이 가족들 각자가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큰 집을 구하게 되면서 프라이버시의 의미 또한 변하게 되었다. 이제 프라이버시는 개인과 관련한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공적인 생활 범위 밖에서 자신이 하는 행동은 남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가정하게 되었다. 정부나 언론, 그리고 다른 누구도 사생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프라이버시는 개인성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단체나 사회보다는 개인의 권리이다. “프라이버시가 없다면 누구도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본질적으로 소중한 존재인 자아를 개발할 수 없다”고 정치학자 로다 하워드는 적고 있다. 그 반대 또한 사실이다. 즉 개인성이 없다면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는 인식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권리가 그렇듯이 프라이버시도 민주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인간은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상호 교감할 필요도 있다. 프라이버시는 고립이나 추방이 아니라 혼자 혹은 자신이 선택한 소수의 몇 명과 함께 있기로 스스로 선택한 욕망이다. 예를 들어 감옥의 독방에 갇혀 있는 것은 프라이버시가 아니지만 혼자 혹은 친구와 같이 산을 등반하는 것은 프라이버시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혼자 있으면 정부나 시장의 압력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자유와 프라이버시의 관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전체주의에 대한 소설 《1984년》에서 국민들의 프라이버시를 박탈하고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감시하는 정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프라이버시가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국 건국자들이 프라이버시의 개념을 알고 또 가치 있게 여긴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미국 독립혁명이 끝나고 몇 년 뒤 매사추세츠 주 정부는 부가세를 제정해 주택 보유자들에게 지난해에 집에서 얼마나 많은 럼주를 마셨는지에 대해 세금 징수자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주민들은 즉각 반발했다. 주민들은 한 사람의 집은 성城이나 다름없으며 자신의 집에서 무엇을 하든지 정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 주 부가세 징수 항의 팸플릿(1754)

영국 헌법에는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사항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이라고 불리며, 범죄 행위와 관련한 경우가 아닌 이상 집주인의 동의 없이는 경찰도 그 집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법이 금지하고 있다.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은 토머스 제퍼슨과 미국 건국자들의 정치 철학뿐만 아니라 존 로크의 정치 철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연방주의자 논문집(Federalist Papers)》 10호와 51호는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을 찬미했다. 헌법에 명시된 자유는 정부가 부여하는 자유였다. 수정헌법 제4조는 분명하게 적절한 법적 절차 없이 정부가 개인의 주택을 침범할 수 없다고 명시하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있다. 프라이버시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프라이버시는 분명하게 명시된 권리라기보다는 함축적인 의미로 보호되는 권리 중 하나이며, 이 점에 대해 오해가 있을 수 있었기에 매디슨은 수정헌법 제9조에서 특정한 권리들이 열거되었다고 해서 언급되지 않은 그밖의 권리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고 지적했다.



19세기 중반까지 보통 미국인에게 프라이버시가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다면 대답은 분명히 가택을 침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 수백만 명의 이주자들을 도시로 흡수하자 더욱 붐비고 혼잡한 생활환경이 형성되었다. 도시에서 공간은 귀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변화하면서 프라이버시의 개념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집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전화를 통해 다른 사람의 집에 간 것과 다르지 않게 됨에 따라 기술도 프라이버시를 위협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대화를 나누려면 다른 사람의 집에 직접 가야만 했는데 이제는 전화만 걸면 됐다. 값싼 카메라나 창유리 등 다른 기술적인 발명품들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실제로 들여다보며 그들의 사생활을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프라이버시에 가장 큰 위협을 가한 것은 일간 신문의 부흥이었다. 일간 신문의 편집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새로운 대중 매체는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의 행동을 공개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적인 약점을 들추어내면서 그들의 명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런 상황 때문에 프라이버시에 대한 법률은 우선 명성과 관련된 부분을 다루게 되었다. 프라이버시 보호법은 기자들이 모욕감을 주려는 목적으로 한 개인의 사생활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이용되었다.

명성에 위협이 되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자, 보스턴 출신의 젊은 변호사 새뮤얼 D. 워렌과 루이스 D. 브랜다이스는 1890년 오래된 프라이버시 침해 금지 조항이 산업혁명이 양성한 새로운 형태의 프라이버시 침해 사례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법률학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 두 변호사의 제안에 대해 논쟁을 벌였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새로운 기술이 생활에 가져온 차이점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고, 그것들로 인해 사생활이 얼마나 침해당할 수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1920년대 초 연방 대법원은 헌법상의 프라이버시 보호 권리를 구체화하기 시작했으며 관련된 사안들이 지금의 상황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당시 대법원의 판결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현재의 헌법적인 정의를 위한 초석을 마련해주었다. 대법원이 합법적인 영장 없이 개인의 서류를 압수할 수 없다고 정부 요원을 비난한 사례가 있었다. 윌리엄 R. 데이 판사는 경찰이 시민에 대해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자신의 주택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를 선언한 수정헌법 제4조가 헌법에서 삭제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수정헌법 제4조뿐만 아니라 수정헌법 제14조에 명시된 ‘정당한 법의 절차’ 또한 프라이버시에 대한 법적인 토대를 제공해준다. 대법원의 해석에 따르면 ‘정당한 절차’는 우선적으로 범죄 사례와 관련한 절차상의 권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유와 관련한 ‘실체법상의’ 권리 또한 포함한다. 이 때문에 외국어 교육을 금지하는 주 정부법을 철폐하도록 한 사건에서 제임스 C. 맥레이놀즈 판사는 제14조 개인의 자유는 “육체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개인이 계약을 맺고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양심에 따라 신을 섬기며, 자유로운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통법에서 오랫동안 인정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특권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반적인 권리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맥레이놀즈가 열거한 사안들은 결혼, 양육, 양심 등 근본적으로 사적인 문제들이다.

좀더 직접적인 판결은 전화기라는 새로운 기술과 연결된 소송사건에서 나왔다. 경찰이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들의 통화 내용을 도청했던 것이다. 피고인들은 도청이 영장 없이는 수색할 수 없다는 수정헌법 제4조에 명시된 권리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판사의 과반수가, 도청 장치가 건물 밖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수색이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35년 전 프라이버시에 대해 중요한 논문을 저술한 바 있는 루이스 D. 브랜다이스 판사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 도청에 대한 특정한 견해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이스 D. 브랜다이스 판사, 옴스테드 대 미합중국 사건(1928)

전화선이 도청될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과 전화를 받는 사람 모두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합니다. 주제가 무엇이든 둘 사이의 모든 대화가 도청되기 때문입니다.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국민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보장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적 특성, 인간의 감성과 지성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인생의 고통, 기쁨, 만족의 일부만을 물질적인 것들로 추구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인들의 믿음, 사고, 감정, 기분 등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 권리는 가장 포괄적인 권리이면서 문명인에게 가장 소중한 권리입니다.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면 이는 수정헌법 제4조에 위배되는 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브랜다이스는 수정헌법 제4조를 작성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프라이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도청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화기가 발명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도청에 대해 생각했겠는가? 그를 비롯한 법 해석자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헌법 작성자들의 의도였다. 즉, 정부는 국민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침해의 ‘방법’이 아니라 침해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브랜다이스의 견해가 힘을 얻게 되었고, 1960년대에 대법원은 도청이 헌법에서 보장된 프라이버시 보호권을 침해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포터 스튜어트 판사는 수정헌법 제4조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보호한다고 설명했다. 가정 등의 장소에서 합법적으로 프라이버시를 기대한다면 헌법에서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1960년대 중반 기술의 변화 때문에 프라이버시와 관련한 주요 소송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현대의 프라이버시 관련 논쟁의 기초가 되었다. 19세기 도덕주의자들은 코네티컷 주 정부 법률에 피임 도구나 이러한 도구에 대한 정보 유포를 금지하는 법 조항을 만들도록 했다. 비록 1960년대까지 대부분 사람들이 이러한 법률을 무시하긴 했지만 그들은 주로 서적을 통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가족계획 담당 의사들은 사회의 보수층이 이러한 법령에 대해 언급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피임 반대 단체가 산아제한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피임 도구를 배포한 미국 가족계획연합이 운영하는 진료소를 기소하도록 코네티컷 주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1930년대 루스벨트 행정부가 합법적인 절차를 원하지 않는 입법부를 무너뜨리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대법원을 비난하면서 야기된 법정의 위기로 인해 실제적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사용하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65년이 될 때까지 수정헌법 제14조에 명시된 ‘정당한 법의 절차’ 사용을 주저했다. 더구나 수정헌법 제4조는 이 사건에 적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부가 처벌하려는 대상이 개인의 집이 아닌 의료 기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주 사건(1965)에서 대법원은 사람들이 가족계획과 관련한 매우 사적인 결정을 하는 데 정부가 관여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분명히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가족계획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개인이 결정할 일이지 정부가 참견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주 법률을 누르며 피임 정보를 배포한 진료소의 권리를 옹호했던 더글러스 판사는, 프라이버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더라도 헌법에 의해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 세대 이전에 브랜다이스 판사가 선언했던 것과 일치한다. 더글러스 판사는 “권리장전에서 보장하고 있는 특정한 권리들은 반음영半陰影 지역에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권리들은 권리장전에 명시된 권리에 의해 생명력과 실체를 지니게 되면서 형성된 것들이다... 보장받은 다양한 권리들이 프라이버시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창적이긴 하지만 더글러스의 의견은 합법적인 절차라는 헌법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몇몇 다른 사례를 통해 대법원은 실제로 수정헌법 제14조 부분에 담겨진 자유 관련 개념을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려는 헌법적인 기반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피임에 대한 정보 및 그 정보에 대한 사용 여부는 개인적인 문제라는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주 사건의 판결에 이어 낙태에 대한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소송사건에서 대법원은 프라이버시 권리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로우 대 웨이드 사건(1973)에서 대법원은 150여 년 동안 논쟁의 여지가 가장 많았던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법원이 헌법을 곡해했다고 주장했고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법원의 낙태 옹호적인 입장이 수정헌법 제14조에 명시된 자유 문제뿐만 아니라 프라이버시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다. 잇따른 사건에서 대법원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여전히 근본적으로 주장이 엇갈렸지만, 낙태가 허용되어야 하는지 확신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오코너 판사의 견해에는 동의할 것이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 가족계획연맹 펜실베이니아 주 남동부 지부 대 케이시 사건(1992)

정부가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 개인적 자유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헌법이 약속한 사항입니다. 자유의 중심에는 한 개인이 존재, 의미, 우주, 삶의 신비 등을 정의할 권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정부의 강요에 의해 형성된다면 이러한 믿음을 개인적인 특성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하고 여기서 기술이 다시 한번 어떻게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가를 보여주는 최근의 예는, 의료 행위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려는 개인의 권리를 포함한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문제이다. 1990년에 대법원은 듣도 보도 못한 사례를 접하게 되었는데, 바로 죽을 권리에 대한 주장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문제로 지난 30년 동안 괄목할 만한 의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심한 사고나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의학 기술에는 한계도 있고 부정적인 효과도 있다.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살아 있게 된’ 사람들은 인생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즐기지 못할 수도 있으며 의료 기계에 묶여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수도 있다.

윌리엄 H.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수정헌법 제14조에 개인의 자율권이 보장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헌법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련의 판결들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 의료 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원칙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몇 년 내에 새로운 프라이버시의 형태인 죽을 권리가 미국의 50개 주 전체의 법령에 포함되었다. 미국 의회는 치료 거부와 관련하여 환자의 요구를 따르는 병원에 연방 자금을 지원하는 환자의 권리 법안을 통과시켰다.

윌리엄 H. 렌퀘스트 대법원장, 워싱턴 주 대 글럭스버그 사건(1997)

적절한 법적 절차 조항은 공평한 절차 이상을 보장하며, 이 조항이 보호하는 ‘자유’는 육체적 제약의 부재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권리장전에 의해 보호되는 특정 자유뿐만 아니라 적절한 법적 절차 조항에 의해 특히 보호되고 있는 ‘자유’에는 결혼할 권리, 아이를 가질 권리, 자식의 교육과 양육을 지도할 권리, 결혼 생활의 프라이버시를 지닐 권리, 피임할 권리, 신체 보전의 권리, 낙태의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적절한 법적 절차 조항이 원하지 않는 의료 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전통적인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이 새로운 프라이버시 문제의 범위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중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아픈 환자들이 원한다면 치료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한편, 일부 단체들은 개인적 자율권의 개념이 의사의 도움을 받은 자살 행위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은 개인의 소유이며 삶을 선택하든 죽음을 선택하든 자신의 생명에 대해 결정 내리는 일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으며 현재 주요한 정책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프라이버시 보호의 형태인 개인적 자율권이 하나의 권리임에는 동의하고 있다.



새뮤얼 D. 워렌과 루이스 D. 브랜다이스, ‘프라이버시 권리’(1890)

즉석 사진과 신문 산업은 사생활과 가정생활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침범했다. 수많은 기계 장치들이 “벽장 안에서 숨죽여 말했던 것들이 지붕 위에서 널리 공표될 것이다”라는 예상이 실현되도록 위협하고 있다.

브랜다이스 판사는 이전에 작성한 논문뿐만 아니라 도청 사건에 대한 의견에서 기술을 통해 정부가 국민의 전화 통화,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를 도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집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서도 집안에 있는 서류나 문서를 검토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브랜다이스는 정부가 이러한 기술을 이용할까봐 걱정했지만, 현대인들은 프라이버시 위협이 정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가해질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는 프라이버시 권리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룬 거의 대부분의 권리는 정부로부터 개인을 보호한다는 근원적이며 지속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발언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거나 발언자를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는 권리이다. 종교의 자유는 정부가 국교를 정하거나 다른 사람과 다른 신앙을 지닌 교인들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제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권리이다. 언론의 자유는 정부의 검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며, 피고인의 권리는 정부가 범죄 심판에 있어 공정한 절차를 밟도록 요구하는 권리이다. 헌법이나 권리장전은 정부가 아닌 다른 요소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미국 의회는 정부가 아닌 다른 요인이 유색 인종의 자유를 위협하는 몇 가지 사례에 대해 대처해왔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소위 ‘정보화 시대’의 프라이버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제는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이 국민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험회사를 통해 건강보험을 든다. 의사들은 보험회사에 의료 서비스 비용을 청구하기 위해서 병의 특성과 진전 상황, 치료 방법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러한 정보는 컴퓨터에 입력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한 개인의 건강 기록으로 축적된다.

일부 사람들이 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험회사는 병원에서 사기를 치지는 않았는지, 청구된 의료 서비스가 실제로 시행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새로운 의사가 환자를 떠맡게 되면 그는 환자의 과거 의료 기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밖에 누가 개인의 의료 기록에 접근해야 하는가? 고객이 될 예정인 사람의 정보를 찾기 위해 보험회사가 의료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가?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고 의학 연구진이 이 의료 기록에 접근해도 되는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가 일단 구축되면 이에 대해 완벽한 보완을 유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고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신용카드 업체와 같은 많은 기업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개인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팔 거나 배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의료 기록이나 금융 정보는 누구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가? 개인일까, 아니면 그 개인이 사업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회사일까?

우리는 이제 인간 게놈 지도 및 DNA와 같은 기술 발전 덕택에 개인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기에 들어와 있다. DNA 검사가 범죄자의 유죄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나 혐의를 받게 된 무고한 사람들의 무죄를 밝혀주는 데 도움을 주면서 범죄 수사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한 개인의 DNA에는 각 개인이 특정한 질병에 걸릴 가능성과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표시가 있다고 믿고 있다. 누가 이러한 정보에 접근해야 하는가? 정보 접근 여부에 대한 결정이 특정한 유전자 서열에 나타나는 성향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하는가? 누가 한 사람의 몸 정보에 대한 소유권을 지니고 있는가? 이 또한 프라이버시가 아닌가? 한편으로 보면 현재 프라이버시 영역의 주요 침해자는 정부가 아니라 유전공학을 연구하는 사설 기업들이다.

개인용 컴퓨터 사용과 인터넷 접속은 이제 전화와 텔레비전만큼 상용화되었다. 인터넷은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공개 토론장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겠지만, 컴퓨터 사용자는 끝없이 원하지 않는 이메일 메시지를 받게 되며, 서버 홈페이지에 있는 광고의 공격 또한 받게 된다. 해커들은 산업용 컴퓨터뿐만 아니라 개인용 컴퓨터에도 침입한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개인과 기업의 컴퓨터를 망가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금전적인 피해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다. 컴퓨터를 특정한 사람에게 사적인 메시지를 작성해서 보낼 수 있는 개인적인 도구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컴퓨터 스크린에 어떤 정보나 메시지, 광고를 띄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컴퓨터 소유자의 권한이 아닌가?

오늘날 미국인들과 다른 산업 세계 사람들은 프라이버시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라이버시 권리는 몇 세기나 된 오래된 개념이지만 이를 위협하는 기술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한 개념이다.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빅 브라더(Big Brother)’라고 부른 정부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그 정보를 자신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활용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뿐만 아니라 기업, 의료 기관, 개인적인 이익에 해를 가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수집한 정보를 이용하는 범죄자들로부터 프라이버시를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전자통신 프라이버시 보호법(Electronics Communi- cations Privacy Act)을 비롯한 많은 법령을 통해 정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려 노력해왔지만, 문제는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통제하거나 접속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에 비해 더욱 빠른 속도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에 접속할 줄 알고 한 사람의 사회보장번호만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의 교통 위반 사례, 신용 조회, 물품 구입 습관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심지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신분조차 ‘빼앗을’ 수 있다. 방해받지 않을 권리는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이다. 새로운 정보 시대에서 이러한 권리가 어떻게 보호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 참고 서적 |


* Ellen Alderman and Carolyn Kennedy, The Right to Privacy (New York: Knopf, 1995).

* David H. Flaherty, Protecting Privacy in Surveillance Societies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9).

* Richard F. Hixson, Privacy in a Public 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 Philippa Strum, Privacy: The Debate in the United States since 1945 (Fort Worth: Harcourt Brace, 1998).

* Alan F. Westin, Privacy and Freedom (New York: Athenaeum,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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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7  배심원에 의한 재판



모든 형사 소추에서 피고인은... 공정한 배심에 의해 신속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사건의 특성과 원인에 대해 통고받을 권리가 있다. 피고인은 또한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과 법정 대결을 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을 확보하기 위해 강제적인 절차를 취할 수 있다. 또 자기방어를 위해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 수정헌법 제6조



가장 혜택 받지 못하는 시민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사회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가장 선호받지 못하는 시민에 속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을 박탈하고 사회적 약속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며, 그 혐의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그들은 스스로 사회의 굴레 밖에 위치하게 된다. 그들은 말 그대로 ‘범법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교도소에 넣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거나 심지어 그들의 생명을 빼앗기 전에, 실제로 그들이 혐의를 받고 있는 범죄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인지 정말로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가장 명백한 이유로, 혐의자 개인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법의 지배를 통해 이를 결정함으로써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와 같이 중요한데 사회에 대한 피해와 국민의 자유 침해를 막기 위해서이다. 타락한 사법 체계, 또는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당국이 이용하는 사법 체계, 그리고 죄인을 그냥 풀어주는 사법 체계는, 민주주의 사회에 필수적인 정부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침식한다.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없이 자유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없는 것처럼,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공정하게 취급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사법 체계가 없다면 민주주의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미국의 형법 체계가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실제와 이상 사이에는 종종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수정헌법 제5조와 제6조에 명시된 헌법상의 요구 조건은 무엇이 이상인지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고등법원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주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형법 체계가 어떻게 집행되는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속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는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국민들에게 사법 체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검토하고 그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대중의 권리이기도 하다. 또한 배심원의 의무는 시민으로서 중요한 책임이며, 아마도 투표권에 버금가는 의무일 것이다. 정부의 기능에 있어서 배심원의 의무처럼 일반 시민이 누군가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혹은 그가 민사상의 손해를 입혔는지를 결정하는 임무를 떠맡도록 요청받는 경우는 없다. 배심원의 의무는 국민에 대한 하나의 교육 방법이기도 하다. 즉 배심원은 법을 적용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에, 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법이 바로 눈앞에 있는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배워야 한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

국민이 지배하도록 하는 가장 활기찬 수단인 배심원제도는 국민이 잘 지배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는 여러 가지 면이 있으며, 상황에 따라서 한 가지 면이 다른 면에 비해 더 중요할 수도 있으나, 모든 면은 우리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권리 꾸러미’의 일부이다. 예를 들어 재판에서 사용될 증거의 유형은 수정헌법 제4조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즉, 경찰은 실제로 한 사람의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를 찾아야 하며 수색 영장을 확보해야 한다. 경찰이 이러한 헌법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이 확보한 증거는 재판에서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경찰이 혐의자에게 헌법상의 권리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면, 혐의자의 자백은 법정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 사람이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공정한 재판을 통한 정의는 실현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일부에서는 이런 모든 안전장치들이 범죄자에게 너무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변호사가 똑똑하다면 유죄인 피고인조차도 처벌받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분명히 유죄인 피고가 무죄를 선고받는 유명한 사례가 종종 있긴 하지만, 사실 전체적인 사법 체계를 살펴보면 정의는 놀라울 정도로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재판 전 조사 및 체포 등과 관련된 안전장치들은 더욱 훌륭하고 전문적인 경찰 업무를 보장해준다. 즉 경찰이 범인을 체포했을 때는 이미 충분한 증거가 합법적으로 입수된 상태여서, 유죄에 대한 증거가 확실해 범죄인이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주 정부의 독단적인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설계된 헌법적 구조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배심원 재판은 본질적으로 진실을 결정하려는 노력이다. 한 사람은 주 정부가 말하고 있는 행위를 정말로 했는가? 과거에는 진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여러 다양한 형태를 취했으며 종종 심한 육체적 시련을 포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몇백 년 전 피고인은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서 신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달라고 부르짖어야 했다. 피고인을 물에 던져서 뜨면 유죄이고 가라앉으면 무죄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가 무죄일 경우 운이 좋으면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물에서 건져졌다. 유럽에서는 기사 계급의 재판은 결투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은 신이 무죄인 자의 무기를 강하게 해줘, 무죄인 사람을 허위로 고소한 사람이나 실제 죄인을 이길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높이 사고 있는 배심원제도가 언제 처음 개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노르만 족이 영국을 정복하기 전에 색슨 족의 법은 고소인이 피고인을 공개적으로 대적하도록 했다. 재판 과정은 공개되었으며 대중이 현장에 참석해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했다. 노르만 정복에 의해 대배심제도가 도입되었다. 노르만 족의 제도에서 비롯된 대배심제도는 ‘레코그니터(recognitor)’라 불리는 선택된 기사 12명이 영국의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다양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질문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세율이나 하인이 주인에게 다해야 하는 봉건적 의무 등이었다.

12세기에는 토지 소유와 연관된 일부 사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국왕 재판소에서 레코그니터를 송환해 다른 사람을 조사하든 자신들의 지식을 통해서든 사실을 확인하도록 했다. 재판소의 판결은 만장일치일 경우 최종적인 판결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국왕 재판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진실 여부가 가려졌으며 레코그니터 기사 단원이 배심원이 되었다. 원래 배심원들은 진실 여부를 판단할 뿐만 아니라 관습이나 현지 사람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증인 역할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5세기 초반에 보통 법원의 판사들은 배심원이 소송에서 제기된 증거에 기초하여 사실을 결정하는 기능만 하도록 제한했다.

미국 독립혁명 시대까지 배심원에 의한 재판은 모든 식민지에서 용인된 권리였다. 식민지 사람들은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보호하는 일이라고 여겼으며, 영국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이 식민지 미국에서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제한하려고 한다면 미국이 반발할 것이라고 영국 의회에 경고했다. 하지만 1765년 제정된 인지세법에 대해 영국 의회는 버크의 경고를 무시했다. 영국 의회는 밀수 혐의로 체포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을 해사 법원으로 보냈고, 민간인 배심원 없이 해군 관리들이 재판을 진행했다.

존 애덤스, 인지세법에 관하여(1765)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개혁은 해사 법원의 권한이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점입니다. 해사 법원에서는 판사 1명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습니다! 배심원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법과 진실 여부가 판사 1인에 의해 결정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배심과 소배심,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두 종류의 배심원이 생겨났다. 대배심원은 특정한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에 대해 기소(공소의 제기)할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를 결정한다. 소배심원은 실제 재판을 경청한다. 두 배심원단은 규모, 운영 방식, 증거의 기준 등에서 서로 다르다.

현재 미국에서 대배심은 많게는 24명까지 구성될 수 있다. 대배심은 복잡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소집되거나 혹은 단순히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다. 복잡한 문제일 경우 원고 측 변호사들이 증인을 불러오고, 배심원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론을 자세히 기술한 보고서를 제출하거나 유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기소할 수 있다. 대배심의 절차는 매우 유동적이다. 대배심은 소문처럼 보통 재판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증거들을 채택할 수도 있다. 기소장을 제출하는 기준은 확실성보다는 가능성이다. 대배심원들은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게 해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기소장을 제출할 수 있다. 한편 사건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질 경우 소배심의 기준은 이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윌리엄 블랙스톤 경, <영국 법률에 대한 논평>(1765)

하지만 사실 여부를 결정하거나 바로잡을 때, 그 사건이 판사 1인에게 위임된다면 편파성과 불공평이 크게 개입된다. 즉 사실이 아닌 일이 증명되었다고 가정하거나 특정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다른 상황을 확대하거나 변화시키면서 나머지 부분은 덮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중간 계급에서 제비뽑기로 선발된 분별력 있고 정직하며 능력 있는 배심원들이 진실을 밝

히는 최고의 조사관이며, 공적인 정의를 확실하게 지킬 파수꾼임이 밝혀질 것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압제 여부에 대한 재판이 열릴 때, 재판 때에 가서야 지명되는 자신과 무관한 12명의 인물에 의해 자신의 불법성이 검토되고 결정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사실이 확인되면 물론 법이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따라서 배심원제도는 일반적인 사법 행정에서 국민들이 응당 지녀야 할 권리를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있거나 부유한 시민들이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한다.


대배심제도는 전제주의에 대한 중요한 방파제 역할을 한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12세기부터 영국에 대배심이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왕 또한 자체적으로 형사 소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의 권한 남용은 대중의 봉기를 유발했다. 17세기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1세와 제임스 2세에 대한 반대와 18세기 조지 3세에 대한 식민지 미국인들의 반발 등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독립선언문에서 식민지 미국인들은 영국 국왕이 침해해온 권리들을 나열했으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피고인의 권리였다.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들은, 판사들이 국왕이 마음에 들어할 판결을 내렸으며, 재판은 불공평하게 이루어졌고, 배심원 재판은 거절되었으며, 재판이 먼 곳의 재판소로 옮겨지곤 했다며, 이 모든 것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서부터 전수되어온 법의 공정한 절차를 우롱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민 전체가 대표자를 통해 형사 소추를 제기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은 대배심제도를 보장하고 있는 수정헌법 제5조에 구체화되어 있다. 대부분의 주법에도 비슷한 조항이 있다. 영국에서는 1933년에 대배심제도가 폐지되었고 법원의 직원이 기소 준비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미국의 형사제도에서는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활동적인 제도로 남아 있다.

소배심은 일반적으로 12명으로 구성되지만 일부 주에서는 이보다 적은 수의 배심원들을 두기도 한다. 그들은 대배심원들처럼 유권자 중에서 무작위로 선출된 사람들이다. 배심원 재판에서 절차상 필요한 조건들은 아주 정확하며, 유죄가 증명될 때까지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 자신이 무죄임을 증명하는 일은 피고인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피고인의 유죄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은 주 정부에 있으며, 중범죄의 경우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가 판단 기준이다. 연방 법원과 대부분 주 법원에서는 유죄 판결을 내리려면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배심원 과반수가 무죄로 판단하게 되면 피고인은 석방된다. 그렇지만 과반수가 유죄라고 판단을 내리면 ‘불일치 배심’이라 알려진 결과가 발생하며, 이런 경우 다른 배심원단과 함께 새로운 재판이 이루어진다.

“유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무죄”라는 표현은 공허한 논리가 아니다. 헌법 조항과 이에 따른 절차상의 규정들은 주 정부가 한 사람의 시민과 마주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이점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배심 단계에서 검찰 측은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다수의 증거물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이런 기준은 경찰이 수색 영장을 획득하기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정당한 이유’ 기준과 유사하다. 대배심원들은 피고인이 유죄인지에 대해 완벽하게 알 필요는 없으며 단지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만 결정한다. 실제 유죄 여부는 소배심원들에 의해 결정된다.

재판에서는 검찰 측이 먼저 사건을 설명하고 검찰 측의 모든 증인에 대해서 피고 측 변호사가 반대 심문을 할 수 있다. 주 정부는 법적으로 타당한 증거들을 제시해야 하며 소문, 즉 증인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 등의 증거 유형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검찰 측은 피고인이 과거에 법을 어겼다는 등 현재 재판의 범위를 벗어난 문제를 거론할 수 없다.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를 가진 증인이 있다면, 그 증인은 법원에 출석해야 한다. 헌법에 따르면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사람과 직접 대면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검찰 측의 발표가 끝났을 때 피고 측은 주 정부가 유죄를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믿으면 법원에 혐의 없음을 즉석에서 발표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가끔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근거 없는 혐의는 사법제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 정부에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서 피고 측 변호사는 사건 경위를 설명하고 변호인 측의 증인들을 불러 검찰 측에 대한 반대 심문을 할 수 있다. 피고 측은 헌법에 의해 피고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 법정에 설 수 있도록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피고 측은 피고인의 결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유죄라고 하기에는 논리적인 의문점이 있다는 점만 지적하면 된다.

이렇게 간추려 설명하긴 했지만 실제 재판 절차 규정은 매우 복잡하다. 이것이 바로 헌법이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장한 이유 중 하나이다.



바이런 화이트 판사, 던컨 대 루이지애나 주 사건(1967)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우리의 모든 민간 기관이나 정치 조직의 기반을 구성하고 있는 자유와 정의라는 기본적인 원칙에 합당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미국의 정의 구현 제도에 기초가 되는 사항이라고 믿습니다... 연방 헌법과 주 헌법에 있는 배심원 재판 규정은 공적인 권력 행사에 대한 기본적인 결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판사 1인이나 한 무리의 판사에게 시민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위임할 수는 없다는 결정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미국 형사제도의 현실은 종종 이상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검찰이나 국선 변호사(돈이 없는 피고인을 위해 국가에서 무료로 선임해주는 변호사), 판사들은 종종 형을 줄여준다는 조건으로 피고인에게 유죄임을 자백하게 하여, 재판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도록 합의하는 ‘유죄협상(plea bargaining)’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규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깔끔하게 진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혼란스런 상황도 있고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도 있으며, 변호사가 항상 달변인 것도 아니다. 또 판사들이 항상 법적인 지식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국 사법제도는 이러한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사법 체계보다도 범죄 혐의자를 가장 잘 보호해준다. 모든 자유와 마찬가지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또한 사회 상황에 발맞춰 변화하며 개선되고 있다.

세월에 따라 배심원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면, 헌법적 구조의 틀 내에서의 변화는 항상 예외보다는 원칙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토머스 제퍼슨은 “정직한 사람들 12명(배심원)의 상식”이 공정한 판결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에서 배심원 역할을 할 사람은 항상 유권자 등록 명단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는 “정직하고,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백인 남성 12명”이라고 했어야 옳다. 12장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투표권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함에 따라, 국민의 권리와 책임은 정부의 행정 및 사법 업무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대법원이 1940년에 지적했듯이, “적절한 배심에 대한 개념은 민주주의 사회와 대표 정부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과 발맞춰 발전했다. 배심원이 사회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단체임은 기존 전통의 한 부분이다.”

시민으로서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미국 역사 초기에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1830년경에는 재산 소유 여부를 가지고 투표권을 제한하거나 배심원이 될 자격 조건으로 규정하는 주는 없어졌다. 그렇지만 남북전쟁이 노예제도를 종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일부 주에서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배심원에서 제외시키려 했다. 1879년에 대법원은, 흑인들은 배심원이 되지 못하도록 한 웨스트버지니아 주 법령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투표 자격은 주 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남부 주들은 흑인들에게서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고안해냈으며, 또한 그들이 배심원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흑인이 유권자가 되지 못하면 배심원 자격 또한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0년에 민권운동이 시작되면서 흑인들을 배심원에서 제외시킨 점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이 연방 법원에서 공감을 얻게 되었다. 부분적으로 인종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과 이상이 변하고 있었고,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시위를 통해 마침내 흑인들도 미국에서 완전한 법적 권리를 얻게 되었다. 법원들이 계속 강조했듯이, 특정 집단의 배심원 활동을 막는 일은 이러한 집단에 대한 차별이며,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운 재판의 특성 중 하나인, 동료로 구성된 배심원의 혜택마저 박탈하는 일이었다.

몇 년 동안 법원 소송사건에서 피고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배심원 명단에서 제외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부 집단을 배심원 활동에서 제외하는 일은, 적절한 법적 절차를 밟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굿 마셜 판사, 피터 대 키프 사건(1972)

사회의 한 대규모 혹은 동질 집단을 배심원 활동에서 제외하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알려질 수도 없는 넓은 범위의 인간 본성의 특질과 다양한 인간 경험을 배심원 사무실에서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배심

원에서 제외된 집단이 확실히 중요성을 지닐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이 박탈당했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집단적으로 계속해서 투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배심원 목록에서 제외된 가장 큰 단체는 여성이다. 여성은 1920년에 투표권을 얻은 이후에도 그들의 일차적인 의무는 집과 가정을 돌보는 일이라는 이유로 배심원 활동에서 여전히 제외되었다. 형사 재판 도중에 여성이 들을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사안들은 여성의 ‘연약한 감수성’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편견이 남성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밸러드 대 미합중국 사건(1946)

입장을 바꾸어 모든 남성이 배심원단에서 의도적으로 체계적으로 제외된다면 배심원이 사회의 진정한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남녀는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남녀 한쪽으로만 구성된 사회는 남녀 모두로 구성된 사회와 다릅니다. 한쪽이 다른 쪽에 미치는 미묘한 영향력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둘 중 한쪽이라도 제외된다면 어떤 뚜렷한 특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한쪽을 제외한다면 배심원이 사회의 대표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여성은 배심원제도에 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배심원제도가 여성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권리가 확대된 모든 단체의 경우가 그렇듯이, 여성은 시민으로의 책임감을 더욱더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배심원제도는 범죄 혐의자의 권리를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동료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야말로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단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이론이다. 배심원제도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제도이다. 왜냐하면 배심원제도는 개인에게 진지한 책임감을 부과하며 개인은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배심원 재판은 전체 사회에 법적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준다.


워렌 E. 버거 대법원장, 리치몬드 신문사 대 버지니아 주 사건(1980)

현대 미국의 형사 재판 절차의 기원은 역사 기록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사 재판이 변해오는 동안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재판이 공개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연속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통해, 그리고 몇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한 이유로, 우리는 개방성이라는 근거가 우리의 사법 체계하에 있는 형사 재판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수정헌법 제14조와 함께 수정헌법 제1조는 정부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 국민이 평화롭게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명시적으로 보장된 자유들은 정부의 기능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자유를 확인하려는 핵심적인 목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정부가 하는 일 중 형사 재판이 진행되는 방식보다 국민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중요성을 가지는 일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권리장전은 재판 과정이 공개되었던 오래된 역사적 배경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일반인이 재판 과정에 접근하는 일은 재판 과정 자체의 중요한 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여 법정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 재판 행위는 “자유로운 영국 헌법의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이점”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표현과 언론 등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는 이러한 명백한 권리 보장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재판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권리가 의미하는 바는, 수정헌법 제1조가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정부는 수정헌법 제정 당시에도 대중에게 오랫동안 열려 있었던 법정의 문을 닫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수정헌법 제1조는 불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1조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회라는 맥락에서 읽는다면, 명백한 언어로 광범위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형사 재판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가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권리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몇 세기 동안 참석했던 그러한 재판에 참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면, 표현의 자유 및 언론의 자유의 중요한 면들이 도려내질 수 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재판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는 여전히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라고까지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유가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의 대가라면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사회의 주된 요소라고 여기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국민의 자유와는 달리 배심원에 의한 재판은 심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대규모 검토가 필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배심원에 의한 재판 권리가 결투를 통한 재판이나 1명의 판사가 절대적인 판결을 내리는 폐쇄된 법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자유롭고 공정한 재판의 이상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현재 체계로는 업무량이 너무 많아 정말로 자유롭고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행 체계는 불충분하게 작동된다고 비판받고 있다. 너무나 많은 재판이 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처리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사소한 사건이다. 법원의 일정표는 가득 차 있어 하나의 재판이 때로 몇 달 지체되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몇 년이 지나서야 피고인이 법정에 서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정의의 실천을 뒤로 미루는 것은 정의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말이 있다. 국선 변호사들은 업무량이 너무 많아 자신이 돕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너무나 많은 재판과 부족한 직원으로 인해 ‘유죄협상’을 하려고 해서, 종종 상대적으로 경미한 범죄 혐의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더욱 심각한 중죄인에게는 아주 미미한 형벌을 내리기도 한다.

사건이 법정에서 다루어질 경우, 실제로 배심원들이 진실을 결정하는 최고의 수단일까? 과거에는 배심원제도가 존재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배심원이 이웃 사람들을 알고 있고,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 알고 있으며, 사실도 알고 있어 공평하고 공정한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배심원들은 수백 평방마일 범위에 있는 수십만 명의 유권자들 중에서 선출된다. 배심원들은 피고인을 거의 모르고 있으며, 만약 안다면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면 판결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독점법 사례나 주가 조작 및 사기 등의 사건을 다룰 경우, 일반 시민들이 정말로 소송과 관련된 경제와 회계 전반에 걸친 주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형사 체계를 더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결국 배심원제도의 탄생지인 영국에서는 민사 재판 중 1퍼센트와 형사 재판 중 5퍼센트만이 배심원에 의해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1명 혹은 몇몇 판사가 배심원 없이 심리하는 ‘벤치 재판(bench trial)’은 시간도 적게 들고 비용도 적게 든다. 또한 이 재판은 대중에게 공개되고 항소법원에서 재검토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구나 법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 소송사건의 경우 일반인보다는 판사들이 결정을 내리기에 더 알맞은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항을 고려하여 미국에서는 민사법의 경우 양측이 공평한 외부인의 판결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하는 ‘공평한 중재(impartial arbitration)’를 향해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중재는 꽉 차 있는 법원 일정으로 인해 재판이 지체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신속하며 공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기업체가 관련된 경우 중재는 양측이 시장 규칙에 기초한 판결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배심원제도의 마지막 문제점은 배심원들이 악명 높을 정도로 변덕스러워 피고인이 무슨 일을 했든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정한다면, 결국 법을 무시할 수도 있으며 능수능란한 변호사에 의해 조종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들 모두 부분적으로 사실이며, 오늘날 미국의 형사와 민사 체계는 다양한 형태에 의존하고 있다. ‘벤치 재판’도 있고 ‘중재’도 있다. 게다가 경찰이 일을 잘하면 유죄를 입증할 만한 충분한 양의 증거를 확보해 배심 재판 없이도 피고인이 유죄를 자백하는 경우도 있다.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배심원이 있다는 것은 일반 시민들의 결정에 크게 의존하는 체계라면 때때로 드러날 수 있는 약점이기도 하다. 또 미국 역사에서 배심원들이 법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배심 무효(jury nullification)’가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 독립혁명 이전에 미국의 어떤 배심원들은 영국의 무역 및 항해법이 부당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밀수죄 혐의를 받은 이웃에 대해 기소를 거부한 바 있다.

하지만 배심원에 의한 재판제도가 결점이 있다고 해서 이를 없앤다면, 이는 민주주의 정부 자체에 타격을 입히는 일일 것이다. ‘벤치 재판’이나 민사소송의 경우 ‘중재’를 통하면 더 잘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벽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동료로 구성된 배심원 앞에 서는 것이며, 그곳에서 주 정부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라는 점을 증명하는 일이다.

배심원제도를 단순히 효율성 혹은 비효율성이라는 면에서 보려는 비평가들은, 배심원이 유죄나 무죄를 결정하는 것 이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일반 시민들이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일상적인 과정에 자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상실하고 있다며 걱정하고 있다. 한 사람이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활동인 배심원 활동은 국민들에게 책임감과 참여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동료들로 구성된 배심원에 의한 자유롭고 공평한 재판은 범죄 혐의자나 배심원으로서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업무를 맡은 사람들 모두에게 국민의 중요한 권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 참고 서적 |


* Jeffrey Abramson, We the Jury: The Jury System and the Ideal of Democracy (New York: Basic Books, 1994).

* Harry Kalven, Jr., and Hans Zeisel, eds., The American Jury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1966).

* Linda K. Kerber, No Constitutional Right to be Ladies (New York: Hill & Wang, 1998).

* Godfrey D. Lehman, We the Jury: The Impact of Jurors on Our Basic Freedoms (Amherst, NY: Prometheus Books, 1997).

* Leonard W. Levy, The Palladium of Justice: Origins of Trial by Jury (Chicago: Ivan R. Dee,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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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8  피고인의 권리



부당한 수색, 체포, 압수에 대하여 신체, 가택, 서류 및 동산의 안전을 보장받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체포, 수색, 압수의 영장은, 확실한 이유에 의거하고, 선서 또는 확약에 의하여 뒷받침되며, 특히 수색할 장소, 체포될 사람, 또는 압수될 물품을 기재하지 아니하고는 발급될 수 없다.  - 수정헌법 제4조


누구라도 대배심에 의한 고발 혹은 기소가 있지 않은 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 또는 파렴치죄에 관하여 심리를 받지 아니한다... 누구라도 동일한 범행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대해 재차 위협받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사 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아니하며,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 수정헌법 제5조


모든 형사 소추에서 피고인은... 공정한 배심에 의해 신속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사건의 특성과 원인에 대해 통고받을 권리가 있다. 피고인은 또한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과 법정 대결을 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을 확보하기 위해 강제적인 절차를 취할 수 있다. 또 자기방어를 위해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 수정헌법 제6조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생명, 자유,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  - 수정헌법 제14조



일반적으로 우리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을 위한 개인의 권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제도적인 권리이며 개인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것이다. 하지만 독재 국가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배심원 재판은 개인에게 재판의 공정함을 확인시킬 수 있도록 하는 규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진다. 판사가 불법으로 취득한 증거를 사용하도록 하는 재판이나, 피고인이 변호사에게 접근할 수 없어 스스로 증언을 해야 하거나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을 법정에 부르지 못하게 하는 재판은 정당한 법의 절차라는 기준에 맞는 재판이라고 할 수 없다. 권리장전을 작성한 사람들은 식민시대의 경험에서뿐만 아니라 영국의 역사로부터도 이 점을 인지했다. 영국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한 이후 계속 법의 지배를 확대해왔다.

오늘날 우리는 권리와 개인의 자유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범죄 혐의자의 권리와 같이 개인적인 권리라고 식별하기 쉬운 권리들조차도 사회 공동체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권리는 개인을 사회적 규범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 개인과 사회 전체가 전제적인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권리장전은 표현의 자유 부분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들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놓았는데, 이는 개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어떤 종류든 권리는 전제적인 중앙 정부로부터 개인의 일상생활이 부당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권리는 사회와 개인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피고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정당한 절차에 대한 기본적인 골격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사항은 지난 2세기 동안 지방, 주, 연방의 법정에서 다듬어져왔다. 구체적인 사항들 대부분은 미세하고 평범한 세부적인 절차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펠릭스 프랭크퍼터 판사가 선언했듯이 “미국 자유의 역사는 대부분 절차의 역사”이다. 프랭크퍼터 판사의 대법원 동료인 로버트 H. 잭슨 판사는 이에 동의하면서 ‘정당한 절차’가 무엇을 의미하든지 절차상의 공정함이 가장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정당한 법 절차인가? 이에 대한 절대적 합의는 없지만 지난 2세기 동안 법원들은 이 구절이 절차상의 권리뿐만 아니라 실체법상의 권리를 포함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이 책의 목적에 비추어보면 정당한 법 절차는, 헌법이 사법제도의 완전성을 보호하기 위해 창조하고 법원에서 해석하며 입법부에서 보충한 것이다. 정당한 법 절차는 모든 소송사건에서 피고인이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모든 피고인이 혐의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법에 따라, 공개적으로, 그리고 일반 대중이 사법 체계가 공평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일정한 절차를 밟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이다. 쉬운 일처럼 들리지만 미국 및 모든 나라의 형사 절차의 역사를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체계는 국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확신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군법 절차는 다르지만 이 책에서는 민간 법원에 제기된 소송사건을 주로 다루기로 하겠다.



독립혁명 당시 미국에서 피고인의 권리라는 개념은 영국에서보다 훨씬 더 진보해 있었다. 1776년 미국 독립혁명 이후 첫 번째로 통과된 각 주의 법률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현대적인 형태의 권리 목록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합리적인 보석의 권리, 법정 밖에서 한 자백 제외, 고발 내용을 알 권리,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의 경우 대배심 기소 필요성, 배심원에 의한 판결 등이 있으며, 이중 다수는 1791년의 권리장전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권리장전은 1920년대까지 연방 정부에만 적용되었으며 형사소송은 대부분 주 법에 따라 주 법원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엔 서로 다른 두 개의 형사 절차 체계가 존재했다.

한편으로는, 작은 규모의 연방 조사단이 조사를 하고 권리장전의 엄격한 요구 조건에 맞춰 연방 법원에서 재판을 하는 연방 범죄(의회법에 의해 규정된 범죄)의 수가 적었다. 더구나 피고인이 너무 가난해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으면 법원이 그를 대변할 수 있는 변호사를 동네 술집에서 지명하기도 했다. 정당한 법 절차를 위해서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개념은 적어도 연방 법원의 경우 20세기 초반까지 잘 지켜졌다.

다른 한편에는 주 법원들이 존재했다. 주 법원에서는 각 지방 혹은 주 경찰이 주 범죄(주 법에 의해 규정된 범죄)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지방 혹은 주 지역 변호사들이 재판을 진행했으며, 연방 권리는 적용되지 않고 주의 법조항만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대부분의 주에서 절차상의 권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존재하는 권리조차도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영장 없이 수색이 진행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체포된 사람은 변호사도 없이 위협적인 경찰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피고인이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없으면 변호사도 없이 재판을 받아야 했다. 많은 주에서는 피고인이 재판 도중 증언을 거부할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그가 입장을 밝히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침묵을 지키는 일이 유죄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에게 항소할 권리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은 연방제 체계이기 때문에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사이뿐만 아니라 각 주 사이에도 법이 다르다. 헌법이 명백하게 연방 정부의 우월권을 명시하지 않은 부분에서는 주 정부가 범죄의 조사 및 형사소추를 포함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에 많은 여유를 가지는 관행이 있었다. 20세기 초반까지 연방 법원은 헌법이 주에서 행해지는 재판의 절차나 결과를 검토할 권한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움직였다. 많은 주에서는 절차상의 지침이 연방 정부의 정책만큼이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가 존재해, 어떤 상황에서 봐도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재판이 있는가 하면, 법을 우롱했다고 묘사되는 재판도 존재했다. 법을 우롱했다고 묘사되는 재판 중 하나 때문에 마침내 연방 법원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이후 50년 동안 미국의 형사 절차는 새롭게 정의되었다.


필라델피아 변호사 윌리엄 로울(1825)

아무리 결백한 사람이라 해도 대중의 비난과 재판이라는 끔찍하게 장중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들에 대해 반대 심문을 하거나, 그들의 증언에 담겨 있는 모순점이나 결점을 지적하거나, 혹은 그 증언을 오히려 자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1931년 앨라배마 주에서 ‘소코츠보로 소년들’이라고 불리는 흑인 청년 8명이 백인 소녀 2명을 강간한 혐의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흑인들은 결백했을 수도 있으나, 경제공황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최남부라는 인종차별이 심한 환경에 처해 있던 그들에겐 자신들을 변호할 지식이나 능력이 없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 한나절도 걸리지 않은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가 입증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의 변호를 맡도록 판사가 지명한 변호사들은 법정에 얼굴을 살짝 내비치고 사라졌을 뿐이었다. 정의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이 북부 지역 신문들에 실리자, 민권 단체들이 즉시 항소 시에 효과적인 변호를 하겠다고 자원했으며 이 사건을 연방 법원 체계로 옮겨 대법원까지 가져갔다.


조지 서덜랜드 판사, 파월 대 앨라배마 주 사건(1932)

변호사를 통해 의견을 주장할 권리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많은 경우에서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똑똑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법률에 관해서는 능력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범죄 혐의를 받은 경우, 그는 일반적으로 기소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는 증거에 관한 법률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변호사의 도움이 없다면, 그는 제대로 고발을 받지도 않았는데 재판을 받고 불충분하거나 사건과 관련이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증거로 인해 기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모든 절차에서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죄인데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을 몰라 유죄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도 이런 상황이 실제로 발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무지하고 문맹인 사람,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파월 대 앨라배마 주 사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 째, 이 사건은 연방 법원에 주에서 실행되고 있는 형사 체계를 감시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공정한 법 절차가 주에 적용된다고 명시되어 있는 수정헌법 제14조 공정한 법의 절차 조항에 따른 것이다. 그 당시에도 그리고 그후에도 모든 주의 형사 절차가 서로 동일하도록 하는 일이 연방 법원의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방 법원은 헌법이 정당한 법 절차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요구한 최소한의 권리 보호를 규정하려고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주에서는 배심원을 12명 두고 있으며 다른 주에서는 이보다 적은 배심원을 두고 있다. 연방 법원은 재판과 배심이 최소한의 공정함이라는 기준을 따르는 한 이런 다양성은 허용되는 일이라고 주장해왔다.

두 번째로 주목할 만한 면은 이 사건이 사형 선고가 나올 수 있는 경우 변호사의 유효한 도움이 법적으로 필요하다는 원칙을 세웠다는 점이다. 파월 대 앨라배마 주 사건을 다룬 변호사들은 그저 법정에 모습만 드러냈을 뿐이었다. 변호사들은 자신들의 고객을 변호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변호사의 실질적인 목적에 비추어볼 때 참석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법원은 피고인에게 변호사가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변호사는 실질적인 도움, 즉 연방 법원이 표현했듯이 ‘유효한’ 변호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파월 대 앨라배마 주 사건을 다룬 대법원은 연방제도를 강력히 신뢰하고 있었기에, 대법원의 감시 기능을 확대할 의지가 있었지만 일을 천천히 진행시켰다. 대법원은 공정한 법 절차를 불이행하는 상황 중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큰 사건을 다룰 때에만 감시 기능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1936년에는 대법원이 구타와 고문을 심하게 당한 후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흑인 남성 3명에 대한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브라운 대 미시시피 주 사건(1936)에서 찰스 에반스 휴즈 대법원장은 미시시피 주가 강요에 의한 자백을 얻어낸 일은 공정한 법 절차를 위배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고문이 ‘정의’를 무너뜨리며 “전통과 국민의 양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원칙을 침해한다고 선언했다.

다시 한번 대법원은 권리장전이 보장하고 있는 보호 범위를 확대하려 하지 않고 수정헌법 제14조의 정당한 법 절차 조항에 의존해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주 정부가 재판의 구조를 정하는 방식에는 상당한 융통성이 있으며 정당한 절차라는 이상에 부응하는 공정성의 원칙을 따르기만 하면 어떤 절차든지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배심원에 의한 재판 또한 꼭 실시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명백하게 했다.


찰스 에반스 휴즈 대법원장, 브라운 대 미시시피 주 사건(1936)

주 정부가 배심 재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고문을 통해 재판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고문대나 고문실이 증인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파월 대 앨라배마 주 판결은 주 정부가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의 경우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원칙은 세웠지만, 좀더 가벼운 중범죄의 경우 돈이 없는 피고인에게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미국에서 이 문제는 1963년이 되어서야 다뤄지게 되었는데, 계기가 된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소송사건 중 하나인 기디온 대 웨인라이트 소송사건이었다.

부랑자인 클래런스 얼 기디온은 당구장에서 절도를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 도중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변호사를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미국 헌법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판사는 플로리다 주 법에 따라 이 경우엔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대응했다. 기디온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변호했지만 상황 증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도서관으로 가서 플로리다 주 대법원과 연방 대법원에 어떻게 항소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았다.

기디온의 상고가 대법원에 상정되었을 당시 대법원에서는 “정당한 절차 대변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얼 워렌 대법원장이 주재하고 있던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의 정당한 법 절차 조항이 권리장전의 다른 곳에 표현된 정당한 법 절차의 요소와 서로 결합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과정에 있었다.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6조에 명시된 변호사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정당한 법 절차와 결합될 수 있는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기디온의 상고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피고인에게 변호사를 선임해주는 것이 대법원의 전통이었기에 대법원은 기디온을 변호하도록 워싱턴에서 가장 유능한 변호사 중 한 사람이자 이후 대법원에서 일하게 된 에이브 포타스 변호사를 지명했다. (법률회사들은 대법원으로부터 이러한 요청을 받는 경우, 비록 재판을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 수천 달러 중에 1센트도 돌려받지 못하지만 대단한 영광으로 여겼다.)

구두 변론에서 포타스는 판사들에게 재정 상태가 어떻든 상관없이 피고인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정당한 절차를 위한 필요조건이 충족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법원도 이에 동의했으며, 중범죄 혐의를 받은 모든 사람도 이러한 기본권을 누릴 수 있도록 판결을 내렸다. 몇 년 후 워렌 버거가 대법원장이 되었을 때, 대법원은 이러한 권리를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는 경범죄 혐의에도 적용했다.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기디온 판결에 대해(1963)

클래런스 얼 기디온이라는 플로리다 죄수가 자신의 감방에 앉아 연필과 종이로 대법원에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대법원이 매일 받는 수많은 우편물 중에서 이 조잡하게 작성된 청원서에 시비가 될 만한 점을 찾아내는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대법원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그 기능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디온은 편지를 작성했고 대법원은 그의 사례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다시 재판을 받았고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한 대가로 2년 동안 수감되었던 교도소에서 석방되었으며, 이로써 미국 법 역사의 전체 과정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는 범죄 혐의를 받은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피고인이 보호받을 수 있는 성문화된 권리들이 없다면 변호사 혼자서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형사 사건에서 이용된 증거는 수정헌법 제4조에서 규정된 불법적인 수색 및 압수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여기에도 18세기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미국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영국법은 경찰이 가택을 수색할 때 영장을 지참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영국의 식민지 정부 관리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거의 모든 물건에 대해 수색할 수 있는 자격인 ‘일반 영장(general warrant)’에 의존했다. 일반 영장의 개념은 헨리 8세가 통치하던 튜더 왕조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8세기 초 일반 영장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점점 거세졌다. 비평가들은 일반 영장이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집을 노출시키고 수색하도록 하는 국민 전체에 대한 노예제도의 상징”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일반 영장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일반 영장은 영국 정부와 식민지 미국 주민들 간의 주요 마찰 요인이었다. 일반 영장의 문제점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1763년 영국에서 국무장관에 의해 발행된 전형적인 영장은 풍자 잡지인 《노스 브리튼(The North Briton)》의 저자, 인쇄업자, 출판업자에 대해 ‘열심히 수색’하고 그들의 문서를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가옥 5채에 대한 수색이 이루어졌고, 49명(대부분이 결백한)이 체포되었으며 수천 권의 책과 문서가 압수되었다. 영장에 대한 반대 의견이 영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영장 사용을 차츰 제한하게 되었다.


대법원장 찰스 프래트 경, 일반 영장에 관하여(1762)

증거를 취득하기 위해 이름 없는 영장의 도움으로 한 사람의 주택에 침입하는 것은 (영국인이라면 누구든 단 한 시간도 지배받고 싶지 않은) 스페인 식 종교재판보다 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영국에서 일반 영장에 대한 제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는 일반 영장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이는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에 대해 가졌던 주요 불만 중 하나였다. 일반 영장에 대한 유명한 연설에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의회의 의원 제임스 오티스는 일반 영장에 대해 반대하면서 이러한 영장은 “법의 기본적인 원칙인 주택의 특권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일반 영장이 “영국의 법률서에서 발견된 최악의 전제적 권력 도구이며 영국의 자유에 가장 파괴적인 요소”라고 비난했다. 독립혁명 이후 각 주에서는 이러한 영장의 사용을 제한하는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했으며, 제임스 매디슨이 권리장전을 작성할 때는 수정헌법 제4조를 통해 영장의 사용에 대한 한 걸음 더 나아간 규제를 명시하게 되었다.

미국 헌법에 따라 영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경찰은 먼저 체포하려는 특정인이나 수색하려는 특정 장소를 지명할 수 있도록 자신들이 확보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가령, 단순히 “그 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되고 체포하려는 사람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 경찰은 또 용의자의 집에서 밀수품, 마약, 무기 등 구체적으로 무엇을 찾고자 하는지 명시해야 한다. 영장을 받기 위해서 경찰은 수정헌법 제4조에 명시된 ‘확실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이는 어떤 집에 밀수품이 있거나 특정 인물이 사실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는 압도적인 증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찰은 그 사람이 특정한 불법 행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거나 가택을 수사하면 범죄를 증명할 수 있는 특정한 물품이 나올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수정헌법 제4조는 이런 조항들의 시행 방법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주에서 많은 경찰들이 실제로 영장 없이 가택을 수색하거나 사람을 체포하기도 했으며,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도 영장을 받을 수 있었다. 법원들은 연방 경관들이 헌법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하고 ‘배제규칙(exclusionary rule)’이라고 알려진 기준을 만들게 되었다. 이 기준에 따라 적절한 영장 없이 취득한 증거는 재판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연방 법원들은 권리장전이 미치는 범위를 각 주에까지 확장시키면서 ‘배제규칙’을 주 경찰과 법원에도 적용했다.


톰 클라크 판사, 맵 대 오하이오 주 사건(1961)

(배제규칙이 없다면) 불합리한 수색을 당하지 않을 권리는,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헌장에서 언급될 가치도 없는 하찮은 ‘형식적인 단어’가 될 것이다. 또한 그 규칙이 없다면 주 정부로부터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지 않을 자유는 매우 덧없는 것이 되며, 강제로 증거를 찾으려는 모든 야비한 수단으로부터의 자유와 개념적인 상관성을 갖지 못하게 되어, 대법원이 “정돈된 질서라는 개념에 함축된” 자유로 높이 여긴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카도조 판사가 배제규칙 때문에 “경관이 우물쭈물하여 범죄자를 놓치게 되었다”고 말했듯이, 일부에서 배제규칙에 대한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 이 규칙이 수정헌법 제4조가 요구하는 바를 집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배제규칙은 주 정부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규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소 중인 사람에게서 불법적으로 얻은 증거는 사용할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말이다. 약간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경찰이 적절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더 나은 선善에 기여한다.



수정헌법 제6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는, 일부 학자들이 수정헌법 제5조의 ‘위대한 권리’라고 부르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와 종종 연결된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는 중세의 종교재판과 영국 성실법원(Courts of Star Chamber)의 심문 절차에 대한 반대에서 비롯되었다. 17세기 후반 “누구도 스스로를 기소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nemo tenetur prodere seipsum)”라는 명언이 영국 보통법 법원에서 채택되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국가가 한 개인을 기소할 수 있으나, 그를 재판 과정에 동참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게 되었다. 식민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보통법의 일부로 이러한 원칙을 수용했으며 많은 주에서는 초기 권리장전에 이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매디슨은 연방 권리장전을 작성할 때 이를 당연한 사항으로 포함시켰다.

이러한 특권은 1950년에 심한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한 반미조사위원회의 심리에서 증인들이 매카시 상원의원의 질문에 대답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수정헌법 제5조의 권리에 따라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 일은 공산주의자와 연결되게 되었고, 논평자들은 진실로 결백한 사람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형사 재판이나 조사위원회 앞에서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명 언론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만을 보호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이 헌법상의 권리가 수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사들을 실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19세기 후반부터 그랬듯이, 이 권리를 확대 해석하는 견해를 유지했다. 대법원은 19세기 후반에 자기에게 해가 되는 증언을 하지 않을 권리를 형사 사건뿐만 아니라, 민사 사건에도 적용했다. 민사소송에서도 사용된 증언이 형사 심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권리는 절대적이지는 않다. 피고인은 지문 채취, 혈액 검사, 음성 녹음, 마약 복용 여부 조사 등 신체적 증거 조사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재판에서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판사나 검사 누구라도 피고인의 침묵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한다면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된다.



피고인은 증언을 강요받을 수는 없지만 자발적으로 자백할 수는 있으며 자백은 증거로 이용될 수 있다. 사실, 전문범이 아닌 충동이나 마약으로 인한 범죄의 형사소송에서 용의자들은 대개 자백을 하려 한다. 한편 고문이나 위협, 유인이나 약속 등을 통해 얻어낸 자백에 반대하는 오래된 보통법 규칙은 헌법적인 법률의 일부임이 1884년 대법원에서 재확인되었다. 1950년대에 있었던, 공산주의를 축출하려던 이른바 ‘빨갱이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경찰들에게 권리장전에 명시된 제한 사항을 따르면서 어떻게 책임을 다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해주기 위해 계속 기준을 다듬고 있다.

대법원은 자백이 육체적 학대나 심리적 폭력의 결과가 아닌 자발적인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대법원은 또한 수정헌법 제5조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수정헌법 제6조 변호사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와 연결시켜, 피고인이 묵비권을 포함하여 자신의 권리에 대해 먼저 설명을 들었을 때에만 이후의 자백이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했다.


아서 골드버그 판사, 에스코베도 대 일리노이 주 사건(1964)

우리의 헌법은 피고인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을 특권 사이에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보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법 체계라면, 피고인이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도록 허락받으면 이러한 권리를 알고 행사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헌법상의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법 집행 체계의 효율성을 왜곡한다면, 이는 체계에 큰 잘못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1966년에 대법원은 획기적인 미란다 대 애리조나 주 사건의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경찰과 하급 법원은 헌법상의 모든 요구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명백한 판결을 원하고 있었고 미란다 소송사건에서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워렌 대법원장에 따르면, 경찰은 용의자를 체포하면서 그 사람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와, 그 장소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이후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음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또한 변호사의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는 경우 주 정부가 변호사를 선임해줄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야 한다. 대법원장은 변호사가 자리에 없는데도 경찰이 심문을 계속한다면, “피고인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와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할 권리를 알면서도 고의로 포기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이 정부에 부여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란다 판결이 나오자마자 대법원이 범죄인들을 감싼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란다 판결의 기본적인 건전성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미국의 혁신적인 경찰서에서는 몇 년 동안 미란다 원칙과 비슷한 관행을 따르고 있었으며, 그 일이 범죄를 수사하거나 해결하는 데 효율성을 감소시키지 않았다고 주저 없이 밝혔다. 자백을 원하는 죄인들은 어쨌든 자백을 했으며, 자백이 없다면 경찰이 더욱 효과적으로 업무를 수행해 유죄인 사람을 찾아내 기소했다. 대법원의 판결이 범죄를 조장한다는 비난에 대해 램지 클라크 법무장관은 “법원 판결이 범죄를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많은 검사들도 이에 찬성했으며 한 검사는 “법원 판결이나 절차상 관행의 변화가 범죄율에 미치는 영향은 아스피린이 뇌종양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고 말했다.

대법원과 헌법은 누군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의 관심사인 동시에 사회의 관심사는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용의자가 정당한 법의 절차를 받지 못하고 감옥에 보내지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다. 범죄 예방은 법을 만들고 법의 집행에 대한 결정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입법부나 행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입법부와 행정부는 헌법이 규정한 기준 안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헌법 작성자들은 강압적인 군주에 의해 법원들이 어떻게 비뚤어질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적용에서만큼은 법원에 완전한 독립성을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형법이 한 정권의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숙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범죄 혐의자들에게 동료에 의한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포함하여 정당한 절차를 구성하는 많은 권리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사 체제 전체가 의심할 여지 없이 유죄가 증명될 때까지 범죄 혐의자는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가정을 따르도록 고집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범죄 혐의를 받은 경우 누구라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완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유죄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은 주 정부에 있다.

일부 범죄자가 증거를 잘 감추는 바람에 경찰이 혐의를 증명하지 못해 정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정당한 법 절차를 강조하는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 중 하나이다. 이따금씩 범죄자가 무죄로 석방될 수도 있지만 무죄인 사람이 잘못되어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체계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 체계가 안고 있는 이상은 힘을 발휘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권리가 보호되기 위해서 정당한 법 절차는 단순한 표현 이상이 되어야 한다.



| 참고 서적 |


* David J. Bodenhamer, Fair Trial: Rights of the Accused in American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 Jacob W. Landynski, Search and Seizure and the Supreme Court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66).

* Leonard W. Levy, Origins of the Fifth Amendm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 Anthony Lewis, Gideon? Trumpet (New York: Random House, 1964).

* Melvin I. Urofsky, The Continuity of Change: The Supreme Court and Individual Liberties, 1953-1986 (Belmont, CA: Wadsworth Press, 1989).

* Samuel Walker, Popular Justice: A History of American Criminal Justic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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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9  재산권



누구라도 정당한 법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또한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공이용의 목적으로 수용당하지 아니한다.  - 수정헌법 제5조


많은 사람들에게 재산권은 오래된 개념으로서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의해 개인의 지위가 결정되었던 과거의 유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과거에는 재산의 대부분을 소수가 소유했고,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와 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권력 또한 거머쥘 수 있었다. 재산권은 사람들 다수가 재산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아예 소유하지 못했던, 정부와 사회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 통제되었던 시기를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그 당시 여성들은 결혼하면 자신이 가진 재산에 대한 통제권을 모두 잃었다. 우리 대부분은 재산이 널리 분배되고, 재산뿐만 아니라 사회적 업적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며, 여성이 구식 관념 때문에 곤경에 처하지 않고, 토지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투표권을 지닐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을 더욱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재산을 소유하고 향유할 권리는 항상 국민의 권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헌법을 작성했던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존 루틀리지는 대표들에게 “재산은 확실히 사회의 주요한 목적입니다”라고 말했다. 대표단은 여기에 대해서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헌법 작성자들 모두가, 개인의 재산권에 대한 존중이 사회 계약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헌법에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리 보호를 보강하기 위해 중요한 수정조항을 덧붙였다. 게다가 미국 건국자들은 이러한 보호가 토지나 식별할 수 있는 자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유형이든 무형이든 상관없이, 재산에 내재된 모든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고 의도했다. 그들은 재산권이 “다른 모든 권리를 보호하는 권리”라고 믿었다. 전제적인 정부의 개입을 받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 이용하며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어떠한 자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미국인들에게도 재산권은 여전히 중요하다. 정부가 엄격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사유재산을 박탈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신이 창조하거나 구입하거나, 심지어 선물로 받은 물건을 소유할 권리는 표현이나 프라이버시 등 무형의 권리들과 더불어 물질적인 안정을 제공해준다. 경제적 권리를 위협받는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나 투표권이 축소된 사람들만큼이나 전제적인 정부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권리에 대해 말할 때 법학자들은 종종 ‘권리 꾸러미(bundle of rights)’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모든 권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재산권이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된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유라는 것은 솔기 없는 벽걸이 융단과 같아 모든 권리 하나하나가 다른 권리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재산권에서도 진리이다.



공화국 초기에 가장 중요한 재산 형태였으며 가장 유형적인 재산이었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소유주가 그 토지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지니고 있다거나 소유주가 원하는 대로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무한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영국 보통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재산권의 전통에 따르면 거기에는 항상 제한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보통법은 ‘생활방해(nuisance)’ 원칙을 통해 토지 소유주가 이웃의 권리를 부당하게 방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토지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관습적으로 개인 소유의 개방된 토지에서의 사냥은 허가되었지만, 강이나 호수에 대해서는 소유주의 승낙이 필요했다. 사업 형태로서의 재산에도 규제가 있었다. 술집이나 선박 등은 영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크게 규제되었다. 정부가 개인의 재산에 대해 세금을 매기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세금이 정부의 공공 서비스를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세금은 개인에게서 재산을 빼앗는 일이었다. 아마도 개인 재산권에 가장 크게 간섭하는 형태는 ‘토지 수용권’일 것이다. 토지 수용권은 당국이 개인 소유 재산을 도로나 운하 건설 등 공공 목적을 위해 강제로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하도록 하는 권리이다.

재산권의 완전한 보호와 공적 목적을 위한 제한이라는 이분법을 생각할 때, 재산권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제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논쟁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산의 의미 자체도 변하게 되었다. (토지는 여전히 토지를 의미하지만 스톡옵션, 상표 보호,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따라서 미국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법원은 계속해서 달라지는 재산에 대한 헌법상의 의미를 해석해야 했다. 법원은 때로 재산권의 수호자가 되었으며, 법원의 판결은 경제적 자유를 보호하고 경쟁을 야기하며 개인 사업 체계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환영을 받았다. 법원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판결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간절한 개혁에 방해가 된다고 공격하면서 복지 국가 건설을 손상시킨다고 비난했다.

판사들이 재산권을 완전히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보수적인 법원과 규제나 소유권 이전 등의 형태로 재산에 대해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혁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논쟁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미국 역사에서 재산권의 진정한 의미를 놓칠 수 있다. 이러한 논쟁들 대부분은 사업과 관련된 재산 및 노동 계약에 관련된 것으로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여러모로 1870년대부터 1930년까지 미국의 산업 전환기에 전개된 싸움이었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기본적인 사안들이 결정되었다. 즉, 사업과 관련된 재산권은 일반인의 복지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면 제한되어야 하며, 재산 소유주 개인의 권리는 약자나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주 정부의 요구에 따라 종종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로서 재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전히 크다. 많은 비평가들이 주장했듯이, 이는 단순히 돈을 긁어모으고 부를 얻으려는 욕심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부분 집을 소유하는 일을 재산의 문제뿐만 아니라 꿈을 성취하고 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재산에 대한 집착은 미국 건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당시에 많은 정착자들은 금이 아니라 자신이 그 안에서 일하고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 땅을 찾아 신세계에 왔다.


J. 헥터 드 생 장 크레베퀘르, <미국 농부의 편지>(1782)

내 사유지에 들어선 순간, 번영럿뗍”퓐독립성 등 밝은 개념들이 마음을 자극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소중한 땅이여, 도대체 어떤 법의 관습이기에 토지 소유자에게 부를 가져다주게 되었는가? 땅을 소유할 수 없다면 미국인들은 어떻게 될까? 이 땅은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며, 우리는 이 땅에서 윤택함을 끌어내고, 가장 좋은 고기와 가장 좋은 음료수, 최고의 벌꿀이 이 특혜 받은 땅에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렇게 많은 토지를 소유해본 적이 없는 많은 유럽 인들이 이런 행복을 느끼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게 아니다. 내 아버지는 거친 토양을 상냥한 전답으로 바꾸어놓았고, 땅은 그 보답으로 우리에게 모든 권리를 마련해주었다. 땅을 바탕으로 시민으로서 우리의 지위, 자유, 힘이 성립되었다.


재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로 이주하게 되었다. 16세기경 영국 제도나 서유럽에는 소유주가 없는 자유로운 땅이 없었다. 개인이나 왕정의 형태인 정부가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장자상속법에 따라 토지는 장남에게 고스란히 넘겨졌고, 땅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힘도 없었다. 당시 영국의 정치 이론가 존 로크(1632~1704)의 글은 특히 중요하다. 로크의 사상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작성한 미국인들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립선언문은 정부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로크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헌법은 재산권에 대한 로크의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로크에게 사유재산은 자연법에서 비롯되며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재산을 소유할 권리는 왕이나 정부의 변덕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산권이 모든 권리의 기반이기 때문에 정부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재산권을 보호하는 일이다. 영국 정치 평론가 존 트렌차드는 1721년에 “모든 인간은 재산을 획득하고 보호하려는 열정에 활기를 띤다. 왜냐하면 재산이 독립성을 가장 잘 지탱해주기에 모든 사람이 재산을 열정적으로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재산권이 없다면 다른 권리가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 땅, 즉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만들었다. 재산을 소유하고 향유할 권리가 자연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정부는 재산과 재산에서 비롯된 권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메릴랜드의 독일계 정착자들의 글 중에서(1763)

토지법이 제정되어 모든 이가 안전하게 자신의 재산을 향유할 수 있으며,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최고 권력자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누구도 만족스러운 대가를 받지 않는 한 어떠한 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은 구세계보다 신세계에서 더욱더 힘을 발휘했다. 식민지 미국인들은 재산권의 중요성과 정부가 재산권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재 조치를 강조한 로크를 비롯해 17세기 및 18세기 영국 작가들의 글을 탐독했다. 미국 변호사들은 보통법이 재산 보호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고 믿었으며, 윌리엄 블랙스톤의 <영국 법률에 대한 논평>에서 이러한 견해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블랙스톤은 “사유재산법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를 침해하는 일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존 애덤스는 1790년에 “재산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유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러한 전통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뉴햄프셔 헌법(1784)

모든 인간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이며 내재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권리들 중에는 생명과 재산을 향유하고 방어할 수 있는 권리, 짧게 말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획득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헌법의 다른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재산권에 관련된 다양한 조항들 역시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라, 계몽주의의 지적 유산과 식민지의 특정한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 건국자들은 재산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이러한 견해를 관철시키고, 왕정에서 경험했던 정부의 약탈을 예방하기 위해 정부에 제한을 두었다. 독립선언문이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을 크게 외친 것과 달리 헌법은 더욱 보수적인 문서로 보일 수 있지만, 헌법 또한 이러한 권리들을 독립선언문에서만큼 보호하고 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혁명에서 투쟁했던 세대가 헌법도 비준했기 때문이다. 사실 1776년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 중 다수가 11년 후 헌법에 서명했다. 두 문서는 대조적인 문서가 아니라 보충적인 문서이다. 한 문서는 조지 3세가 영국인의 권리를 짓밟았기 때문에 미국이 저항한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다른 문서는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권리를 포함하여 이러한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국가의 틀을 세웠다.

헌법 작성자들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을 만들긴 했으나, 재산 소유에 대한 공적인 조건을 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연방 의회의 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기 위한 헌법상의 조건은 연령, 거주지, 시민권뿐이다. 당시에 많은 주에서는 투표 자격으로 재산을 두고 있었지만 학자들은 주 정부에서 별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투표 조건에 맞는 작은 규모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지방 관리들이 재산 규정을 무시했다. 더구나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잭슨 시대’라고 알려진 민주주의 개혁에 따라 투표권에 대한 재산 자격 조건은 철폐되었다.



재산에 대한 헌법의 조항들은 네 가지 일반적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재산권에 대한 국가 정부의 능력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연방 의회는 반역죄나 다른 범죄로 기소된 사람의 재산을 상속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정부가 압수하는 ‘권리박탈법’을 제정하지 않았다. 이는 영국에서 너무나 흔하게 자행되고 있던 권력 남용의 형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에서는 왕이 부유한 귀족들과 친척들의 재산을 모두 압수하기 위해 그들을 반역자로 몰기도 했으며, 의회는 권리박탈법을 남용해 특정 단체나 개인의 재산을 박탈하기도 했다.

또한 연방 의회는 한 주의 항구를 다른 주의 항구보다 우대할 수 없었다. 국가로 들어오는 상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부과했지만, 수출품에 대해서는 연방 의회가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차별적인 연방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한 주가 사업상의 손실이나 이익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규정들은 식민지 시대의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영국 의회는 무역법을 통해 한 식민지의 항구에 특혜를 주거나 일부 식민지에서만 생산되는 수출품에 세금을 부과하여 대영제국 시장에서 이러한 상품들이 손해를 보게 했었다.

헌법에 나타난 재산에 대한 두 번째 범주는 주州간 및 국가간 교역에서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연방 정부에 광범위한 세금 부과 권한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연합헌장 시기(1781~1788)에는 한 주 정부가 이웃 주에 대해 관세 장벽을 설치하거나 외국 선박 소유주에게 특정 항구를 이용하도록 뇌물을 주면서 다른 주 정부와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지방 사업에 혼란을 초래했다. 새로운 헌법 조항은 모든 농민들이나 제조업자들이 국내 및 해외 시장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고 차별적인 관세를 받지 않도록 보장해주었다.

헌법에 나타난 재산 보호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면은 연방 의회에 “제한된 시간 동안 작가나 발명가들에게 글과 발견 업적에 대한 독점권을 주어 과학과 유용한 예술의 진보를 장려”하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한 조항이다. 오늘날 ‘지적 재산’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권리는 사실 헌법 작성 몇 년 전에 시작되었다. 일단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자, 미국 작가들과 발명가들은 더 이상 왕이 미리 발행한 특허권이나 저작권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의 차를 비롯한 주요 상품에 대한 독점권을 반대했기 때문에 독점권에 대해 반감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작가와 발명가에게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대륙회의에서는 이러한 보호 권한이 없었기에 각 주에 보호권을 발행하도록 촉구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문학적 재산 보호는 분명 천재성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즉시 저작권법으로 이에 응했다. 1794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미국 최초의 일반 특허법인 예술 및 과학 장려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연방 체계에서는 한 주가 다른 주의 법(특허권과 저작권을 포함한)을 무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헌법을 통해 지적 재산 소유자들이 필요로 하는 보호를 국가 차원에서 제공해야 할 당위성이 대두되었다.

헌법에 나타난 재산에 대한 세 번째 범주는 주 정부에 대한 제한이었다. 1780년대 일부 주 입법부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채무자 구제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곧바로 통화 가치를 잃어버린 쓸모없는 화폐를 발행했다. 또한 앞에서 지적했듯이 다른 주나 다른 국가와의 수출입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다양한 주법州法 때문에 독립혁명 이후 경제 회복이 크게 둔화되었다. 주 정부는 화폐를 발행하거나 수출품이나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권리박탈권을 제정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아마도 사유재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보호는, 주 정부가 “계약 의무를 손상하는” 법률을 통과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계약은 채무자와 채권자, 토지 소유주와 차용자, 매입자와 판매자, 그리고 심지어 정부와 개인 간에도 성립될 수 있다. (대법원의 가장 유명한 판결 중 하나인 다트머스 대학 사건에서, 대법원은 사립대학에 대한 허가 또한 계약에 해당하므로 일단 허가권이 발행되면 주 정부가 이를 빼앗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새로운 공화국이 설립된 초기에 계약에 관련된 조항은 헌법 중 가장 많은 소송이 제기되었던 부분 중 하나로, 대법원은 이 부분에 한해서는 엄격하게 주 정부를 통제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표들은 이미 주 정부가 일으킨 문제들을 알고 있었고 다시는 주 정부에 그러한 권한을 주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제임스 매디슨, <연방주의자> 44호(1788)

권리박탈법, 소급입법, 계약 의무를 침해하는 법 등은 사회 계약의 첫 번째 원칙들과 건전한 입법 원칙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번 회의에서 개인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상의 보루를 추가한 점은 매우 적절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표들이 유권자들의 진실한 마음을 성실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면 나는 기만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공적인 조치에 대한 혼선을 방지하고 국민들의 검소함과 근면성을 북돋우며 사업이 제대로 운영되도록 하는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제대로 추론하고 있다.


헌법에 나타난 재산에 대한 네 번째 범주는 더 이상 미국에서 존재하지 않게 된 재산의 형태인 노예제도와 관련된 것이다. 1787년 당시 노예제도는 남부의 모든 식민지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이들 주에서 온 대표들은 새로운 헌법이 노예제도를 명백하게 보호하지 않으면 미합중국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합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회의 대표들은 남부의 요구에 굴복했다. 따라서 원래 작성된 헌법은 도망친 노예를 체포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할 권한은 연방 의회에 부여했지만 미국 내의 노예 거래에 대해 간섭할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노예제도 문제가 이후 얼마나 첨예한 대립을 유발하게 될지, 남부의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미합중국 자체를 거의 파괴시킨 남북전쟁을 유발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의 헌법에서는 모든 재산권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특정한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헌법 작성자들이 재산의 가치를 높이 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루트리지가 “재산은 확실히 사회의 주요한 목적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제도적 장치, 주 정부와 연방 정부에 가한 선택적인 제한과 연방 정부에 부여한 선택적인 권한 등에 의해 재산이 보호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재산권을 포함한 개인의 모든 자유는 정부를 어느 정도 제한함으로써 가장 잘 보전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그 결과로 원래 헌법에는 권리장전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헌법 비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권리장전 추가를 요구하는 강력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부 주에서는 국민들의 권리가 연방 의회로부터 침해받지 않도록 하는 특정한 보호 조항을 즉각적으로 채택한다면 헌법을 승인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제임스 매디슨은 “정부는 제도화되어야 하며 국민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 국민의 이익은 생명과 자유를 향유하고 재산을 획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고 획득할 권리 등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연방 의회의 동료들은 더욱 구체적인 조항을 원했고, 결국 권리장전에 재산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수정헌법 제5조에 두 가지 항목이 작성되었다. 바로 “누구라도 정당한 법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또한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공 이용의 목적으로 수용당하지 않는다”라는 부분이다.

수정헌법 제5조의 정당한 법 절차 조항은 마그나 카르타의 ‘토지법’에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으로, 아마도 헌법에 나타난 재산권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보호 조항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모든 정부가 법 절차를 따르기만 하면 개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수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은 정당한 법 절차 조항을 ‘절차상’의 권리(정부가 따라야 하는 수단)뿐만 아니라 ‘실체법상’의 권리(‘자연법’과 영국법 전통에 따른 정부 자체에 대한 제한)도 포함한다고 해석해왔다. 불행하게도 역사에는 국민의 부를 강탈하고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한 타락한 정부나 독재 정부의 예가 풍부하다. 그러한 정부들은 그저 법을 따르기만 했다고 주장한다. 정당한 법 절차는 본질적으로 연방 의회가 이러한 법을 통과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연방 의회가 이러한 법을 통과시키면 재산권을 포함하여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전체적인 헌법 구성이 살아 있도록 하는 정신 자체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헌법 제5조의 수용 조항은 재산에 대한 추가적이며 강력한 보호 장치이다. 모든 사람들은 정부가 도로나 운하, 혹은 연방 군 시설 등 공적인 필요에 의해 개인의 재산 일부를 점유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수정조항은 당시 유럽에서 관행으로 이루어지던 배상 없이 재산을 압수하는 행위를 거부한다.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땅이 이론적으로 왕에게 귀속되었으며 왕의 신하들이 영지를 소유했다. 봉건제도를 통해 정부가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신하들로부터 땅을 빼앗으면서도 배상할 필요가 없었다. 봉건제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정부가 배상 없이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는 개념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미국에서 헌법이 제정될 즈음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하며 살고 있는 토지를 완전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확고히 믿었다. 정부가 서부 개척지의 광활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일단 토지를 매각하면 그에 대한 모든 권한이 사라진다는 법령이 미국 식민지 동맹 의회 때 통과되었으며, 헌법 의회에서 다시 한번 통과되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부가 사유재산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앤토닌 스캘리아 판사, 놀랜 대 캘리포니아 해안위원회 사건(1987)

땅 소유주의 토지에 공공 지역권(자기 땅의 이용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땅을 설정 계약에 따라 지배 및 이용하는 권리-옮긴이)을 점유하는 일이 재산을 취하는 일이 아니라 “사용을 단순히 제한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토지가 가진 일반적인 의미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토지 수용권을 원칙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정부가 토지에 대해 정당한 금액을 지불해야만 그에 대한 양도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재산이 소유주의 사적인 사용을 위한 것이며 소유주 이외에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재산이라고 부르는 권리 꾸러미 속 가장 기본적인 막대기 중 하나”임을 계속해서 주장했습니다.


수정헌법 제5조 조항이 당시에는 연방 정부에만 적용되었지만, 이후 많은 주에서 이를 주 권리장전에 채택했다. 우리는 미국이 연방제도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연방제도에서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 모두 권한을 지니고 있다. 많은 주에서는 1791년 이전에도 권리장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정당한 법 절차 조항과 수용 조항의 의도나 표현에 맞게 헌법을 수정하거나 내용을 추가했다. 주 정부에서 이를 채택함으로써 재산 및 재산과 관련한 권리들이 국가의 헌법적이거나 법적인 구조 내에서 더욱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20세기까지 도로와 운하 등 경제적인 사업을 장려하는 데 앞장선 것은 연방 정부가 아니라 주 정부였다. 주 헌법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재산 소유자의 권리를 존중해가면서 진행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재산권의 본질과, 개인 재산 소유자나 사업가들의 권리와 산업화에 따른 좋지 않은 면들을 개선하기 위한 주 경찰력 사이의 균형에 대해 많은 논쟁이 발생했다. 특히 사법부 내에서는 많은 판사들이 재산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순수한 존 로크 식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조셉 스토리 판사, 윌킨슨 대 르랜드 사건(1829)

재산권이 아무런 제약 없이 전적으로 행정 기관의 의지에 맡겨져야 한다면 자유로운 정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정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가 신성하게 이행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보수적인 법원들은 주 입법부나 의회가 임금 및 근무시간법, 공장 안전 조치, 공공시설에 대한 요금 규정, 그리고 수입에 대한 누진세 등 현재 모든 주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개혁안을 통과시키려는 노력을 억제하게 되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이 발생하고 나서야 개혁의 힘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재산권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재산권이 개인의 자유라는 거대한 혁명 안에서 더 많은 상대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1937년부터 미국과 법원은 개인의 자유, 특히 수정헌법 제14조의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 조항의 의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 책 전체에서 다룬 표현, 즉 언론려쓩냅?자유와 피고인의 권리 등의 의미를 극적으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민권 혁명의 시작이었다. 재산권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일부 견해와는 달리, 재산의 보호는 미국인의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재산을 “다른 모든 권리를 보호하는 권리”로 바라보지 않지만, 재산은 아직도 미국인들이 국민의 권리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가들 사이에 오랫동안 미국에서는 왜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지 않았는가 하는 데 대해 논쟁이 있었다. 산업혁명은 서유럽이나 영국에서와 같이 미국에서도 강력했다. 미국의 탄광이나 공장 노동자들은 유럽의 노동자들과 똑같이 혹독한 환경에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은 힘을 모아 강력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 노동조합이 곧 좌익이라는 강력한 정치운동으로 자라난 반면, 미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19세기나 20세기 초반에 몇몇 사회주의 단체들이 있었지만 노동자의 요구나 정치적인 힘을 한데 모은 주도적인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은 19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백만 표밖에는 얻지 못했으며, 이후로는 심지어 대공황이 진행되고 있을 당시에도 그 수치에 이르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설명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와 재산 소유주의 경제 세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제로섬 게임이란 한 단체가 크게 성장하려면 다른 단체는 그만큼 손해를 본다는 의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재산 소유주가 되려면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재산을 빼앗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과거 경제 사상가들은 한 사람의 노동을 하나의 재산 형태로 보았으며, 사실 일반적인 노동자는 자신의 일, 노동 환경, 임금에 대해 거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재산 소유주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땅이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농민뿐만 아니라 직공이나 기술이 없는 노동자들도 재산 소유주가 되기를 원했다. 영국 식민지 당시부터 독립국가가 된 이후까지 3백 년 동안, 서부에는 엄청나게 넓은 땅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부는 아주 싼 가격에 공유지를 판매하거나 대륙횡단 철도를 구축하기 위해 철도회사에 토지를 공급함으로써 개인의 재산 소유를 정책적으로 선호했다. 철도회사들은 이 토지를 적절한 가격에 매각하면서 새로운 영토에 더 많은 정착자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많은 유럽 사회를 어렵게 만들었던 계급제도가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넓은 영토를 통제하는 세습 귀족도 없었고, 관습적으로 사회의 바닥으로 위치가 제한되어 있는 노동계급도 없었다. 많은 정착자들이 17세기와 18세기에 몇 년 동안 농장 인부나 가정부로 일하기로 합의하고 계약직 하인 신분으로 신세계에 와서, 계약이 만료된 후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계약 기간을 완료한 하인에게는 대개 자유롭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약간의 땅과 농기구, 종자 등이 주어졌다. 계약직 하인들이 모두 대규모 토지 소유주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대규모 토지 소유주가 되었고 다수는 자신들의 농장을 얻어 헥터 드 생 장 크레베퀘르가 1782년에 노래했던 특권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17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극적으로 변했지만 토지 소유의 꿈은 모든 미국인의 꿈으로 남아 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더욱 강력한 프롤레타리아가 되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사업자, 독립적인 장인, 직장인, 중산층,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자들처럼 주택과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1832)

미국보다 재산에 대한 사랑이 첨예하거나 민감한 나라는 없다. 또한 대다수 국민들이 재산 소유의 방식을 위협하는 원칙에 대해 이렇게 많은 반감을 표시한 나라도 없다.

미국의 독특한 상황은 토크빌이 묘사한 확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세기 말에 서부 개척지가 사라진 후에도 개인 주택을 건축할 수 있는 토지는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1950년대에 미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미국 풍경을 수놓고 있는, 블루컬러와 화이트컬러 직장인들의 단독 주택들이 길게 늘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원들은 국민들의 주택 구입이 용이하도록 설계된 정부 계획을 통해 이런 꿈을 양성하고 지원해주었다. 미국에서 재산은 번영하는 중산층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할 기반을 제공했다.



21세기 초반 우리는 익숙한 유형의 재산에서 이상한 가상의 재산까지 놀라운 ‘재산’ 목록과 마주하고 있다. 토지는 여전히 기본적인 재산으로 남아 있다. 사회, 정부, 특히 법원의 임무는, 전통적인 형태이든 혁명적인 새로운 형태이든 상관없이 재산이 어떤 식으로 취급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1950년대 인권운동은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재산권에 대한 견해 또한 바꾸어놓았다. 예를 하나 들자면, 현대의 주들에서는 사회복지 계획, 노인 연금, 실업자 혜택, 건강보험 등 시민들에게 유형의 혜택들을 다수 제공하고 있다. 이제 이것들은 시민들이 받을 자격이 있는 재산권의 형태로 간주되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민권운동과 환경운동은 전통적인 재산권 개념에 상당한 변화를 요구하는 법률을 만들도록 이끌었다. 레스토랑 소유주는 더 이상 손님을 차별할 수 없으며, 사업가나 사유재산 소유주들은 종종 환경보호계획에 따른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경제의 모든 부분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 규제는 소유주들이 자신의 사업이나 재산에 대해 완전히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래된 개념을 더욱더 잠식했다. 이에 대해 일부 논평가들은 재산권이 “법적인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비난한다.

약간의 일리가 있는 견해이긴 하지만 이는 재산권을 불가침의 권리로 여겼을 때에만 말이 되는 논평이다. 재산권이 불가침의 권리라는 규정은 미국법이나 영국법에 존재한 적이 없다. 심지어 재산을 다른 권리의 보증인으로 여겼던 존 로크마저도 재산의 사용에 상당한 제한이 있음을 인지했다. 미국 역사에서 ‘자유방임주의’ 개념으로 인해 재산권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시기가 있었던 반면, 재산권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지 않은 시기도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연방 법원은 주 정부의 합법적인 관심사와 이러한 관심사가 재산권을 어떻게 침해할 것인지에 대해 새롭게 균형을 맞추는 일을 주도해왔다.


존 폴 스티븐스 판사, 돌랜 대 티가드 시 사건(1994)

우리의 변화하는 세계에서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합니다. 바로 새로운 도시 개발이 홍수, 지진, 교통 체증, 환경 피해 등의 위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영향을 크게 미칠 것으로 의심된다면 재산 소유주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보다 이런 영향을 막을 수 있는 대중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시되어야 합니다. 정부가 토지 사용 허가에 부여한 조건이 합리적이고 공평하며 유용한 토지 사용 계획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됨을 입증할 수 있다면, 이러한 조건은 아주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조건이 재산의 경제적 가치를 불합리하게 손상했음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은 바로 주 정부에 도전하는 당사자의 어깨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다수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나타났으며, 경제 성장이 공기와 수질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보통법에서는 흐르는 물에 쓰레기를 버린 사람에게 물을 더럽힌 책임을 돌렸다. 오늘날에는 대기나 수질 오염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나 기업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왜냐하면 환경오염은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여러 방면에서 진행된 결과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화 비용을 책정할 수 있을 것인가? 거대한 환경 문제에 아주 미세한 영향을 미쳤을 뿐인 사유재산 소유주에게 그들의 전통적인 재산권을 제한하면서까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어야 하는가? 휴고 블랙 판사가 몇 년 전에 말했듯이, 수정헌법 제5조의 수용 조항은 “정부가 전체 대중이 져야 하는 부담을 일부 국민이 지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는 21세기 초반 논쟁의 일부일 뿐이다.

자유로운 사업 체계에는 많은 형태의 재산이 있고, 각 형태는 나름대로 특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0퍼센트 이상이 재산권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한다. 실체법상의 재산권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2백 년 이상 미국인에게 봉사해왔다. 이제 문제는 재산 소유주와 대중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러한 노력 저변에 깔려 있는 가치들을 새로운 환경, 새로운 형태의 재산에 적용하는 일이다.



| 참고 서적 |


* Bruce A. Ackerman, Private Property and the Constitu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7).

* James W. Ely, Jr., The Guardian of Every Other Right: A Constitutional History of Property Rights (2n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 Forrest McDonald, Novus Ordo Seclorum: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Constitution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85).

* Ellen Frankel Paul and Howard Dickman, eds., Liberty, Property, and the Foundations of the American Constitution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9).

* William B. Scott, In Pursuit of Happiness: American Conceptions of Property from the Seven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y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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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10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



과다한 보석금을 요구하거나, 과다한 벌금을 과하거나,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과하지 못한다.  - 수정헌법 제8조



일부 사람들은 권리장전에 범죄 혐의자들을 보호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된 것에 대해 의아해한다. 수정헌법 제4조는 수색이나 체포를 위해서는 영장이 필요하다는 사항을 명시하고 있으며, 제5조는 대배심의 기소를 요구하면서 법적 절차에서 피고인이 빠질 수 있는 이중적인 위험을 막고 있고, 스스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도록 보호하며, 정당한 법 절차를 확인하고 있다. 수정헌법 제6조는 배심원 판결과 혐의에 대해 내용을 알 권리, 증인과 대질 심문을 받을 권리,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수정헌법 제8조는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범죄에 비례하는 처벌이 이루어져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누구도 교통신호를 위반했다고 백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하거나, 위조 수표를 만들었다고 손이 잘리거나, 불법 도박을 했다고 사형을 선고받아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사회가 사법제도를 신뢰하고, 제도 자체가 정치적 억압의 수단으로 변칙 사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권리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이는 이상적인 상황이며, 비록 현실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리장전은 민주주의 사회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 역할을 하고 있다.


레위기, 24장 17~20절

다른 사람을 때려 숨지게 한 사람은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게 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것이다.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다.


구약성서의 이 구절과 코란에 있는 비슷한 구절은 직접적인 보복을 용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 구절들은 비례적으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범죄인은 범죄와 비례하여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눈에는 눈이어야지, 눈 대신 팔이나 다리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겐 상식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견해가 유럽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몇 세기가 걸렸다. 고대부터 18세기 계몽주의 시기까지 군주 정부는 끔찍한 고문과 느리고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죽음 등 범죄에 비해 심한 처벌을 자주 내렸다. 18세기에 영국에서는 2백 명 이상이 사형 선고를 받아 처형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좀도둑질, 나무 베기, 토끼우리에서 토끼를 훔친 죄 등 재산에 관계된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다.

현대적인 감각에서 보면 과거 사람들이 적용한 형벌은 매우 끔찍하다. 고대 아테네에서 BC 7세기 드라콘 법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2세기 후 로마 12표법은 다른 농부의 작물을 베거나, 위증을 하거나, 밤에 도시에서 소란을 피우는 등의 범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로마 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기, 바닷물에 익사시키기, 생매장, 때려죽이기, 뾰족한 것으로 찔러 죽이기 등 다양한 사형 집행 방식을 고안했다. 부모를 죽인 자는 개, 닭, 독사, 원숭이가 각각 한 마리씩 담긴 자루에 넣어져 물 속으로 던져졌다.

중세에는 종종 사형 집행과 고문이 병행되었으며, 영국 귀족들은 교수대와 익사용 구덩이를 갖고 있었다. 교수대나 익사 구덩이는 중범죄뿐만 아니라 경범죄에도 사용되었다. 반역죄의 경우 여성은 말뚝에 묶여 화형에 처해졌으며, 남성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죽기 전에 교수대에서 내려져 내장이 꺼내지고 사지를 절단당했다. 범죄를 자백하지 않는 경우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건을 가슴에 올려놓고 압력을 가하는 고문이 행해졌다. 사형집행인은 첫쨋날에 희생자에게 약간의 빵을 주고, 둘쨋날에는 썩은 물을 약간 주는 식으로 그 사람이 자백하거나 죽을 때까지 고문을 계속했다. 1531년에 왕은 끓여 죽이는 방법을 적절한 사형법으로 승인했다. 처형은 거의 대부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인기 있는 볼거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법을 위반하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었다.


웨일스 왕자, 데이비드 처형 명령(1283)

그는 자신을 기사로 만들어준 왕에게 반역했으므로 교수대로 끌려가야 하며, 하워든 성에서 신사 1명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고, 살인을 통해 그리스도 수난의 엄숙함을 더럽혔으므로 사지가 태워져야 하며, 많은 장소에서 왕의 죽음을 상상했기 때문에 나라 전체에 그의 사지가 뿌려져야 한다.

영국법은 처형과는 별도로 낙인찍기, 귀 자르기, 유형지로 추방 등 다양한 처벌법을 규정했다. 더구나 당국은 용의자를 심문하는 수단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기도 했다. 신세계 정착자들은 이런 영국식 규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는 인력이 부족해 경범죄에 대해서 사형 선고를 부과하는 일은 크게 줄었다. 토끼를 훔치는 등의 경미한 범죄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에는 인력이 너무 귀했다. 예를 들어 매사추세츠 주 청교도들은 어떤 형태의 절도에도 사형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매사추세츠 자유법령(1641)에서 “육체 처벌에 대해 우리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며 잔혹한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독립혁명 당시에는 대부분 식민지에서 방화, 해적 행위, 반역 행위, 살인, 남색, 도둑질, 강도질, 강간, 말 절도, 노예 봉기, 문서나 화폐 위조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으며, 교수형이 일반적인 처형 방법이었다. 일부 식민지의 범죄 조항은 이보다 엄격해 전체적으로 보면 경미한 수준의 특정한 범죄에 대해 사형이 내려질 수 있었지만, 판사나 배심원들은 가장 혐오스러운 범죄에 대해서만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인다.

채찍질, 물고문, 죄인을 공공장소의 기둥에 사슬로 묶어두는 처벌 등이 몇몇 식민지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더욱 심한 고문이나 처벌은 미국에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이는 잔혹함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부상하게 된 영국의 개혁운동을 반영하고 있다. 무엇이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인지에 대한 주요 논쟁이 독립혁명 당시에 이루어졌으며 헌법과 권리장전을 작성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 논쟁은 여러 면에서 사형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미리 보여주었다.

수정헌법 제8조는 1689년 영국 권리장전 제10조에 구체화된 금지 조항을 거의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영국 권리장전 조항은 1776년 조지 메이슨에 의해 버지니아 권리장전에 삽입되었으며, 1787년 미국 식민지연맹 의회에 의해 노스웨스트 법령(미국 의회가 미국 북서쪽 변경의 주민 정착과 정치적 통합 문제를 위해 적절한 절차를 마련한 법령-옮긴이)에 포함되었다. 헌법이 제정되고 있을 때 몇몇 주에서는 헌법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며 승인을 반대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비준 회의에 참석한 한 대표가 헌법이 처벌 방법에 대한 제한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론적으로 고문대와 교수대 사용이 법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지니아 주에서 온 패트릭 헨리는 고문이 이용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두 사람은 사실 더 넓은 범위의 권리장전이 헌법에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했으며, 영국 역사에 팽배한 잔혹 행위를 막을 만한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서굿 마셜 판사, 퍼맨 대 조지아 주 사건(1972)

영국의 권리장전에 있는 잔혹하고 이상한 처벌 금지 조항이 지나치거나 불법적인 처벌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혹은 야만적이고 좋지 않은 처벌 방법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두 가지 다라고 할 수 있는지에 상관없이, 우리의 국가 설립자들은 그 언어를 차용해 수정헌법 제8조에 포함시키면서 고문이나 기타 잔혹한 처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자 했습니다.

잔혹하고 이상한 처벌에 관한 논쟁은 사형에 대한 토론 또한 포함했다. 당시 미국에는 임마누엘 칸트를 비롯한 유럽 철학자들의 글이 잘 알려져 있었으며, 성경 속의 개념인 ‘비례성(proportionality)’에 대해 칸트가 다시 강조했던 말이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사형제도에 반대한 이탈리아의 체사레 베카리아(18세기 이탈리아 계몽사상가-옮긴이) 등 개혁가의 글 또한 많이 알려져 있었다. 베카리아는 법이 매우 엄격하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인에게 “하나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추가 범죄를 저지르도록” 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닭 절도와 같은 단순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면 닭 절도범은 그러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미국에는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일부에서는 새로운 공화국의 성공을 시민들의 미덕에 의존해야지 혹독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처벌을 전제정치의 증표로 간주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사람 중 한 명인 벤저민 러시는 “사형은 군주 정부의 친자식”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알렉산더 해밀턴과 같은 보수주의자도 “잔인함이라는 개념은 혐오감을 조성”하며, 사형 선고는 공화국에 어울리는 가치와 행동을 폄훼한다고 믿었다.

1789년 미국 헌법이 제정된 후 처음 모인 연방 의회에서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 금지에 대한 논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뉴햄프셔 주의 새뮤얼 리버모어만이 긴 연설을 했을 뿐이었다.


새뮤얼 리버모어 대표,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에 대해(1789)

이 조항은 상당한 인간애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저는 여기에 반대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조항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기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이 가해져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교수형을 행할 필요가 있으며, 악당에게 채찍질이 필요할 때도 있고 귀를 잘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잔인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형벌을 가하지 못합니까? 악을 교정하고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는 더욱 너그러운 방법이 발명된다면, 입법부가 이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현명할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까지 우리가 이런 종류의 조항을 선언함으로써, 필요한 법률을 만들게 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리버모어의 논평은 토론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용된 부분에서 그는 인도적인 처벌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처벌이 효과적인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가 변하면서 윤리적인 규범도 변한다는 생각을 포착했다. 어떤 시대에는 말로 끌어 사지를 절단하는 처벌이 반역죄에 대한 적절한 처벌로 간주되었으며, 그 처벌 방법이 잔인하고 끔찍한 고통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정부에 대한 가장 심각한 범죄인 반역죄에 대한 적절한 보복이라고 여겼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훨씬 들어맞았다. 18세기에 리버모어는 미국 입법부가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적당한 수단을 이용할 권리를 지녀야 하지만, 그래도 입법부가 비인간적인 실형을 선고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 소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다수는 정부에 어느 정도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건국 세대의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권리장전 작성자들은 정부를 깊이 신뢰하지 않았으며, 당국이 제한받지 않을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권리장전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에 관련하여 대법원에서 내린 판결문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미국에서 고문은 공인된 처벌 방법이 아니었으며, 고문에 대한 대법원의 몇 가지 논평은 자백을 받기 위해 육체적 학대를 한 지방 정부와 관련된 것이었다. 과다한 보석금이나 벌금에 관한 사례는 자주 발생했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선이 그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법원은 제1심 법정에 맡겨져야 할 문제임을 시사했으며, 불만이 있는 경우 피고인은 항소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와 법원에서 진행되어온 논쟁은 사형이 수정헌법 제8조를 위반하고 있기에 금지되어야 하는가였다. 대법원이 다룬 첫 번째 소송사건은 사형 자체가 아니라 사형 방법에 관련된 것이었다. 1878년 대법원은 죄수들을 처형하는 방법으로 총살 분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인정했으며 10여 년 후에는 인도적인 처형 수단으로 도입된 전기의자의 사용을 승인했다. 1세기가 지난 지금 대법원은 현재의 ‘인도적인’ 처형 방법인 독극물 주사를 인정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대법원은 사형제도가 존속되는 한, 주 정부가 사형 집행 방법을 결정하도록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고문이나 기타 잔혹하고 이상한 방법이 동원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대법원은 1970년대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사형제도는 지금도 공공정책 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대법원이 이 논쟁에 관여할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 20년 동안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연방 범죄의 수가 줄어들었으며, 일부 주에서는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그후 사형제도 폐지운동은 주춤하다가 1960년대 초반에 다시 한번 전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러한 사형제도 폐지운동은 다른 나라에서 거둔 성공에 의해 부분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개혁가들은 1948년에 세계인권선언문을 작성하면서 사형제도 폐지가 문명국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와 같은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다른 국가들에서는 사형제도에 어느 정도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많은 나라에서 청소년, 임산부, 고령자 등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형 선고 대상 범죄를 줄이는 내용의 다국적 합의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하려는 목적으로 국제적인 협약이 1983년에 1건, 6년 후에 2건, 총 3건이 작성되었다. 50개국 이상이 이러한 의정서에 서명했다.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에서 나치 인물들 다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국제법은 전쟁 범죄나 비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형 선고를 배제하고 있다. 최근에 독재 정부의 멍에를 벗은 많은 국가들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가 통과시킨 첫 번째 법령 중 하나는 사형제도 폐지이다. 왜냐하면 과거 독재 정부에서 처형이 국민을 억압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러한 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법원이 사형을 본질적으로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8조에 반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형 선고에 대해서는 연방 범죄의 경우 연방 의회가, 각 주의 법을 어긴 범죄에 대해서는 50개 주와 워싱턴 D.C.가 판단을 내리도록 되어 있다. 전체 주 중 4분의 3은 아직도 사형을 선고하며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연방제도의 이러한 점은, 국회가 국가 전체를 총괄하는 형법 체계를 지시하는 국가들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미국의 연방제도에 따르면 각 주는 나름대로의 형법 체계를 구축할 자유가 있으며, 각 주에 대한 유일한 제한은 각 주 형법의 위헌 여부이다.

미국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형제도의 적합성에 대해 미국민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한쪽에서는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사형제도가 좋은 방법이며 더욱 자주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논쟁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인들 다수는 아마도 이 양극단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살인 행위에 대해 사형을 내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사형제도가 없다면 끔찍한 범죄를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전 플로리다 주 법무장관인 로버트 L. 쉐빈의 말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선과 자비를 베푸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사형제도는 비극적입니다. 악과 타락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사형제도는 필요합니다.”



사형제도 반대론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든 죽게 만드는 일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죄인을 투옥시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만 비록 죄인이라 해도 모든 생명은 신성하다고 주장한다. 일부 사람들이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형의 비도덕성 때문이다.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결백한 사람이 처형당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사형이 삶을 종결시킨다는 점이다. 5세기 전 영국의 대법원장이었던 존 포테스큐는 “20명의 죄인이 사형을 면하게 되는 것이, 죄 없는 1명이 사형당하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고 주장했다. 한 사람이 잘못되어 유죄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간 경우, 실수가 발견되면 그 사람은 석방될 수 있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을 보상받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으니 나머지 생애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사형을 당한다면 실수를 만회할 방법이 없어진다.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한 가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처벌 방법으로서 사형이 무의미하다는 점이다. 사형제도 반대자들은, 사형을 선고받을 만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면서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형제도에는 중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전문 살인범은 범행을 저지른 후 도망칠 수 있다고 믿으며 처벌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한 여성이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될 경우, 그녀는 화가 나서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그녀는 감정에 휩싸여 자신의 행동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사형제도 반대자들에 따르면 사형제도가 기여하는 유일한 목적은 복수이다. 즉, 용인된 사회적 행동의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복수이다. 사형제도 반대자들은 그들이 처벌받아야 한다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문명화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본적으로 복수라고 할 수 있는 처벌로 누군가를 처형한다면 야만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들은 “복수는 나의 것,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종교적인 이유로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네 번째 이유는 사형이 공평한 방법으로 선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심원들은 여성이 사형을 받을 만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 사형 선고를 꺼린다. 민권운동가들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이나 다른 소수민족 피고인의 범죄의 경우 백인 피고인에 비해 비슷한 범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형제도 찬성자들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처벌은 범죄에 비례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누군가 고의적으로 한 생명을 앗아간다면 사형은 사회가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 말한다. 피해자가 죽었는데 살인자가 감옥에 버젓이 살아 있도록 하는 일은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사형만이 대중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아주 끔찍한 범죄가 존재한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살인자가 피해자를 고문하거나 강간하거나 범죄가 특히 끔찍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 범죄자에게는 도덕성을 증명할 만한 자격이 전혀 없게 된다. 우리가 공수병에 걸린 동물을 없애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일부 범죄인들 또한 영구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고 사형제도 찬성자들은 말한다.

세 번째로, 사형제도 찬성자들은 사형제도가 범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사형제도가 전문 살인범이나 질투심 등으로 순간적으로 눈이 먼 사람을 억제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경범죄인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르지는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강도들이 총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총기를 들지 않고 강도짓을 한 사람이 잡힐 경우 무장 강도에 비해 처벌이 훨씬 가벼우며, 총이 없다면 범죄자들이 집주인이나 경찰에게 총기를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는 사형제도가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네 번째 주장은 복수와 관계된 것이다.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사형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살인자가 죄과를 치르는지 알 자격이 있으며 그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것처럼 그 또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주 정부가 복수의 필요성을 만족시킬 만한 처벌을 내놓지 못한다면, 일부 사람들이 직접 법을 집행하려 할 것이며 미국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보호해야 하는 자경自警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사형제도 찬성자들이 사형제도 반대자들에 대해 가장 대답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이 실수에 관한 주장이다. 사형제도 찬성자들은 무고한 한 사람이 처형을 당하느니 20명의 죄인이 석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포테스큐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실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들은 체계가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실수는 항상 일어나기 마련이며, 죄인 20명을 석방하는 일 자체가 사회에 대한 범죄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따금씩 잘못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긴 하지만, 사회에 대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는 것이다.



다양한 주 형법 체계, 변덕스러운 실형 선고, 소수민족이 관련된 사건에서 비례적으로 부과되지 않은 사형 선고 등으로 인해 마침내 대법원이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1960년대 대법원에 상정된 상고심 다수는 사법 체계의 불완전성을 보여주었다. 대법원이 사형제도의 합헌성이라는 핵심 문제를 다룰 필요도 없이 유죄 판결이 번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판사들은 마침내 핵심 문제를 다루기로 결정했다.


판결문, 퍼먼 대 조지아 주 사건(1972)

대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실행한 점은 수정헌법 제8조와 제14조를 침해한 잔혹하고 이상한 처벌이라고 선고한다. 따라서 사형 선고를 고수하는 한 각 사건의 판결은 무효가 되며, 사건들은 추가 심의를 거치도록 돌려보내진다.

1972년 6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간발의 차이로 미국 전역에 있는 약 6백 명의 수감자들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무효화했다. 퍼먼 대 조지아 주 사건에서 판사 과반수가 당시의 사형제도가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고 선고했다. 사형 반대론자들은 기뻐했지만 그들은 대법원의 판결을 잘못 이해했다. 판사 과반수는 사형제도 자체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형제도가 적용되었던 법적 방법이 비이성적이며 임의적이어서 수정헌법 제8조에 위반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사형제도 반대자들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이전에 사형 선고를 내렸던 37개 주 모두 퍼먼 판결문이 담고 있는 법적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주 법을 다시 작성했다. 1976년, 대법원은 만족스러운 기준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새로운 주 법률을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렉 대 조지아 주 사건에서 수정된 조지아 주 사형 관련 법령을 승인하게 되었다. 조지아 주의 새로운 법에 따르면, 배심 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일단 결정하고 피고인이 유죄임이 판명되면 처벌에 대해서는 따로 투표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벤치 재판에서 배심원단과 판사는 사형 선고에 대해 죄과를 덜 것인지 아니면 더할 것인지 고려해야 하며, 주 대법원은 지나치거나 비례적이지 않은 처벌을 예방하기 위해 모든 사형 선고를 자동적으로 검토한다.


포터 스튜어트 판사렁瑛決?파월 판사려?폴 스티븐스 판사,  그렉 대 조지아 주 사건(1976)

이번 사건들은 형벌의 경우 품위 기준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형벌은 또한 수정헌법 제8조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개념인 ‘인간의 존엄성’과 일치해야 합니다... 이는 최소한 처벌이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구체적(특정 범죄를 저지른 특정 피고인에게 적용될 형벌로 사형 선고의 적합성)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살인에 대한 처벌로 사형 선고가 내려져야 하는지)인 처벌의 형태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지는 경우 ‘지나친 처벌’에 대한 조사는 두 가지 면을 다루어야 합니다. 첫째, 처벌이 실행될 때 불필요하고도 무자비한 고통을 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전체적으로 범죄의 심각성과 비례하여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법원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현대적 개념에 따른 사형제도 폐지 주장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입법부는 보복론이나 범죄 예방론에 비추어 사형 선고를 합리화할 수 있으며 사법 당국은 명시된 법적 기준에 따라 사형을 명령할 수 있다. 대법원의 판사 2명, 즉 윌리엄 브레넌 판사와 서굿 마셜 판사만이 사형 자체가 위헌이라고 믿었다.

매우 다양한 사형제도 계획, 임의적이고 종종 차별적이기도 한 사형 집행, 적용할 만한 명백한 헌법상의 기준 부족 등으로 인해 대법원이 1972년에 내린 판결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그렇지만 다수는 사형 자체가 위헌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단지 주 정부가 가장 극단적인 형벌인 사형을 부과하는 방식이 위헌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수정된 법령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제 사형제도를 선고하는 모든 주에서 필요하게 된 주 대법원의 자동검토제도는 사법 적용이 균등하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편견에 의한 판결이 아닌지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에 내려진 판결 대부분에서 대법원은 원래 반대했던 불확실성이라는 요소를 다시 도입했다. 대법원은 또한 사형 선고를 부과하는 데 있어 틀에 박힌 접근 방법을 피하려 노력했다. 워렌 버거 대법원장은 1970년대에 이루어진 몇 가지 사형 관련 사건에서 각각의 사형 선고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처벌을 개별화시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그의 주장은 판사나 배심원이 죄과를 덜어줄 것인지 아니면 더할 것인지 다양한 조건을 꼼꼼히 따져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주 정부가 이러한 과정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형 선고에 대한 결정은 대부분 주관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배심원이 특별한 살인 사건에 대해 끔찍하다고 느낀다면 배심원은 사형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배심원이 특정 피고인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면, 사형을 피할 수 있도록 죄과를 덜어줄 수 있는 상황을 찾아야 한다.



다른 권리에 대한 논의에서도 보았듯이, 시간에 따라 환경이 달라지면 헌법적인 의미 또한 변한다. 한 시대에 적절해 보이던 것도 다른 시대에는 대체적으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미국 사법 체계가 헌법을 해석할 때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단어에 묶이고 어느 정도는 헌법 작성자의 의도에 묶여 있지만, 법원들은 헌법의 의미를 현대 사회에 맞게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역사적인 증거에 따르면 18세기 말에 사형 선고의 효능에 대해 약간의 유보가 있기는 했지만 미국인과 유럽 인 대부분이 사형을 특정 범죄 행위에 대해 적절한 처벌로 받아들였던 것은 확실하다. 대체적으로 현재 미국인 대부분도 아직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10여 년 전에 대법원은 사형에 대한 대중의 태도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변화가 시작되었을 수도 있지만 얼마나 변화할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중의 태도 변화를 유발하는 요인 중 하나는, 대법원이 결정한 지침에 따라 주 항소법원이 사형 선고가 내려진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소수민족 피고인들에게 비례적이지 않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요인은 유죄 판결을 잘못 내린 사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피고인이 법원이 지정한, 형사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변호사로부터 부적절한 법적 도움을 받게 된 사례가 많았다. 최근에 일부 법과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자금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변호사 팀이 재판 전에 실행했어야 하는 조사 과정에 대해 다시 연구한 결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무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이러한 연구 결과 자체가 사법 체계의 신빙성에 의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기술적 발전은 사법 체계의 신빙성에 의혹을 제기하게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DNA 검사가 미국 전역에서 수십 명에 대한 사형 선고를 번복하게 만들었다. 강간을 당한 피해자에게서 채취한 물리적인 증거는 강간범을 잡는 데 거의 확실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강간 및 살인 혐의로 사형에 직면한 몇 명이 재판 당시에는 불가능했던 DNA 검사 결과 강간범이 아님이 판명되어 석방된 사례가 있다. 강간 사건이 아닌 경우에 과거 혈액 샘플 검사는 피고인의 코트에 묻어 있는 혈액이 피해자의 것과 동일한지 여부만 식별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검사는 그 혈액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다. 다시 한번 새로운 기술의 이용으로 유죄 판결이 번복되었다.

이런 증거는 사형제도 폐지론자의 주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 지지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형사 사법제도의 핵심에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실수가 거의 없는지, 그리고 모든 이가 법 앞에 공평하게 심판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많은 미국인들에게 사형제도는 문제가 있으며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이 자리 잡게 되었다.


프랭크 머피 판사, 미발표 반대문 원고(1946)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 말고는 무엇이 잔혹하고 이상한지 결정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처벌이 내일은 잔인한 처벌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인 사항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정은 반드시 모자이크와 같은 우리의 믿음, 배경,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2000년, 보수적인 일리노이 주 주지사 조지 라이언은 일리노이 주에서 사형 집행을 금지하도록 요구하면서 전 미국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이전까지 오류가 너무나 많았으며,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졌는지, 변호사의 적절한 지원이 있었는지, 모든 증거가 고려되었는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다른 주의 주지사들과 주 입법부 임원들에게 각 주의 사형제도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게 했다.

대법원은 본질적으로 사형제도를 공격하지는 않지만 미성년자(성인으로 취급될 경우 사형 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나 정신 지체 장애자 같은 사람들에게 사형제도를 적용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몇 가지 사례에 대해 심리를 갖기로 합의했다. 2002년 6월, 대법원은 판사들이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을 들었으며 적어도 몇 명은 사형제도 적용의 공평성에 대해 커지고 있는 우려에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판결을 내렸다. 한 사건에서는 대법원 판사 과반수가 정신 지체 장애자를 처형하는 일이 실제로 잔혹하고 이상한 처벌에 해당한다는 일반 대중의 여론에 동의했다. 자신의 범죄나 처벌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처벌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은 미국 보통법의 주요 특성이었다. 피고인이 정신적으로 비정상일 경우 그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범죄학적으로 비정상인 사람의 경우 처형되는 게 아니라 보호 시설에 수용하도록 하고 있다.

또 다른 사건에서 대법원은 판사들이 자유 의사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크게 제한했으며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배심원에게 좀더 많이 부여했다. 이러한 결정은 대중적인 심리에 따라 판결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만, 앤토닌 스캘리아 판사의 말대로 미국 형사 사법 체계의 중심에 있는 배심원의 권한과 책임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이러한 재평가가 결국 사형제도 폐지를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처벌의 유형 중 가장 심한 형태인 사형이 더욱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적용되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초 미국에서는 사형제도가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8조에 위배된다고 보지 않는다. 한편 잘못 적용된다면 이는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다.



| 참고 서적 |


* Larry Charles Berkson, The Concept of Cruel and Unusual Punishment (Lexington, Mass.: D.C. Heath & Company, 1975).

* Charles L. Black, Jr., Capital Punishment: The Inevitability of Caprice and Mistake (2nd ed., New York: W.W. Norton, 1981).

* Walter Burns, For Capital Punishment: Crime and the Morality of the Death Penalty (New York: Basic Books, 1979).

* John Laurence, A History of Capital Punishment (New York: The Citadel Press, 1960).

* Michael Meltsner, Cruel and Unusual: The Supreme Court and Capital Punishment (New York: Random House, 1973).

* Louis P. Pojman and Jeffrey Reiman, The Death Penalty - For and Against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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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11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



어떤 주도... 그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 수정헌법 제14조



지난 반세기 동안 모든 국민의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요구한 헌법상의 명령은 미국의 유색인종, 여성, 기타 단체 사람들의 동등한 법적 권리를 확보해온 위대한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념으로 보면 법에 의한 평등한 보호는 미국 헌법에서 가장 귀중한 표현 중 하나이며, 실행 면에서 보면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이다. 평등 보호가 없었더라면 미국이 지난 50년 동안 이룩한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많은 미국인들이 여전히 자신들을 투표나 모든 권리를 향유할 수 없는 이등 시민으로 여기는 제도화된 편견에 피해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수정헌법 제14조는 1868년에 헌법의 일부가 되긴 했지만, ‘평등한 보호’의 의미에 대한 광범위한 해석이 꽃을 피우기까지는 약 90년이 더 걸렸다.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적었을 때, 그의 말은 사회적 혹은 경제적 평등주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와 미국 건국자들은 사람이 능력과 미덕에 있어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회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획일화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개인에게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회의 평등이 가능하려면 모든 인간(당시에는 모든 남성)은 동일한 기준에 의해 법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미국 건국자들은 비록 백인에 대한 법과 노예에 대한 법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긴 했지만, 부자를 위한 법과 가난한 사람을 위한 법이 따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 세대 후에 앤드루 잭슨의 민주당원들이 평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 또한 법률에 의한 동등한 대우에 기초한, 기회의 평등을 의미했다.

흥미로운 일은 원래 헌법이나 권리장전에 동등한 기회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남북전쟁 이후에도 기회의 평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들에게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 주가 해방된 노예들을 동등하게 대우할 의도가 없음이 명백해지자 연방 의회는 수정헌법 제14조를 만들어 통과시켰다. 수정헌법 제14조는, 주 정부가 시민들에 대해 정당한 법 절차뿐만 아니라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스탠리 매튜 판사, 익 오 대 홉킨스 사건(1886)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의 보장은 평등한 법률을 보호한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평등한 보호’의 의미는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수정헌법 제14조의 작성자가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 구절은 어떻게 판단하든 상식적으로 모든 법률이 모든 사람에게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법률이 개인이나 집단을 어떤 식으로든지 차별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개념은 어리석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 운전면허증 심사에서 이루어지는 시력 검사는 명백하게 맹인이나 시각 장애자들에겐 차별이지만, 이는 적절한 형태의 구별법이다.

앤서니 케네디 판사, 로머 대 에반스 사건(1996)

누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수정헌법 제14조의 전제 조건은 대부분의 입법부가 한 가지 혹은 다른 목적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다양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불이익을 유발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필요성과 양립해야 합니다... 대법원은 한 가지 법률이 기본적인 권리에 부담을 가하거나 특정 계급(상처받기 쉬운 시민 집단)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한, 합법적인 목적과 합리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한 행정적인 분류를 지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원칙과 현실에 균형을 맞추려 노력해왔습니다.


모든 법률은 일정한 형식의 분류법에 의존하고 있다. 많은 경우 법률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며, 같은 법률하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취급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공무원의 연금 계획에 따르면 직급, 근무 기간, 월급에 따라 연금의 액수가 다를 수 있다. 형사법과 민사법 모두 여러 상황에 기초하여 차별화된 처벌을 내리고 있다.

예를 들어 두 여성이 살인이라는 동일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더라도 정황에 따라 크게 다른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법이 노골적으로 연령, 키, 성별, 인종, 종교 등의 특성에 기초하여 국민들을 차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법이 상황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 또한 원하지 않는다.

남북전쟁 후 남부 재건을 위한 청사진에서 수정헌법 제14조가 유래했다는 사실이 몇 년 동안 법원에서 이 조항을 해석하는 데 좋은 정보로 작용했다. 인종에 대한 언급을 담지 않은 평범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제14조를 제안했던 연방 의회가 과거에 노예였던 사람들이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려는 의도를 지녔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헌법이 색맹이라는 할랜 판사의 유명한 말은 제14조의 의도를 완벽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존 마셜 할랜 판사,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1896)

헌법에 기초하여 법률의 눈으로 보면 이 나라에는 우월하고 주도적인 시민의 지배 계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카스트 제도가 없습니다. 우리의 헌법은 색맹이어서 시민 사이의 계급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또한 이를 용인하지도 않습니다.


할랜 판사의 말은 과거 노예였던 사람들과 그 자식들의 실제 생활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상황을 표현했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는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헌법에 자신들의 고상한 감수성을 포함시킨 후 경제적 팽창과 산업적 성장의 시기에 돌입했고, 고질적인 인종 차별 문제를 남부가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방치했다. 그 결과로 ‘짐 크로우(Jim Crow)’로 알려진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에 대한 제도화된 차별이 60년 이상 지속되었다. ‘짐 크로우’라는 말은 당시 ‘민스트럴 쇼’(백인이 흑인으로 분장하고 흑인의 언어, 행동, 생활 등을 흉내 내는 쇼-옮긴이)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의 표현으로 민스트럴에서는 백인 가수나 배우가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흉내를 내곤 했다. 이후 이 표현은 남부에 퍼지게 되었고 인종 차별을 상징하게 되었다.

결국 주 법률과 지방 법률에 따른 백인과 흑인의 법적 분리를 나타내는 인종 분리는 평등한 보호 조항에 문제가 될 수 있었으나 이 조항은 실제로 헌법 용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법원은 일부 극단적인 인종 차별 사례를 제외하고는 인종 관련 문제에 이 조항을 적용하려 하지 않았다. 법원은 또한 수정헌법 제14조 전체가 제한된 목적을 지녔다고 믿으며 다른 경우에도 이를 적용하려 하지 않았다. 1927년에 올리버 웬델 홈즈는 평등한 보호 조항이 “헌법 논쟁의 마지막 부분”이라며 전체적으로 사법 체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조항으로 여겼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아이러니한 사건을 통해 이 조항에 새 생명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유색 인종에 대한 명백한 인종 차별과 관련된 사건이 아니라 닭 도둑이 자금 횡령 등 좀더 고상해 보이는 절도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에 비해 더욱 가혹한 형벌, 즉 불임 수술 명령을 받은 사건이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판사는 부유한 자금 횡령자를 제외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엄격한 법률이 적용되는 것이 공평한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명백하게 답은 ‘아니오’였다. 사회적 계급에 따른 형벌의 불일치는 평등한 보호라는 전제 조건을 위반한 일이라고 더글러스 판사는 주장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등한 보호 조항을 위반하여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한 법률에 대해 법원에서 엄격한 사법 심사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전쟁 이후 바로 시작될 위대한 민권운동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연방 정부가 경제에 크게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오래된 관념은 지워지게 되었다. 연방 정부는 1930년대에 무너진 경제 여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했으며, 1940년대에는 전쟁 시기의 미국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새로운 세대의 변호사와 민권운동가들이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해 정부, 특히 법원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법원이 예비선거에서 흑인을 제외시켰던 사건에 위헌 판결을 내렸던 일부 사례로부터 용기를 얻었으며, 한 사건뿐만 아니라 여러 사례에서 사용된 공식인 “한 인종 집단의 민권을 축소시키는 모든 법적 제재는 즉시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주장으로부터도 힘을 얻었다.

195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얼 워렌을 미국의 대법원장으로 임명했을 때에는, 소위 ‘평등주의 혁명’의 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워렌과 대법원의 다른 임원들은 제퍼슨과 미국 건국자들만큼이나 재능과 근면에서 비롯된 차별을 없애는 데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법률의 불평등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로 발생한 인위적 장애물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원칙을 가장 잘 보여준 판결은 두말 할 것도 없이 20세기에 대법원에서 다룬 가장 중요한 사건인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1954)이다. 이 소송이 이루어지기 전 10여 년 동안, 대법원은 많은 지역에서 백인과 흑인을 법적으로 분리하도록 만든 19세기 말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1896)에 대한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종 차별을 천천히 무너뜨려왔다. 브라운 사건에서 대법원은 직접적으로 인종 분리 문제를 다루었으며 인종 분리 관행은 평등한 보호라는 헌법적 명령을 위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얼 워렌 대법원장,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1954)

공립학교에서 인종에 기초하여 학생들을 분리하는 일은 물리적인 시설이나 다른 ‘유형적’ 요소들이 동등하다고 할지라도 소수 집단의 아이들에게서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공교육 부문에서 ‘분리평등정책’ 원칙이 발을 붙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내재적으로 평등하지 못한 시설입니다... 이것은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워렌 대법원장이 “분리된 교육 시설은 내재적으로 평등하지 못한 시설”이라고 발표했을 때, 그의 말은 인종 분리가 어디에서나 항상 ‘평등한 보호’라는 헌법상의 명령을 침해한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실 대법원은 1868년 이후 인종 차별이 위헌이라고 주장해왔지만 플레시 사건과 같은 소송에서 올바른 판결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워렌이 실제로 의미한 바는 그 이상이었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평등한 보호 조항의 해석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헌법적인 의미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한다. 19세기 초반에 존 마셜 대법원장은 미국인에게 헌법이 “인간사의 다양한 위기 상황에 적용되기 위해” 의도되었음을 기억하도록 가르쳤다. ‘살아 있는 헌법’이라는 이와 같은 개념은 모든 학자나 판사들이 수용하지는 않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평등한 보호 조항의 역사를 보면 이 조항의 적용과 의미조차도 시간에 따라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케네스 L. 카스트, <미국에 속하기:평등한 시민권과 헌법>(1989)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은 미국 시민 문화에 한 가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변화를 유발하기도 했다. 브라운 판결은 대법원이 20세기에 내린 판결 중 가장 중요한 판결이었다. 오늘날 이 판결은 학교 혹은 인종 차별에 대한 판결 이상을 의미한다. 브라운 판결은 헌법이 카스트 제도를 금지한다는 원칙을 보여주는 주된 권위의 상징이다.


브라운 판결 이후 미국에서 인종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으려는 새로운 노력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민권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63년 8월, 국민 20만 명은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에 모여서 마틴 루터 킹의 시적인 연설을 들었다. 킹 목사는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통해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이들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이들의 자식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킹 목사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평등한 보호에 대해 제퍼슨이나 잭슨과 별다르지 않은 해석을 내렸으며, 그들은 평등한 보호를 다른 국민에게도 확장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피부색, 성별, 신앙이 아니라 개인적인 특성, 재능, 미덕에 따라 대우받기를 바랐다. 케네디 대통령이 제안하고 린든 베인스 존슨 대통령이 서명했던 1964년 민권법은 똑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다르지만 법률에 의해 모두 똑같이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1964년 민권법이나 민권운동 전체뿐만 아니라 브라운 사건을 비롯한 기타 사례는 본질적으로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가 없으면 소수에 대한 진정한 시민권이 존재할 수 없으며, 진정한 시민권이 없다면 제한된 민주주의일 뿐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일부에서 주장하듯, 민주주의가 권리를 가능하게 만들고 개인의 권리는 민주주의가 운영되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등한 보호 조항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핵심에는 인종, 성별, 종교에 상관없이 개인은 교체 가능한 톱니가 아니라, 각자 법 앞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마땅히 차별 없는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개인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존 F. 케네디, 1963년 6월 11일 민권에 대한 대국민 연설

피부색과 상관없이 미국의 학생들은 누구나 군대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도 어떤 공립 교육기관이든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미국의 소비자들은 거리에 나가 시위할 필요 없이 호텔, 레스토랑, 극장, 소매점 등 공공시설에서 동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피부색과 상관없이 미국의 시민들은 간섭이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선거에 등록하고 투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짧게 말해서 모든 미국인은 대우받고자 하는 대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대우받기를 원하는 만큼 말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브라운 판결과 민권운동의 중요한 부산물은 다른 집단에서도 평등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그들 중 가장 큰 집단은 바로 여성이었다. 여성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반에도 여성들은 여전히, 특히 직장에서 열등한 지위에 있었다. 일부 직업은 관습에 따라 접근할 수조차 없었으며 일부 전문학교에는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고 동등한 일을 하는데도 남성에 비해 훨씬 적은 임금을 받았다. 법원을 통해 평등권을 얻고자 했던 이전까지의 여성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대부분 남성들은 1873년 브래들리 판사의 견해에 공감하고 있었다. 브래들리 판사는 “여성의 최고 운명이자 임무는 아내와 어머니로서 고상하고 자상한 소임을 다하는 일이다. 이것이 창조주가 정한 법이다”라고 말했다.

여성운동은 1964년 민권법 제7편을 통해 인종, 종교, 모국, 성별에 기초한 고용 차별이 금지되면서 첫 번째 주요한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1972년 초, 연방 의회는 남녀평등헌법 수정안(ERA)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켜 주 의회에 보냈으며(주 의회에서 이 법안은 승인되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동등한 업무에 평등한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는 평등급여법(Equal Pay Act)을 통과시켰다.


윌리엄 브레넌 주니어 판사,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사건(1973)

우리나라는 성차별이라는 길고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차별은 실질적으로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새장에 가두는 ‘낭만적 가부장주의’의 태도에 의해 합리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법률집들은 점차 남녀를 틀에 박힌 방식으로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 여성의 지위가 최근 몇십 년 동안 눈에 띄게 향상된 점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기관이나 직업 시장이나 정치 영역에서, 미묘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팽배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민권운동에 힘입은 여성 단체들은 법원을 통해 남녀를 차별하는 법률을 하나씩 공격하게 되었으며 거의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법원들은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처럼 법 앞에서의 남녀 평등을 쟁취하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엄격한 평등 보호 기준에 위배된다고 해도 일부 가부장적인 조치를 유지시킬 수 있는 남녀간의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인식했다. 그렇지만 차별을 정당화할 만한 적절한 사유가 없을 경우 대법원은 아주 빠르게 이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9년, 대법원은 헌법이 인종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처럼 성별에도 중립성을 기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대법원은 남편만 위자료를 지불해야 하는 한 주의 법률에 일격을 가했다. 브레넌 판사는 남편의 의무는 일하고 아내를 부양하는 것이며 아내의 의무는 가정에만 집중되어야 한다는 ‘성적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분류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 대법원은, 아버지는 실직했지만 어머니가 여전히 직장에 다닐 경우 이러한 가정에 대해 혜택을 주는 연방 계획을 철폐하도록 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이룩한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아직도 ERA를 통해 얻고자 하는 완벽한 법적 평등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ERA는 “연방 정부 또는 어떠한 주 정부도 성별을 이유로 법률이 인정하는 권리의 평등을 부인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연방 의회에 입법을 통해 이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연방 의회는 1972년 초에 주 의회에 이 수정안을 보낸 바 있으며 몇 달 이내에 절반 정도의 주에서 이를 비준했다. 수정안 지지자들은 비준 마감 시한을 1978년에서 1982년 6월 말로 연장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때까지 35개 주만이 승인했으며 3개 주가 모자라는 바람에 수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수정안에 대한 반대 의견은 남성 우월주의적인 주장에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법률을 폐지함으로써 결국 여성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어떤 반대자들은 ERA가 통과되면 남녀공용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주 정부의 권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ERA가 연방 정부에게 주 정부를 괴롭힐 곤봉을 하나 더 건네주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수정헌법 제14조가 이미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남녀평등법 수정안이 현재 존재하는 법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ERA는 성별을 인종과 동등한 분류법으로 격상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으며 법률이 남녀를 차별한 사건에 대해 최고 수준의 사법적 조사를 펼칠 수 있도록 유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합중국 대 버지니아 주 사건(1996)

버지니아 주가 여성에 대하여 버지니아 군사학교(VMI)에서 제공하는 교육 기회, 즉 군사 훈련과 민간인 리더십 개발을 위한 멋진 기회에서 배제시킨 것은 “VMI의 사관생도에게 필요한 모든 개인 활동 능력이 있는” 여성들에게 수정헌법 제14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VMI의 계획이 아무리 자유롭게 버지니아 주의 아들들에게 봉사한다고 해도, 버지니아 주의 딸들에게는 아무것도 제공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평등한 보호가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법원들은 이미 여성들이 ERA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 대부분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한 보호 조항은 ‘맨(man)’이라는 단어 대신에 ‘퍼슨(pers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사람을 의미하고 있으며, 법원들은 이미 그 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하여 법적으로 규정된 성차별의 가장 노골적인 형식을 무너뜨려왔다. 여성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유색 인종의 상황과 비슷하여 주 정부의 성차별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법은 사회 관습적인 태도를 바꾸는 데 무력하다. 민권운동과 여성운동 이전에 존재했던 낡은 태도는 크게 줄었지만 아직도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여성과 유색 인종이 평등한 보호 조항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 가장 큰 혜택을 받아오자 다른 집단들 또한 헌법적인 평등을 요구해왔다. 장애인, 동성애자, 그리고 기타 집단들은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법률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92년 미국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은 신체적려ㅍ탔?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국가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큰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동성애 단체들은 동성간 결혼 합법화 등 아직 원하는 목표에 크게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법원들과 많은 주 입법부는 계속적으로 게이와 레즈비언들에 대한 법적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선언해왔으며, 동성애자들 또한 사회의 주류로 천천히 용인되기 시작했다.



평등한 보호 조항이 유일하게 정부가 모든 법을 공평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점만을 의미해 정부가 차별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도록 했다면, 이 조항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해도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보아온 것과 같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법원과 입법부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평등한 보호는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 보호와 같이 시민을 위한 근본적인 개념이다. 한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 표현을 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들을 수 없다면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는 것처럼, 차별 대우를 받는다면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 없다.

‘평등한 시민’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는 존중이다. 즉, 사회적 계약이나 공적인 문제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평등하다는 인식이다. 우리가 인종, 성별, 종교 등에 기초하여 비합리적으로 낙인을 찍게 되면 그러한 특성을 지닌 개인들은 자동적으로 열등한 범주에 속한 사람으로 규정된다. 이는 참여 정치의 가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수가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힌다면 시민 생활에 소수가 참여하려는 노력을 다수가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결정적으로, 한 소수 집단의 구성원들이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없는 부류로 낙인찍힌다면, 그 소수 집단이 책임 있게 행동하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존중, 참여, 책임 등 평등한 시민의 세 가지 가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시민에게 기대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물론 사회적 혹은 경제적 평등을 법률로 제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평등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과 입법부는 최소한 ‘기본적인’ 세 가지 영역에서 누구도 차별받지 말아야 함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첫 번째 영역은 민주주의 사회의 위대한 특혜이면서 책임 중 하나인 투표권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는 민주주의의 특징이며 자신의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실체법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상징적이기도 하다. 투표는 우리가 지도자를 선택하고 중요한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이며,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보았듯이 소수의 표라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대해 투표권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투표의 의미가 축소된다. 따라서 브라운 판결 이전에도 법원들은 소수가 투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영역은 법원에 대한 접근성이다. 법원은 투표권과 유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민주주의 사회가 왜 형사 사법제도의 공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가에 대해서는 공정한 재판 및 피고인의 권리를 다룬 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특정한 집단이 법원에 접근할 수 없거나, 흑인이나 여성이 배심원 명부에 등록되지 못하거나, 혹은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처벌받는다면 형사제도의 공정성이 훼손된다. 피고인의 권리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많은 사건들에는 유색 인종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법원이 밝힌 메시지는 명백했다. 평등한 보호는 형사 및 민사제도 모두에서 공정한 대우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인 세 번째 영역은 결혼 및 가족과 관련되어 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결혼과 가족은 존중, 책임, 참여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아 개념, 법적 책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개인적인 결정 중에서 가장 사적인 부분으로, 주 정부가 거의 관여하지 않거나 아예 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법원들은 인종을 하나의 차별적인 분류로 포함시킨 법을 철폐했을 뿐만 아니라 부에 대한 차별 또한 없애도록 했다. 한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결혼이나 이혼을 거부당할 수는 없다. 1920년대에 대법원은 가족의 책임과 선택 영역이 주 정부의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정의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영역은 평등한 보호 조항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더욱 보호받게 되었다.


얼 워렌 대법원장, 러빙 대 버지니아 주 사건(1967)

이 사건에는 분명히 이러한 분류법을 합리화하는 불공평한 인종 차별이라는 점 외에는 다른 적합하고 결정적인 목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버지니아 주가 백인이 포함된 타인종 간의 결혼만을 금지한다는 사실은 백인 스스로 백인 지상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스로 정당성을 주장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종 때문에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가 합헌이 아님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습니다.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결혼할 자유를 제한한다면, 이것은 평등한 보호 조항의 중심적인 취지에 어긋나는 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은 주 정부가 이러한 기본적인 영역에 대해 결코 간섭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주 정부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주 정부가 결정적으로 주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경우에 그렇게 해야만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 정부는 관련 규정이 특정 집단에게 부당하게 부담을 주지는 않는지에 대해 확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 정부는 투표권 취득이나 결혼 허가증 취득을 위한 연령 제한을 둘 수 있지만, 이러한 제한 사항은 소수인종 집단을 포함하여 모든 집단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배심원 명부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보통 배심원은 유권자 명부에서 뽑는다. 유권자 명부가 특정 집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오점이 생기게 되면 배심원단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는 국민 한 사람이 투표를 하고 배심원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 모두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당한 법 절차는 피고인이 동료 배심원을 둘 자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피고인이 유색인종이라면 배심원 명부가 사회 구성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평등한 보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향이나 경제 상황에 따라 사회의 공적 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1964년 민권법은 사업주가 개인이라 하더라도 레스토랑, 호텔, 극장 등 ‘공공시설’에서 인종, 성별 등에 기초하여 차별하는 일을 불법으로 정했다. 1964년 이전에는 사업주가 원하는 손님에게 봉사할 권리를 지닌다는 내용의 법률이 지배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흑인, 여성, 가톨릭 교도, 혹은 기타 집단들이 차별을 받을 수 있었다. 수정헌법 제14조가 ‘어떠한 주도’ 차별할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었기에 몇 년 동안 개별적인 차별은 법으로 규제될 수 없었다. 1960년대에 법원과 연방 의회는 이러한 공공시설에 접근이 거부되는 일은 수정헌법 14조를 문자 그대로 위반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어쨌든 여행, 숙박, 식사, 문화 등에 편리하게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시민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은 분명히 이 조항의 정신을 모욕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19세기 후반 영국 철학자인 제레미 벤담은 평등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해 다루면서, 평등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라며 도대체 끝이 어디냐는 질문을 던졌다. 평등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수준으로 되는 날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한 보호 조항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모든 사회 중 가장 평등주의 사회인 듯하다. 프랑스 작가 시몬느 드 보봐르는 “부유한 미국인은 위엄이 없으며 가난한 사람은 노예 근성이 없고 일상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평등이라는 발판 위에 놓여 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제껏 미국이 평등주의 사회였던 적은 없었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획일적인 지위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능 있고 근면한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다는 기회와 법 앞의 평등이 강조되었다. 남성과 여성, 부자와 빈자, 백인이나 유색인종, 앵글로색슨이나 라틴 계, 모두가 평등한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미국 시민으로서 그들이 향유하는 권리이다. 하지만 평등권의 개념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평등한 시민의 개념이며, 이 개념에는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도 포함되어 있다.



| 참고 서적 |


* Alexander M. Bickel, The Supreme Court and the Idea of Progress (New York: Harper & Row, 1970).

* Kenneth L. Karst, Belonging to America: Equal Citizenship and the Constitu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 Susan Gluck Mezey, In Pursuit of Equality: Women, Public Policy, and the Federal Courts (New York: St. Martin? Press, 1992).

* Donald G. Nieman, Promises to Keep: African-Americans and the Constitutional Order, 1776 to the Pres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 Paul M. Sniderman et al., The Clash of Rights: Liberty, Equality, and Legitimacy in a Pluralist Democrac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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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_ 12  투표권



미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인종, 피부색, 과거의 예속 상태 등을 이유로 합중국이나 주에 의해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 수정헌법 제15조(1870)


미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성별을 이유로 합중국이나 주에 의해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 수정헌법 제19조(1920)


대통령 또는... 그밖의 선거에서 미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인두세나 기타 조세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 수정헌법 제24조(1964)


연령 18세 이상의 미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연령을 이유로 합중국이나 주에 의해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 수정헌법 제26조(1971)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고 가장 잘 묘사했다. 그런데 “국민에 의한”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지도자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없다면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란 불가능할 것이며, 정부 관리에게 자신을 선출한 선거구민에 대한 지속적인 책임감이 없다면 다른 권리에 대한 보장 또한 없을 것이다. 따라서 투표권은 중요한 개인적 자유일 뿐만 아니라 자유 정부의 초석이기도 하다.

누가 투표권을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는 미국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였다. 미국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는,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가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 하나는 연방 체제 내에서 가능한 한, 각 표가 완전하게 동등한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이상적으로 항상 그렇게 실행된 것은 아니었다. 투표권이 있는 약 2억의 시민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표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각각의 표가 중요하다는 점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참정권의 확대가 평화롭게 혹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식민지 미국인들은 분명히 자유 투표를 믿긴 했지만, 투표 자격이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더 잘 이해하는 재산을 소유한 남성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와 개인의 권리 보호에 반드시 필요한 이 선거권은 지속적인 마찰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1835)

한 국민의 투표 자격에 대해 제한하기 시작하면 조만간에 투표 자체를 폐지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는 가장 불변하는 사회적 행동 규칙 중 하나이다. 투표권의 제한이 확대될수록 투표권을 확대하려는 필요성 또한 커지게 된다. 왜냐하면 새롭게 한번 타협할 때마다 민주주의의 힘은 강해지며, 권력이 커질수록 요구 또한 늘어나기 때문이다. 자격 제한에 걸린 사람들의 야심은 자격이 되는 사람들의 수보다 더 커지게 되어 있다. 마침내 예외가 원칙이 된다. 방해 없이 타협이 계속 이어지게 되고 참정권이 완전히 보장될 때까지 멈추지 않게 된다.


토크빌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재산렐痔韜교육렝适쓿성별렌英맛?신분 등으로 선거 자격을 제한하지 않고 국민에게 동등한 선거권을 인정하는 선거제도-옮긴이)가 이루어질 때까지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다. 잭슨 행정부(1820년대부터 1840년대까지) 시기 동안 재산 조건을 철폐하기 위한 격렬한 정치적 투쟁이 진행되었다. 미국을 실제로 둘로 나누었던 남북전쟁은 과거에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여성의 투표권 지지자들은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한 안전한 곳으로 만들자는 우드로 윌슨의 요청에 힘입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흑인들의 희생은 법원들이 흑인 투표를 금지했던 장애물을 철폐하도록 이끌었다. 1960년대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하자 선거 연령이 18세로 낮춰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많은 주에서 지난 1세기 동안 인구 분포 변화에 따라 투표권이 공평하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선거구 책정의 불균형에 대한 논쟁이 연방 법원에서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선거권을 확대하려는 각각의 노력은 힘들게 이루어졌고 보통선거로 향한 길은 간단하거나 순탄하지 않았다.



존 애덤스, 제임스 설리반에게 참정권에 대하여(1776)

재산이 없는 모든 남성들에게도 투표를 허락한다는 논리라면... 이는 여성과 아이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들도 재산이 아예 없는 사람들만큼 좋은 판단력과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 자격을 바꾸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논쟁과 언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은 위험합니다. 끝이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주장이 생길 것이고 여성들은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할 것이며 12살부터 21살 사이의 남자아이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무일푼인 모든 남성들은 사사건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지면서 모든 차별을 철폐하도록 할 것이며 모든 계급을 하나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것입니다.


애덤스의 견해는 미국 독립혁명과 헌법 제정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으며, 헌법에서는 투표권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과 식민지 미국은 두 가지 사항을 가정하면서 투표권에 대해 재산 제한을 두었다. 첫째는 재산, 특히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남성은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와 사회를 보존하려는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둘째, 재산을 가진 남성만이 중요한 정치적 사안을 결정할 수 있고, 이러한 사안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결정을 내릴 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니고 있었다. 17세기 영국 군인이면서 정치 이론가인 헨리 아이어턴은 “의회의원들을 선출해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난 남성들이어야 한다”는 점이 자유의 토대라고 적은 바 있다. 상류층과 중산층에게 이러한 독립성은 재산의 소유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

‘독립성’이라는 개념은 여성(남편에 의존함), 젊은이(부모에 의존함), 노예와 하인(주인에 의존함), 육체 노동자(생활비를 일시적인 고용에 의존함) 등을 제외시키게 되었다. 또한 많은 식민지에서 인디언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도와 유대 인을 제외시켰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져야 투표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 또한 식민지 지역마다 달랐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에 사는 사람에 비해 부동산이 적을 수는 있지만 개인 재산은 더 많을 가능성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미국 독립혁명 당시 성인 백인 남성 중 투표권이 있는 사람은 5명 중 3명 꼴이었다고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는 영국에 비해 높은 수치지만 상대적으로 범위는 좁았다.

그렇지만 독립혁명은 많은 독립 옹호자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민주주의적인 효과가 훨씬 더 컸다. 1765년 인지세법 폭동 이후 널리 퍼진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는 구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세금을 내는 사람들 다수가 투표권을 가지지 못한 셈이었다. 그들은 재산이 없지만 구입하는 물건에 대한 세금은 여전히 지불하고 있거나, 아니면 투표권의 최소 자격에 해당하는 재산을 가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1776년 《메릴랜드 가제트》의 한 논평자는 “모든 자유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로운 참정권을 향유하는 일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식민지 주민 10명 중 8명은 자신들의 자유를 사실상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저항하는 식민지 주민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애덤스와 다른 보수주의자들이 제한된 선거권을 유지하고 싶어한 만큼, 왕의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은 투표권의 재산 제한에 대한 저항을 이끌게 되었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는 표현은 왕국이나 의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주 의회나 현지 지도자를 뽑을 때에도 적용되었다. 비민주적인 정권 대신 또 다른 비민주적인 정권을 얻게 된다면 독립을 위해 싸울 필요가 없었다. 독립혁명 도중 매사추세츠 주 서부의 시민들은 “자신이 직접 했든 법적 대표가 했든 상관없이, 누구도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법에 의해 구속될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재산 자격이라는 개념은 최소한 일부 지역에서 세금 자격으로 대체되었다. 투표를 통해서만 정부가 권력을 남용하거나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세금을 낸다면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미국의 독립 이후 참정권이 확대되었으나 여전히 보통선거와는 거리가 멀었다. 개인적으로 실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와 최소한의 세금 수준 등의 형태로, 재산 자격은 향후 50년 동안 투표권을 제한했다.

하지만 재산을 소유한다고 해서 더욱 지혜로워지는가? 자유에 대한 사랑 혹은 공적 문제에 대한 판단이 부에 의존하는가? 1776년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나 1787년 헌법을 작성할 때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참정권에 대해

오늘 한 사람이 50달러 상당의 수탕나귀 한 마리를 소유하고 있어 투표를 할 수 있지만 다음 선거 이전에 그 당나귀가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동안 그 사람은 더 많은 경험을 갖게 되고 정부 원칙에 대한 지식과 인류에 대한 식견이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적절한 지도자를 뽑는 데 더 많은 자격을 지니지만 당나귀가 죽었으니 투표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자, 그럼 참정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당나귀에게 있습니까?


프랭클린의 논평은 이후 모든 주에서 참정권을 확대하려는 투쟁이 지속된 50년 동안 계속 반복해서 들리게 된다. (국가가 건설되고 남북전쟁 당시까지 투표 자격은 주 정부에 의해 통제되었다. 오늘날에도 연방 투표권 법률뿐만 아니라 몇 개의 헌법 조항이 있긴 하지만 선거권 집행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주 정부에 있다.) 재산 자격은 점점 모든 주에서 사라지게 되어 1850년에는 완전히 철폐되었다. 1855년까지 세금 자격 또한 폐지되면서 성인 백인 남성에 한해서는 경제적 장애물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렇게 전개된 이유를 몇 가지 들고 있다. 그들은 많은 경제적 특혜를 없앤 잭슨 행정부의 민주주의 개혁을 지적한다. 미국이 서부로 확장되면서 부유하지 않은 주들이 생겨나게 된 점도 들 수 있다. 이들 주에는 개척자들의 평등주의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오래된 주들에서는 산업 및 도시의 성장으로 인해 땅을 소유하고 있거나 상당한 양의 개인 재산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치 과정에 대해 참여를 요구하는 많은 노동자 계급이 발생하게 되었다. 땅을 소유한 상류 계급이 아직 주도하고 있는 남부 주에서도 도시의 중산층 노동자 계급이 증가하면서 재산 자격과 상관없는 투표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의 시민들은 1829년 주 헌법제정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해, 버지니아 주를 과거처럼 외부의 군대로부터 방어하려면 토지를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구별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리치몬드 시 토지 미보유자의 청원서(1829)

재산 자격은 같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불쾌한 차별을 야기한다. 법의 실행에 있어 재산 자격은 법으로 구속된, 법을 유지하기 위해 피와 재산을 구속받는 많은 시민들에게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몫을 제거하고 있으며, 공적인 봉사가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이라는 점에서 선호되고 있는 계급에 모든 특권 중 최상의 특권을 주고 있는 셈이다.

위기가 닥치면 버지니아 주 남성들 사이에 부당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 시민의 계급에서 누락된 사람들을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이 징병 목록과 토지 목록을 비교 조사하지 않는다.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시민들은 평화의 시기에는 불명예스럽게 투표권을 갖지 못하지만, 전쟁시에는 관대하게도 전쟁터에 불려가게 된다.


아마도 참정권의 확대를 부추긴 가장 큰 힘은 특정한 정치 견해를 옹호하면서 관직에 출마한 후보자들을 가진 정당이 생겨났다는 점일 것이다. 19세기 초 50년 동안 앤드루 잭슨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민주당은 도시 유권자들을 동원하여 선거권을 확대하고 재산 자격을 없애도록 했다. 반대파인 휘그당은 참정권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이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표와 신임을 얻기 위해서 민주당의 의견에 동참했다.

1850년대에 이르면 21세 이상의 백인 남성 대부분이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과 여성은 정치 과정에서 여전히 배제된 상태였다.



인디애나 주 헌법제정회의 대표단(1850)

보통선거의 권리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바에 따라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결의안 발의자가 참정권을 여성과 흑인에게도 적용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면 나는 반대합니다. 나는 “21세 이상의 모든 자유로운 백인 남성”이 보통선거의 기준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부에서 흑인 노예들의 법적 지위는 완전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투표권은 말할 것도 없이 권리를 전혀 갖지 못했다. 북부에 살든 남부에 살든 상관없이 자유로운 아프리카 계 미국인조차도 투표를 할 수 없었다. 여성이 재산을 소유하고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부 개혁법이 통과되긴 했지만 여성은 여전히 법적으로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투표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다.

남북전쟁을 통해 미국 남부의 주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과거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법적인 지위와 평등권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으로 미국은 수정헌법 3개 조항을 통과시켰다. 수정헌법 제13조를 통해 제도로서의 노예제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제14조는 처음으로 공민권을 국가의 특성으로 정하고 미합중국에서 출생했거나 귀화한 모든 사람에게 부여했다. 제15조는 인종 때문에 투표권을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금지했다.

유감스럽게도, 해방의 약속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남부 주들이 하나 둘씩 흑인들의 투표를 막기 위하여 법적인 혹은 절차상의 장애물을 설치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분리법을 통해 흑인들을 영원히 열등한 인종으로 격하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종에 상관없이 많은 미군이 파시스트를 무찌르기 위해 전쟁에 동참하면서, 해외에서 국민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단순히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민의 권리를 거부당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진행되던 중 대법원은 미국 남부에서는 당연시되고 있는 모든 백인으로 구성된 예비선거 체계에 도전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예비선거에서 특정 당의 당원들은 11월에 있을 총선에 어떤 후보가 출마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188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남부 주 대부분 지역에서는 누구든 민주당의 예비후보로 발탁되면 총선에서의 당선이 보장되었다. 남부에서 공화당 세력은 매우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예비선거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선거 과정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남부 주들의 정당이 사설 조직이기 때문에 흑인들은 입당이나 투표를 못한다는 가설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4년, 대법원은 이 가설을 무너뜨리고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투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스탠리 리드 판사, 스미스 대 올라이트 사건(1944)

예비선거가 주와 국가의 관리를 뽑는 과정 중 하나가 되었으므로 차별이나 권리 축소 등의 특성을 결정하는 동일한 척도가 총선에서와 같이 예비선거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미합중국은 헌법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미국의 기본법은 모든 시민에게 어떠한 주에서도 인종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관리를 선출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이러한 권리는 한 주가, 한 사설 조직이 선거에서 인종 차별을 행하도록 허락하는 형식으로 선거 과정을 진행하여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헌법상의 권리는 그렇게 간접적으로 무시될 수 있다면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흑인 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멀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서굿 마셜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끄는 대규모 시민운동은 법원과 의회에서의 인종 차별을 공격했다. 그 결과 투표권과 관련해서는 1964년에 인두세(투표권을 얻기 위해서는 세금을 납부하도록 한 제도로, 가난한 사람들, 특히 흑인들이 투표할 수 없도록 했다)를 폐지하는 수정헌법 제24조를 제정하게 했으며, 1965년에는 획기적인 투표권법을 만들도록 이끌었다.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전쟁 후 재건을 위한 헌법 수정조항들이 마침내 집행될 수 있었다. 투표권법은 흑인들에게 투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관행을 대상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연방 정부가 모든 수준에서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도록 했다.

투표권법은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데 성공했으며 실제로 투표권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중앙 정부가 수행하는 기능들을 연방제도에서는 주 정부가 수행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투표는 주 법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현재에도 대부분 통제되고 있다. 1870년까지 투표에 관한 자격 조건은 주 정부가 제정한 것들이었다. 그해에 수정헌법 15조는 주 정부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계속된 수정조항에서 투표권은 여성으로, 18세 이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인두세는 폐지되었다. 투표권법은 좀더 나아가 주에서 명백한 차별 행위를 할 경우, 연방 등록관에게 등록 및 투표 기구를 감독하여 소수자들이 투표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확인하게 했다. 일반적인 선거 절차 운영은 대부분 주 정부가 관리하도록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주에서는 1965년 투표권법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다. 주 정부가 선거를 운영할 수는 있지만, 국가적 기준과 절차에 비추어 실행해야만 한다.



세니카폴스 회의 선언서(1848)

우리는 모든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는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반복적인 가해와 강탈의 역사이며, 여성에 대한 절대적 독재를 직접적인 목적으로 두고 있었다.

남성은 여성이 선거권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남성은 여성에게 법에 복종하도록 강요해왔으며, 법이 제정될 때 여성은 제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남성은 여성에게 선거권이라는 시민의 첫 번째 권리를 박탈하여 입법부에 여성의 대표가 없도록 하여 모든 측면에서 여성을 억압해왔다.


여성이 언제부터 투표권을 얻으려 노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독립혁명 이후 일부 주에서 가끔씩 여성도 투표를 한 증거는 있다. 여성을 포함한 보통선거에 대해 진지하게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848년 세니카폴스 회의 덕택이다. 이 회의의 선언서는 독립선언문의 대부분을 노골적으로 베꼈으며, 독립선언문의 내용 중 조지 3세가 식민지 미국에 대해 취한 행동에 남성이 여성에게 행한 죄를 대체한 것이었다. 하지만 1850년대의 이러한 개혁운동은 한 가지 결실만을 가져왔는데, 바로 여성이 주요한 역할을 했던 노예제도 폐지였다. 그러나 연방 의회가 과거 노예였던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었을 때, 여성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주 정부가 투표를 관리했으므로 여성들은 투표권을 얻기 위해 주 입법부에 로비를 하기 시작했다. 와이오밍 주에서는 1869년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지만, 1900년까지 여성에게 완전한 정치적 평등권을 준 주는 4곳에 불과했다. 여성의 투표권 쟁취운동은 1897년부터 1917년까지 20년 동안 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소위 ‘혁신주의 시대’에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투표권 옹호는 헌법 수정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목하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다른 나라의 이상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게 하려고 미군을 해외로 보내면서 실제로 자국 내에서는 인구의 절반에게 그러한 이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정치적인 견해가 팽배해졌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처음에는 헌법 수정을 반대했지만 이제 수정안에 서명하게 되었고, 연방 의회는 1919년 6월 헌법 수정안을 승인했다. 비준에 필요한 36개 주가 1년 이내에 수정안을 승인했으며, 1920년 대통령 선거에 맞추어 여성도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되었다.



미국이 법을 통해 모든 성인이 투표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한 이후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또 다른 업적은 모든 사람의 표가 제대로 반영되도록 확인하는 일이었다. 즉, 단순한 투표수뿐만 아니라 한 주에서 다른 사람의 표와 같은 비율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헌법은 각 주에 2명의 상원의원을 보유하고 10년마다 행해지는 인구 조사에 따라 전국 인구 중 주에 거주하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하원의원을 뽑도록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표 의원들을 각 주에서 어떻게 할당하느냐에 대해서는 지침이 없다. 미국 헌법을 제정할 당시 제임스 매디슨은 배정이 공평하게 이루어져 주 선거나 연방 선거에서 한 사람의 표가 이웃 사람의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를 보였다.

일부 주에서는 정기적으로 유권자들 사이에 최소한 대충이라도 공평성을 이루기 위해서 연방 의회 선거구와 주 의회 선거구 경계선을 다시 정했다. 모든 주의 5분의 3은 의회 선거구와 주 의회 선거구 중 한 곳 이상을 정기적으로 재배정하고 있으나, 1950년대에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12개 주는 30년 이상 선거구를 조정하지 않아 개인의 표 사이에 가치 차이가 많이 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작은 버몬트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의회 선거구의 유권자는 3만3천 명이며 가장 적은 선거구의 유권자는 238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각 선거구에서는 주 의회 대표 1명씩을 선출했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주 상원의원 선거구에 유권자 6백만 명이 살고 있으며, 인구가 거의 없는 농촌 지역에서는 주 상원의원 선거구에 유권자가 1만4천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불균형으로 인해 도시나 교외 지역 표는 크게 과소평가되고 오래된 농촌 지역의 표는 과대평가되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주 정부에서 일하게 된 시골 출신 대표들은 선거구 재배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법부 의원들로부터 변화가 진행되지 않자 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들은 ‘공화정 형태’(헌법 제4조 제4절)를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법원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처음에는 관여하기를 거부했다. 전통적으로 대법원에서는 선거구 배정에 관한 질문을 법원의 영역 밖에 있는 ‘정치적인’ 문제로 간주하고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3월, 대법원은 테네시 주 도시 유권자들이 제기한 소송을 받아들였다. 테네시 주의 헌법에 따르면 매 10년마다 선거구를 다시 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테네시 주는 1901년부터 선거구를 재배정하지 않았다. 이런 소송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심리를 열기로 결정한 사실 자체로도 많은 주 입법부가 자발적으로 선거구를 재배정하도록 만들었으며, 다른 곳에서 개혁자들이 선거구 재배정을 요구하면서 주 법원과 연방 법원에 수십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미국은 연방제도이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는 지금까지 한 주에서 나온 표는 다른 주의 표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지 않다. 미국 제도에 따르면 모든 주는 나름대로의 선거인 수를 지니고 있으며, 대통령은 4년마다 모여 투표하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다. 작은 로드아일랜드 주에서는 선거인단의 3표를 지니고 있는데, 상원의원 1명, 하원의원 2명을 합한 것과 같은 숫자이며, 인구 비율로 따지면 캘리포니아 주나 뉴욕 주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이다. 연방제도에서 다른 문제들 또한 나타났다. 미국 상원이 주를 대표하듯이 주 정부에서도 상하원제를 두어 한 곳이 군郡과 같은 한 지역 단위를 대표할 수는 없는가? 주에서 선거구 경계선을 그을 때 역사적인 분리를 한 요소로 인정할 수는 없는가? 상급 법원에서는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

사실 대법원에서 그레이 대 샌더스 판결(1963)에서 채택한 기준은 매우 명료하고 상대적으로 적용하기 쉬웠다. 즉 한 사람이 한 표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1인 1표는 사법적인 지침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상상력을 담았다. 투표권에 관계된 다른 형식들은 농촌 대 도시, 토박이와 이주민 등 한 단체를 다른 단체와 경쟁하도록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인 1표’는 이러한 경쟁에 민주주의적인 고리를 제공해주었다. 모두에게 자신의 표가 다른 사람의 표와 동등하게 취급받도록 하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런 공식을 지지한다면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탱한다는 의미이며, 이에 반대한다면 야비하고 인색하게 들린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미국의 모든 주에서 공평한 방법으로 주와 연방 의회 선거구를 재조정했다.


얼 워렌 대법원장, 레이놀즈 대 심즈 사건(1964)

한 시민은 자신의 투표권이 침해되는 만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얻지 못하는 셈입니다. 시민이 던지는 표의 무게는 살고 있는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없습니다... 한 시민, 자격이 있는 유권자는 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그 이상도 아니며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 헌법의 평등한 보호 조항이 명백하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는 바입니다.

역사나 경제적 이익, 혹은 단체 이익 등은 인구에 기초한 대표 선출을 지키지 못한 점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닙니다. 역사나 경제적 이익이 투표하는 게 아니라 시민이 투표를 하기 때문입니다. 땅이나 나무, 혹은 목초가 투표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투표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부 형태는 대의정치의 형태이며, 입법자들은 직접적으로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의 도구이며, 국민을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한 자유롭고 온전하게 입법자를 선출할 권리는 우리 정치제도의 근본입니다.


재산 자격과 인두세 폐지, 유색 인종렛㈋볜18세 이상인 자들의 선거권 획득 등을 통해 투표권 관련 투쟁들이 모두 승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여러 번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며 민주주의 내에서 개인의 권리를 정의하는 방식 또한 시간에 따라 변한다. 미국 시민이 1820년대에 투표하는 것과 21세기 초에 투표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또한 선거권 확대를 원하는 친민주주의 영웅들이 선거권을 축소하려는 반민주주의 악당들과 싸우는 단순한 상황이 아니다.

미국 역사에서 소위 ‘나은’ 사람들은 군중의 지배(mob rule)를 두려워했다. 이는 미국 건국 세대의 저작에 관통해 흐르던 주제이다. 오늘날 형태는 다르지만 선거 과정을 ‘정화’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의도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투표 등록을 쉽게 하려는 노력은 투표 과정에서의 부정을 가져올 수 있다며 공격당한다. 문맹 기준 완화와 영어를 말하거나 읽을 줄 모르는 시민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일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영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사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군중 심리에 의해 조종당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선거권을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나 다른 선거에 투표를 하는 미국인의 비율이 산업 국가들 중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 중 50퍼센트 이하가 투표를 했다. 투표율이 유권자의 85퍼센트 이상을 기록했던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하여 점점 감소한 이유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국민들의 생활에서 정당의 중요성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금이 풍부한 이권 단체들이 늘어나면서 우선적으로 TV나 신문 광고 등을 통해 경쟁이 주로 이루어지는 선거에 국민들이 관심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투표를 하지 않은 유권자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답변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한 표를 던진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안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냥 무관심하다. 보통선거를 향한 긴 역사적 운동에 비추어보면 슬픈 일이다.

기술상의 문제와 절차상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 주의 선거 관리들은 5만 표 가량을 무효로 취급했다. 투표 용지에 제대로 구멍이 찍히지 않아 유권자가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선거인단제도라는 오래된 제도 때문에 전체 선거 결과는 플로리다 주에서 던져진 몇백 장의 표에 달려 있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즉시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법원에 의뢰했고, 대법원은 결국 플로리다 주의 표를 조지 W. 부시에게 주었고, 부시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선거에서 선거인단제도는 일반 투표로는 표를 적게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도록 했다. 미국인들은 선거인단제도의 구조를 잘 알고 있다. 이 제도는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효과적이거나 합리적인 면은 아니며,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는 없다고 여겼던 지난 시대의 유물이다. 하지만 선거인단제도는 연방제도 안에 있는 규모가 작은 주들의 입지를 보장해준다는 의미에서 오늘날 가치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개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0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개표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양측은 투표에 대해 공정하게 집계하도록 요구했고 합법적으로 행사하고 적절하게 표시된 표 모두를 집계하길 원했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결정할 기술적인 항목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언론은 주 정부가 문제를 처리하면서 소수 인종들을 차별했다고 보도했으나, 사실 무효가 된 표들 대부분은 중산층 백인 노인 유권자들의 표로, 그들 대부분은 투표지에 어떻게 표시를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이 일을 수만 표를 무효화하려는 계략이었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개표가 실제로 시작되기 전까지 누구도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플로리다 주는 차기 의회에서 그러한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더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승리하지 못하는 선거는 미국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며 국민들이 쉽게 조지 부시 대통령을 당선자로 받아들인 점은 국민들이 미국 선거 과정에 대해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에서 일어난 폭동도 없었고,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지도 않았다. 민주당 후보인 앨 고어는 개표 방식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2000년 대통령 선거가 근소한 차이로 결정 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의 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6개 주에서 약간의 표 차이가 있었더라면 선거 결과가 반대로 나왔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아마도 미래의 미국인들은 ‘피지배자의 동의’라는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는 이 중요한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참고 서적 |


* Marchette Gaylord Chute, The First Liberty: A History of the Right to Vote in America, 1619-1850 (New York: Dutton, 1969).

* Linda K. Kerber, No Constitutional Right to be Ladies: Women and the Obligations of Citizenship (New York: Hill & Wang, 1998).

* Alexander Keyssar, The Right to Vote: The Contested History of Democracy in the United States (New York: Basic Books, 2000).

* Donald W. Rogers, ed., Voting and the Spirit of American Democracy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2).

* Charles L. Zelden, Voting Rights on Trial (Santa Barbara: ABC-CLIO,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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