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Name-United States Embassy, Seoul, Republic of Korea
 


 
미국의 경제

-- CONTENTS --
1장. 지속과 변화
2장. 미국 경제는 어떻게 움직이나
3장. 미국 경제의 역사
4장. 소기업과 주식회사
5장. 주식과 상품, 그리고 시장
6장. 미국 경제와 연방정부의 역할
7장.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8장. 미국의 농업, 그 중대한 변화
9장. 미국의 노동력과 근로자의 역할
10장. 해외무역과 글로벌 경제정책
후기
경제 용어 풀이


top


CHAPTER 1  지속과 변화

21세기에 들어 미국의 경제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20세기 전반부에는 두 차례의 세계 전쟁과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후반부에는 40년 동안 소련과의 냉전 수위가 높아지면서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고실업, 과도한 재정 적자를 경험했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제적 안정기를 누릴 수 있었다. 물가는 안정되었고 실업률도 근 30년 이래로 가장 낮아졌다. 또한 정부는 흑자 예산으로 돌아섰고 주식시장도 전례 없이 호황을 누렸다.

1998년 미국의 국내 총생산량(Gross Domestic Product:물건과 서비스의 총생산량)은 8조 5천억 달러를 넘었다. 이로써 미국은 세계 인구의 5퍼센트 미만에 불과하지만 경제 생산량은 2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하던 일본도 미국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일본과 다른 국가들은 1990년대에 저성장과 기타 문제로 경제 성장에 발목을 잡혔다. 그러나 미국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가장 오랫동안 경제 성장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미국은 의미심장한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컴퓨터와 통신, 생명공학과 같은 기술혁신의 물결은 미국인들의 일과 여가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와 함께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 서유럽의 경제 성장, 아시아에서의 경제 강국 출현,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확대되는 경제 기회, 비즈니스와 금융 부문에서 나타난 세계적인 통합의 물결은 새로운 기회인 동시에 위험 요소를 안겨주었다. 이런 변화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산업구조의 재편에서부터 정부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재검토하도록 요구했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 때문에 많은 근로자들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면서도 미래를 불확실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경제 또한 장기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경제적 안정을 얻고 상당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소수의 소외된 사람들, 특히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계속 가난하게 살았다. 다른 나라처럼 심각할 정도는 아니어도 부의 편중은 점점 더 심해졌다. 환경의 질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상당수 미국인들이 의료보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전후 베이비 붐 세대의 노령화는 기금 고갈로 21세기 초반에 국민연금과 의료보호 시스템에 발생할 혼란을 우려하게 했다. 게다가 세계 경제 통합은 이점도 많았지만 혼란도 불러일으켰다. 특히 전통적인 제조업의 후퇴를 초래했고, 국가는 해외교역에서 대규모의 적자를 감수해야만 했다.

계속되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정부는 경제 문제에 접근하는 데 있어 몇 가지 기본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국이 ‘시장경제’를 표방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인들은 정부 또는 힘있는 개인의 이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개인들의 수요와 공급을 통해 어떤 물건을 만들 것이며, 또 그 물건을 만들 때 소요되는 생산비에 따라 가격이 정해질 때 경제가 가장 잘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러한 자유시장 체제에서 가격은 그 물건의 진짜 가치를 반영하며, 따라서 가격은 가장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인들은 자유시장이 경제 효율성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다원주의에 기여하고 과도한 권력집중을 막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정부 지도자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에 항공련떫돈트럭 회사들과 금융 기관, 통신회사 심지어는 전기회사의 독점권을 보호하는 규정을 철폐함으로써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미국은 다른 나라도 자유시장 경제의 원리를 더욱더 잘 운영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자유기업’에 대한 확신은 정부의 중요한 역할을 가로막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이따금 시장세력에 도전할 만큼 강력한 지배력을 키워나갈 것처럼 보이는 기업이 나타나면 정부가 나서서 그 기업을 해체하거나 규제해주길 바란다. 또한 민간 경제가 간과할 수 있는 문제, 이를테면 교육이나 환경보호와 같은 문제들은 정부가 관여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시장원리를 옹호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고 자국 기업을 경쟁에서 보호해주는 일에도 정부가 나서주길 원한다.

이처럼 미국인들이 규제에 대해 일관적이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경제에서도 정부의 역할에 대해 모순된 사고를 갖고 있다. 정부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경제 문제에 개입했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 들어 경제불황을 겪은 미국인들은 사회적럭姸╂?문제를 처리하는 정부의 능력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도 은퇴 후 연금을 보장해주는 사회보장과 노인들을 위한 국민의료보험 같은 중요한 사회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연방정부의 성장 속도는 상당히 느려졌다.

미국인들의 실용주의와 유연성은 보기 드물게 역동적인 경제라는 결과로 표출되었다. 미국 경제는 점점 풍요로워져서 그렇든, 기술혁신을 이루거나 해외교역이 증가해서 그렇든 간에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그 결과, 100년 아니 50년 전만 해도 농업국가였던 미국은 오늘날 도시의 성격이 강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제조업에 비해 서비스업이 더욱 중요해졌다. 어떤 산업 부문에서는 대량생산이 쇠퇴하고 다품종과 주문생산을 강조하는 특화된 생산방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대기업이 등장했다가 작은 규모로 분할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재편되고 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산업과 기업이 지금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고용주들은 가부장적 요소를 줄이고 직원들에게 자율권을 주고 있다. 게다가 정부와 재계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경제적 성장을 위해 점점 더 고도로 숙련된 기술과 다양한 능력을 지닌 노동력을 길러내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책에서는 미국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탐험해보고자 한다. 2장에서는 미국 경제의 기본적인 특성을 폭넓은 시각으로 알아보고, 3장에서는 오늘날 미국 경제가 있기까지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4장에서는 소규모 자영업에서부터 현대의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업 형태를 알아보려고 한다. 5장에서는 주식시장의 역할과 여타 금융시장의 역할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6장과 7장에서는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 특히 6장에서는 정부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유기업을 형성하고 규제하는 것에 대해, 7장에서는 정부가 물가안정과 성장, 고용률 상승을 위해 전반적인 경제활동의 속도를 어떻게 조절하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8장에서는 미국 농업정책의 발자취에 대해 알아본다. 9장에서는 미국 경제에서 노동자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10장에서는 국제무역에 있어 미국의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각 장에서 분명히 언급하겠지만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미국의 노력은 21세기의 여명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 경제는 여전히 성장중이다.


top


CHAPTER 2  미국 경제는 어떻게 움직이나


모든 경제 시스템에서 기업가와 관리자는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해 천연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기술력을 결합시킨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다른 요소들을 조직하고 이용하는 방식은 국가의 정치적 이상과 문화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미국을 가리켜 흔히 ‘자본주의’ 경제라고 한다.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이론가인 칼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자본을 장악한 소수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체제를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사회주의’ 경제와 대비시켰다.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권력까지 장악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열을 올린다고 비난했다. 그와 반대로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정부가 사회자원의 공평한 분배처럼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를 장악하는 부분이 많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점도 있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당시 사람들에겐 진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만일 마르크스가 정의했던 순수한 자본주의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했더라면 오늘날 미국이나 다른 국가의 정부가 개인의 무한한 상업적 이윤에 의한 권력집중화를 막았을 것이며,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경제에 간섭하는 모습은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 경제는 정부가 개인의 이윤 추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혼합’ 경제로 정의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미국인들은 자유로운 이윤 추구와 정부의 통제, 두 가지를 어느 정도로 조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 통일된 견해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들이 발전시킨 혼합 경제가 가장 성공적인 체제라고 확신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기본 요소


국가 경제체제의 첫번째 요소는 천연자원이다. 미국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농토가 비옥하다. 게다가 기후가 온난하다는 축복까지 받았다. 또한 대서양과 태평양에 면하는 드넓은 해안선과 멕시코만 또한 미국의 영토이다. 내륙에서 바다로 흐르는 강과 5대호(미국과 캐나다 접경 지역에 있는 5개의 거대한 내륙 호수)는 물자를 수송하는 중요한 운송로가 되고 있다. 이들 거대한 수로는 오랜 세월 미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50개 주洲가 하나의 경제적 단위로 통합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두번째 요소는 천연자원을 재화로 만드는 노동력이다. 숙련된 노동자들의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의 건전성을 결정짓는 노동생산성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노동력은 꾸준히 발전해왔고, 그 결과 지속적으로 경제 규모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대부분의 노동력은 유럽 이민자와 그들의 후손, 그리고 미국에 노예로 팔려온 조상을 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20세기 초반이 되자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왔고, 그후에는 라틴계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한동안 실업률이 높았던 적도 있고 노동력이 부족했던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일자리가 많아질 때에는 이민자들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민자들은 고국에서 받는 임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낮은 임금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일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부강해졌으며, 더 많은 이민자들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유효노동력의 질(사람들이 스스로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얼마나 숙련된 기술을 가졌느냐로 결정된다)은 노동력의 양만큼이나 국가 경제의 성패를 가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의 초창기 개척자들은 고되게 일해야 했으며 청교도적 근로윤리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 외에도 기술과 직업교육을 비롯한 국민교육을 중시한 점도 미국 경제가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노동력의 이동성 또한 미국 경제가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부 해안 지역의 인력시장에 이민자들이 넘쳐나자 많은 사람들이 내륙으로 이동했고, 그들은 거기에서 일자리가 생길 때까지 농장일을 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 북부 대도시 공장지대에 경제적 기회가 생기자 남부의 흑인들이 그곳으로 이동했다.

노동력의 질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은 치열한 첨단기술 산업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열쇠가 ‘인력자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 지도자들이나 경제 관료들은 컴퓨터와 텔레커뮤니케이션과 같은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천연자원과 노동력도 경제 시스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체계화하고 관리해야 한다. 미국 경제에서 관리자들은 시장에서 보내는 신호에 주의를 기울인다. 미국의 전통적인 관리조직은 상명하달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업 전반을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경영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는 이사회의 최고경영자가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은 여러 부서의 통합 책임을 맡고 있는 중간 직급의 관리조직에게 전달된 후 다시 최하위의 매장 점원에게 전달된다. 또 수많은 업무들이 각 부서와 개인별로 세분화되어 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이러한 전문화 혹은 노동력의 분화를 체계적인 분석에 의거한 ‘과학 경영’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지금도 많은 기업들이 이런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경영하고 있지만 일부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특히 국가간 경쟁에 직면한 기업들일수록 더욱 유연한 조직을 구성하고자 한다. 숙련된 기술자를 고용해서 재빨리 새 제품을 개발해내고 주문 제작하는 첨단기업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지나치게 복잡한 서열 구조와 노동력의 분화가 창의력을 저해한다는 인식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관리자의 수를 줄이고 부서장급에게 결정권을 위임하는 등 조직 구조를 ‘단순화(슬림화)’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물론 어떤 조직이 제품을 생산해내려면 그 전에 사업체를 조직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주식회사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기존의 사업을 확장할 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인정받아왔다. 주식회사는 일명 주주라고 하는 자발적인 소유주(오너)의 연합으로, 그들은 복잡한 법률 절차에 따라 회사를 만든다.

주식회사가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려면 재정적인 원천이 있어야 한다. 주로 보험회사나 은행, 연기금, 개인 또는 기타 투자자들에게 주식(투자액에 따라 소유권을 배분한다)이나 채권(장기적으로 돈을 빌릴 때 발행한다)을 팔아서 필요한 재원을 확보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이런 금융 시스템의 안전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고 투자자들이 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유로운 정보 접근을 보장하는 법률이나 규제를 상세히 마련해놓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은 그해에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총량을 가리킨다. 미국의 GDP는 1983년 3조 4천억 달러에서 1998년 8조 5천억 달러로 증가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이런 수치로는 경제의 건전성은 측정할 수 있지만 국가의 복지 수준을 평가할 수는 없다. 국내총생산은 경제가 생산해내는 재화와 용역의 시장가치를 말해주지만 국민들이 누리는 삶의 질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개인의 행복과 안전, 또는 깨끗한 환경이나 건강과 같은 더 중요한 변수는 그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



혼합 경제 : 시장의 역할


미국의 경제 시스템은 민간기업과 정부가 다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흔히 혼합 경제라고 표현된다. 사실 미국 경제 역사상 가장 지속적인 논쟁거리는 바로 공적렌瑛?부문의 상호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의 자유기업 시스템은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한다. 개인 기업은 최선을 다해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국가 총경제생산량의 4분의 2가 개인적인 용도로 개인에게 돌아간다(나머지 3분의 1은 정부나 기업에서 구매한다). 이처럼 소비자의 역할이 큰 국가는 특징상 ‘소비자 경제’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인들은 국가를 수립할 때부터 정부의 지나친 권력을 경계해왔고,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개인에 대한 정부의 권한도 제한하려고 노력해왔다. 더욱이 미국인들은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경제가 정부주도형 경제보다 더 효과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고 믿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인들은 경제 시스템이 자유로우면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자연스럽게 물건과 서비스의 값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거꾸로 말하면 가격은 기업에게 어떤 물건을 얼마큼 생산해야 할지를 말해준다. 만일 사람들이 그 경제가 생산해내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필요로 하면 가격은 올라간다. 그러면 이윤 추구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새로운 기업이나 경쟁기업은 구미가 당겨서 더 많은 양을 생산해낸다. 그러는 한편 사람들이 그 물건을 별로 원하지 않게 되면 가격은 떨어지고 경쟁사들은 그 사업을 포기하고 다른 물건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런 시스템을 시장경제라고 한다. 그와 반대 개념인 사회주의 경제는 정부의 소유권과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라는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사회주의 경제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수(tax revenue)에 의존하는 정부는 아무래도 가격 시그널에 주의를 기울이고 시장세력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민간기업보다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기업에도 한계는 있다. 미국인들도 어떤 일은 민간기업보다 정부가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왔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재판이나 교육(비록 사립학교나 학원이 많이 있긴 하지만), 철도 시스템, 사회통계, 국방과 같은 사업은 정부에서 직접 관여한다.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가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는 정부가 개입하여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받는다. 예컨대 ‘자연적인 독점(natural monopoly)’을 규제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정부는 독점금지법을 이용하여 어떤 기업이 다른 기업들과 연합하여 시장세력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해지는 것을 막는다. 또한 정부는 시장세력이 할 수 없는 문제를 처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개인적인 문제나 경제불황으로 일자리를 잃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복지와 실업보조금을 지급한다. 노령자나 빈곤층에게는 의료비의 상당부분을 대신 부담한다. 대기나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민간기업의 활동을 규제하기도 한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재산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낮은 금리로 융자해주기도 한다. 민간기업이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우주탐사 계획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런 혼합 경제에서는 개인이 소비자로서 선택을 할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입법부에 대한 투표권을 이용해서 경제를 이끌어가는 데 참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소비자들이 안전한 제품, 특정 산업에 의한 환경오염, 건강에 위협하는 요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정부는 소비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전반적인 공적 복지를 증진시킴으로써 그에 대응하고 있다.

미국 경제는 또한 다른 식으로도 변화하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들판에서 공장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서비스 산업으로 인구와 노동력이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에서는 사적럭坪?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농업이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수적으로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경제가 더 복잡하게 성장함에 따라 지난 1세기 동안 자영업자에서 다른 사람 밑에 고용되는 쪽으로 고용 형태가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



정부의 역할


소비자와 생산자가 경제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결정을 내리지만, 미국 경제에서 정부는 적어도 네 가지 영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안정과 성장

정부의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연방정부는 지속적인 성장과 높은 고용률, 물가안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속도를 조절한다. 지출과 세율을 조정하거나(재정정책) 통화의 공급을 관리하고 신용거래의 이용을 통제함으로써(통화정책) 그 과정에서 물가와 고용에 영향을 주는 경제성장률을 늦추거나 빠르게 할 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몇 년 동안은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실업률이 증가하는 경기침체가 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처럼 여겨졌다. 위기감이 점점 고조되자 정부는 지출을 늘리거나 감세정책을 통해, 또 통화량을 급속히 늘려서 소비자들이 더 많이 지출하게 함으로써 경제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1970년대에는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자 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의 조짐이 뚜렷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출을 줄이고 감세정책을 중단하여 통화량 공급을 조절함으로써 당장의 경기 후퇴를 각오하면서까지 인플레이션 조절에 더욱더 총력을 기울였다.

경제를 안정시키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1960년대에서 1990년대로 오면서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정부가 재정정책(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세입을 조절하는 정책)이 효과적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지출과 세율을 조절하게 된 이후로는 이런 선출직 관료들이 경제를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고인플레이션과 고실업률, 그리고 정부의 예산에까지 막대한 적자가 나자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로서의 재정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다. 그 대신 금리 등의 장치를 통해 통화공급을 조절하는 통화정책이 더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통화정책은 대통령이나 의회로부터 꽤 독립적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Federal Reserve Board)라고 하는 국가 중앙은행이 지휘한다.


규제와 통제

미국 연방정부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민간기업을 규제한다. 규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 경제적 규제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가격을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는 전통적으로 전기회사 같은 독점기업이 적절한 이윤을 확보하는 것 이상으로 가격을 올리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이따금 정부는 다른 종류의 산업에도 경제적인 통제를 가해왔다. 대공황 이후에는 수요와 공급이 급격히 변함에 따라 가격이 요동 치는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복잡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트럭운송이나 항공과 같은 산업은 가격을 터무니없이 할인하지 않도록 규제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적 규제의 또다른 형태인 반독점금지법은 시장세력을 강화하여 직접적인 규제가 불필요하도록 만든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경쟁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책략(영업)이나 합병을 시도할 때 정부와 각 정당들은 반독점금지법을 이용하여 저지한다.

정부는 또한 공공 보건과 안전,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을 유지하는 등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민간기업을 통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식품의약국(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은 몸에 해로운 약물 판매를 금지한다. 또 산업안정청(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은 근로자가 작업현장에서 재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미국 환경청은 수질과 대기 오염을 통제한다.

규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20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정책입안자들은 그동안 소비자의 희생을 무릅쓰고 항공이나 트럭운송 분야의 무능력한 기업들을 보호해온 경제 규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기술 발전으로 과거에는 자연적으로 독점할 수밖에 없었던 텔레커뮤니케이션과 같은 산업에서도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당연히 경제 규제를 약화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에는 양당의 정치지도자들이 대체로 경제적인 규제 철폐에 동의했지만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제에 대해서는 합의가 덜 이루어져 있었다. 사회적 규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몇 년과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와서야 그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할 당시에는 규제가 기업의 자유를 방해하고 비즈니스 비용을 증가시킨다는 이유로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가중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인들은 여전히 환경보호를 비롯해 특정 분야에서 새로운 규제를 만들도록 촉구하며, 계속해서 특정한 사건이나 추세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민들은 자신들이 뽑은 국회의원이 특정 사안에 대해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는다고 법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몇몇 개인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정부까지 나서서 건강을 해칠 위험이 많은 담배회사를 법원에 제소하였다. 그 결과 흡연과 관련된 질병 치료 때문에 장기간 의료비용을 부담해왔던 주정부는 거액의 재정적 보상을 받게 되었다.


직접적인 서비스

정부는 각 단계마다 직접적인 서비스를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연방정부는 국가 방위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연구에 비용을 지원하고, 우주탐사 계획을 주도하며, 근로자들의 직업훈련과 실업자의 구직활동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러한 정부의 지출은 지역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나아가 경제활성화의 전체적인 속도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주정부는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 보수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주정부와 농촌 혹은 도시의 지방자치단체는 공립학교의 재정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방자치단체(local government)는 주로 치안과 화재 예방의 책임을 맡는다. 이들 각 단계의 정부가 지출하는 비용은 지방과 지역 경제에 영향을 준다. 물론 연방정부의 결정이 경제적으로 더 큰 효과를 가져오지만 말이다.

연방정부와 주정부 그리고 지역자치단체의 지출은 1997년의 경우 국내총생산의 18퍼센트에 달했다.


직접적인 지원

정부는 기업과 개인도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한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거나 소규모 기업에게는 기술적인 지원을 해주고,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도 대출을 해준다. 정부가 후원하는 기업이 주택금융 기관으로부터 저당채권을 산 후 이를 일반 투자가들이 거래할 수 있는 유동화 증권으로 바꿀 수 있게 함으로써 주택 대출을 장려한다. 또한 정부는 수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해외로부터 수입하는 것을 제한하는 무역장벽을 철폐하도록 촉구한다.

정부는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준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세금으로 충당되는 사회보장제도는 은퇴한 노인들의 수입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호 프로그램인 메디케어(Medicare)는 의료비의 상당부분을 국가가 대신 부담해주는 것이다.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의료보호제도인 메디케이드(Medicaid)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주정부에서는 정신질환자나 중증 장애인을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연방정부는 빈곤한 가정에서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푸드 스탬프(Food Stamp)를 제공하며,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아이가 있는 저소득층 부모에게 생활보조금을 주고 있다.

사회보장을 포함하여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루스벨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루스벨트 개혁의 열쇠는 가난이 개인의 무능력보다는 사회적럭姸╂?원인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이런 신념은 뉴잉글랜드 청교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공은 하느님에게 은총을 받은 증거이며 실패는 하느님에게 노여움을 산 증거라는 보편적인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신념은 미국인의 사회적럭姸╂?관념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특정한 문제, 특히 복지정책을 둘러싼 토론에서는 과거의 신념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를 비롯해 개인과 가정을 위한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은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1963~1969 재임)의 ‘가난과의 전쟁’에서 출발하였다. 비록 그 프로그램 중에 어떤 것은 1990년대에 정부의 재정적자로 인해 다양한 개혁안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금도 미국 주요 정당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실직했으면서도 부유한 개인에 대한 복지혜택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의존성만 키우게 된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리하여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1993~2001 재임) 때 발효된 ‘미복지개혁입법(Welfare reform legislation)’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받는 만큼 일할 것을 요구하고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을 제한하고 있다.



가난과 불평등


미국인들은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모든 국민들에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미국 곳곳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빈곤은 이러한 자부심에 먹구름을 드리우기도 한다. 가난을 퇴치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다소 진전이 있었지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더 많은 일자리와 높은 임금을 제공해주는 경제호황기에도 가난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연방정부는 4인 가족의 기초생활 유지에 필요한 최저생계비를 책정해놓고 있다. 이는 생활비와 거주지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1998년에는 4인 가족의 1년 생계비가 16,530달러 이하일 때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다.

빈곤층의 비율은 1959년 22.4퍼센트에서 1978년 11.4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소폭의 변화만 있었다. 오히려 1998년에는 12.7퍼센트로 증가했다.

게다가 전체적인 수치는 더 심각해진 빈곤층의 주머니 사정을 드러나지 않게 만든다. 1998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4분의 1 이상(26.1퍼센트)이 빈곤하게 살았다. 비참하기는 하지만 이 수치는 1979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이다. 1979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31퍼센트가 공식적으로 빈민층으로 분류되었고 그나마도 1959년 이후로 가장 낮은 비율을 보였다. 특히 편모 가정은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쉽다. 이런 실정을 증명해주듯 1997년에는 아이들 5명당 1명(18.9퍼센트)이 빈곤층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이들이 36.7퍼센트, 남미계 어린이들은 34.4퍼센트를 차지했다.

어떤 분석가들은 공식적인 빈곤층 비율이 실제보다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수치는 현금 수입을 기준으로 측정했고, 푸드 스탬프나 의료보장, 공영주택처럼 정부에서 제공하는 복지 프로그램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으로는 필요한 식량과 의료혜택을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울뿐더러 공영주택의 보급률도 턱없이 낮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수입이 공식적인 최저생계비보다 많은 가정들도 주택대출금이나 의료보험을 납부하기도 어렵고, 이따금 굶기도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빈곤층 중에도 임시직이나 공식적인 통계로는 집계되지 않은 ‘지하’ 경제 부문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대가를 공평하게 배분해주는 것은 아니다. 1997년, 워싱턴에 있는 경제정책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전체 가족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부유층이 국가 수입의 47.2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통계가 나왔다. 이와 반대로 5분의 1에 해당하는 극빈곤층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국가 수입의 4.2퍼센트밖에 차지하지 않았고, 40퍼센트의 빈곤층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총수입의 14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미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번영을 구가했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불평등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었다. 세계적인 경쟁이 지속되면서 전통적인 제조업에 종사하던 근로자들이 일자리에 대한 위협을 받았으며, 임금도 계속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게다가 연방정부는 부유층의 희생으로 저소득층의 혜택을 늘리는 세금정책을 멀리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국내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을 줄였다. 그러는 사이에 부유층 가정들은 주식시장의 호황으로 더 많은 부를 쌓아갔다.

1990년대 말에 임금 수준이 급격히 높아짐에 따라, 특히 빈곤층에서 위와 같은 패턴이 역전되는 기미가 조금씩 엿보였다. 하지만 그런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정부의 성장


미국 정부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임 시절부터 실질적으로 성장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대공황의 실업과 가난을 종식시키기 위해 연방정부 차원에서 지원 프로그램을 많이 마련했고 기존의 프로그램을 더욱 확대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적인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정부의 외형은 더욱 성장했다. 때마침 전후에 도시와 교외 지역이 활발히 개발되면서 공적인 서비스를 더욱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은 정부로부터 학교와 대학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이끌어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과학과 기술 발전에 전폭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국가 기관이 신설되고, 1960년대에는 우주탐사부터 의료보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공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에는 마련되지 않았던 의료보장과 은퇴 프로그램에 대해 미국인들의 의존성이 높아지자 연방정부의 지출은 더욱더 많이 늘어났다.

미국인들은 워싱턴에 있는 연방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고 느끼지만 사실 고용률을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정부의 고용 인원이 눈에 띄게 증가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채용한 인원 때문이다. 1960년에서 1990년까지 주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고용한 사람들은 640만 명에서 1,520만 명으로 증가한 반면 연방정부 소속의 공무원은 24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1998년에는 연방정부가 축소되면서 인력이 270만 명 정도로 줄었다. 그런데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고용한 인력은 연방정부의 축소분만큼 충원되어 1998년에는 1,600만 명으로 증원되었다(미국 군인의 숫자는 베트남전쟁이 격렬했던 1968년에 최고를 기록하는데 당시 인원이 360만 명 정도였다. 그후로는 계속 줄어들어 1998년에는 140만 명이 된다).

확대된 정부 서비스로 인한 세금 인상, ‘큰 정부(big government)’에 대한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반감, 게다가 점점 더 강력해지는 공공 노조로 인해 1970년대와 1980년대, 1990년대의 정책입안자들은 ‘과연 정부가 필요한 서비스를 가장 효율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 주체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영화(privatization)’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정부의 특정 기능을 민간 부문으로 돌리는 세계적인 추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민영화는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필라델피아, 댈러스, 피닉스 같은 주요 도시에서는 원래 지방자치단체에서 수행하던 가로등 보수에서부터 쓰레기 소각, 데이터 처리, 교도소 운영까지 각종 업무를 개인업자나 비영리 단체에 이양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연방 기관은 민간기업처럼 운영방식을 바꾸는 것까지 모색했다. 예를 들어 우체국은 세금에 의존하기보다 자신들의 수익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공적인 서비스의 민영화는 모순점을 안고 있다. 옹호하는 사람들은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인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민간업자들에게 필수적인 수익성이 떨어지고, 또 민간업자들이 더 생산적이라는 근거도 없다고 주장한다. 공공 부문의 노조가 민영화에 반대하는 것도 예상했던 일이다. 그들은 민간업자들이 계약을 성사시키려고 일단 낮은 입찰가격에 굴복하지만 나중에는 가격을 올린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옹호론자들은 경쟁 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민영화가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고 응수한다. 정부는 이따금 민영화를 위협 수단으로 삼아 직원들의 생산성을 높이려고도 한다.

규제나 정부 지출, 복지개혁안에 대한 논란과 마찬가지로 국가 경제에서 정부의 적절한 역할은 미국이 독립국가가 된 이후로 200년 넘게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top


CHAPTER 3  미국 경제의 역사


미국 경제의 뿌리는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경제적 안정을 찾아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대륙은 처음엔 가까스로 수지가 맞는 식민지경제에서 소규모의 독립적인 농업경제로, 나중에는 매우 복잡한 산업경제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경제적 진화에 발맞추어 미국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구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면서도 정부의 개입 정도는 점점 더 커졌다.

북아메리카의 첫번째 주민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베링 해협이 있는 아시아에서 육로를 통해 2만 년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유럽 탐험가들은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곳이 인도인 줄로만 알고 그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이 토착 종족들은 소수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어떤 경우엔 다른 부족과 연합하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물물교환을 했고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전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도 말이다. 원주민들이 발달시켰던 경제 시스템은 그곳에 정착한 유럽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국을 가장 먼저 ‘발견’한 유럽인은 바이킹이었다. 그러나 1,000년경에 일어난 그 사건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 사회는 대부분 농업과 지주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아직 상업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터라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거나 정착할 만한 동기를 갖지 못했다.

1942년 이탈리아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깃발을 배에 꽂고 아시아로 가기 위해 남서쪽 항로를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그후 100년 동안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신대륙의 황금과 부, 명예와 영광을 찾아 유럽 대륙에서 건너왔다.

그러나 초기 개척자들은 북아메리카의 황무지에서 영광도 금도 찾지 못했으며, 대부분 정착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북미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1607년에 한 무리의 영국인들이 훗날 미국의 모태가 된 최초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제임스타운이라고 부르는 정착촌은 오늘날의 버지니아에 위치한다.



식민지 건설


초기의 정착민들은 다양한 이유로 신대륙에 건너왔다. 매사추세츠의 최초 이주자들은 신앙심이 두텁고 자기절제가 강한 영국인들로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버지니아를 비롯해 다른 이주민촌의 사람들은 주로 사업적인 모험을 위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자유와 부, 이 모두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영국인들이 정착에 성공하여 나중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특허회사(charter company)를 이용한 덕분이었다. 특허회사는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영국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주주들(보통 상인과 부유한 지주들이었다)이 세운 회사였다. 왕은 그들이 회사를 세우기 위해 자금을 조달할 때 경제적 권리뿐만 아니라 정치적렌濚萱?권위도 허가하거나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생각만큼 수익을 거두지 못하자 영국 투자가들은 식민지개발 허가증을 정착민들한테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비록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한몫했다. 어쨌든 식민주의자들은 그곳에 남았고 자신들의 삶과, 자신들의 마을과, 자신들의 경제를 일궈나갔다.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다.

초기 식민지의 번영은 모피 가공 무역 덕분이었다. 수산업도 매사추세츠가 부를 축적하게 된 일차적인 원천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전체로 보면 주로 소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생활했고,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했다. 몇몇 소도시나 북캘리포니아, 남캘리포니아, 버지니아의 대규모 농장에서는 담배나 쌀, 인디고(푸른색 염료)를 수출하고 생필품이나 사치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식민지가 성장하면서 보조적인 산업도 발달했다. 전문적인 제재소와 제분소도 여럿 등장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고기잡이 배, 그리고 나중엔 교역용 배도 만들기 위해 조선소를 세웠다. 또한 소규모 제련소도 설립했다. 18세기까지 지역마다 발전의 패턴을 달리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는 조선을 주업으로 하고 항해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메릴랜드나 버지니아,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농장(많은 농장이 노예를 이용했다)에서는 담배와 쌀, 인디고 농사를 했다.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델라웨어 같은 중부의 식민지는 곡물과 모피를 배로 수출했다. 노예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점차로 나아졌다. 사실은 영국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생활수준이 높았다. 영국인 투자가들이 철수했기 때문에 식민지는 이주민들 중에서 기업가들에게 개방되었다.

1770년경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는, 제임스 1세(1603~1625) 이후 영국의 정가를 뒤흔들었던 자치정부 운동에 동조할 만큼 정치적럭姸╂岵막?준비되어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세금과 여타 문제를 두고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영국이 정한 세율과 법규를 자신들의 뜻대로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 영국 정부와의 분쟁이 격화되자 어떤 사람들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 식민지가 독립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의 정치적 혼란과 마찬가지로 미국혁명(1775~1783)은 ‘생명과 자유와 부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르짖는 중산층이 등장함으로써 가능했다. 이 구호는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의 〈시민정부에 대한 제2논고(Second Treatise on Civil Government)〉(1690)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쟁은 1775년 4월에 벌어진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 군인들이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한 식민지군 무기보급소를 공격하여 식민지 민병대와 충돌했다. 그때 누군가가(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총을 쏘았고, 그것을 기화로 8년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 전쟁의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의 경제


1787년에 제정되어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는 미국 헌법은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천재의 작품이었다. 메인주부터 조지아, 애틀랜틱 해에서 미시시피밸리까지 전국에 설치되었던 경제특별허가지역은 이를테면 단일화된 ‘공동’ 시장이었다. 이곳에서는 관세도 없었고 주 간의 거래에 붙는 세금도 없었다. 그 외에도 헌법은 연방정부가 해외교역이나 주 간의 교역을 중재하고, 단일화된 파산법을 만들고 화폐를 발행하여 그 가치를 통제하고, 표준화된 도량형을 정비하고, 우체국과 철도를 건설하고, 특허권과 저작권을 관리하는 규정을 세우도록 명시해놓았다. 특히 20세기 말에야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지적 재산권’의 가치도 당시 사람들은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자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연방정부가 공개적인 보조금을 제공하고 수입품에 대한 보호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걸음마 단계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경제발전 계획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연방정부가 국립은행을 세우고 혁명전쟁시에 식민지가 떠안았던 공적 부채를 부담하라고 촉구했다. 새로운 정부는 해밀턴의 제안 중 몇 가지에 대해선 주저하기도 했지만, 관세 조항은 미국의 중요한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에 농부들은 국립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부자들의 뒤를 봐주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최초의 국립은행은 1791년에 허가를 받아 1811년까지 영업을 계속했고, 그후에는 후발 은행이 허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했다.

해밀턴은 미국이 운송려┒떱금융 등 다양한 산업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밀턴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일반 국민들을 정치적럭姸╂?독재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기본 철학을 갖고 있었다. 특히 소농을 ‘가장 귀한 시민’으로 칭송하였다. 1801년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1801~1809 재임) 그는 더욱더 지방분권의 중농민주주의를 장려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가자, 서남부로


면화는 남부에서 가장 먼저 소규모로 생산했는데,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가 원면에서 씨앗과 불순물을 분리하는 조면繰綿 기계를 개발한 후로 면화 재배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남부의 농장주들은 당시 서쪽으로 이주해가던 농민들에게 땅을 사들였다. 그런 다음 노예들을 이용해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했고 몇몇 가문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그 당시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모두 남부 출신들은 아니었다. 동부에서는 마을 전체가 이주하여 중서부의 비옥한 농토에 새롭게 정착하기도 했다. 흔히 서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거칠고 독립적인 성격에다 정부의 지배나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의 도움을 직럭A♣岵막?많이 받았다. 정부가 건설한 컴벌랜드 파이크(Cumberland Pike, 1818년)나 이리 운하(Erie Canal, 1825년) 같은 국립 도로와 수로는 새로운 정착민들이 서쪽으로 이주하고 훗날 서부의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많은 미국인들은 1829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류 잭슨을 영웅으로 여겼다. 그가 변두리 지역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잭슨 대통령(1829~1837 재임)은 해밀턴이 세운 국립은행의 후발 은행을 설립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농민들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을 때 잭슨은 은행의 허가권을 부활시키는 데 반대했으며 의회의 지지도 얻어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국가의 금융제도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었고 1834년과 1837년에는 산업계에 공황이 일어났다.

19세기 들어 미국 경제는 주기적인 경제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속히 성장했다. 새로운 발명품과 금전적 투자가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키고 경제성장을 일구어냈다.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시장이 끊임없이 개방되었다. 증기선 덕분에 강을 이용한 운송이 더 저렴하고 빨라졌지만 철도의 발달만큼 파급효과가 크지는 못했다. 전국으로 뻗어나는 철로 덕분에 새로운 영토가 계속 개발되었다. 운하나 도로와 마찬가지로 철도 역시 초기에 건설될 때에는 정부에서 토지를 무상불하해주는 식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더욱이 철도는 다른 교통수단과 달리 국내는 물론이고 유럽의 개인 투자가들의 구미를 당겼다.

변화무쌍한 시대답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계획들이 난무했다. 금융에 통달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큰돈을 벌었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저축했던 돈을 날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비전과 외국인 투자가 결합되고 금의 발견과 미국의 공적렌瑛?부가 투입되어 국가는 대규모로 철도를 건설하고 국가 산업화를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산업의 성장


유럽의 경우 산업혁명은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아주 빠른 속도로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인구의 16퍼센트는 도시 지역에 살았으며, 국가 수입의 3분의 1은 제조업에서 나왔다. 도시화된 산업은 주로 북동부에 몰려 있었다. 신발제조업, 모직과 면직물 산업이 주도적이었고 기계류 산업도 활발하게 발달했다. 노동력의 상당수는 이민자 출신들이었다. 1845년과 1855년 사이에 30만 명의 유럽 이민자들이 해마다 이주해왔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으며, 배를 타고 처음 도착한 항구 근처에 있는 동부의 도시에서 살았다.

한편 남부는 농업지대로, 자본과 공산품 등을 북부에 의존했다. 노예제도를 비롯해 남부의 경제적 수익은 남부가 연방정부를 장악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정치 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856년에는 산업화된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이 창당되었다. 1860년, 공화주의자들과 그들의 대통령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경제정책에 관해선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1861년 그들은 보호관세의 채택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1862년에는 최초의 퍼시픽 레일로드를 건설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1863년과 1864년에는 국립은행 규약의 초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1861~1865)에서 북부가 승리하자 국가의 운명과 경제적 시스템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남부의 대규모 목화 플랜테이션은 과거만큼 많은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에 북부의 산업은 전쟁 수요로 급격히 팽창하였다. 산업주의자들은 사회나 정치 문제를 비롯해 국가의 여러 분야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 남부의 농업귀족들은, 그로부터 70년 후에 만들어진 고전적인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감상적으로 묘사되었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발명과 발전, 그리고 실업계의 거물


남북전쟁 이후 급속히 이루어진 경제적 발전은 현대 미국 산업경제의 초석이 되었다. 새로운 발견과 발명품이 급증하면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렀다. 서부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석유가 발견되었다. 타자기도 발명되었다. 철도에서는 냉동차가 생겨났다. 전화와 사진, 전구도 발명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마차를 대신하는 자동차가 발명되었고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빛나는 위업과 함께 국가의 산업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남부에서 켄터키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산맥에는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드웨스트 위쪽의 레이크 슈피리어 지역에서는 대규모 철광석 광산이 개발되었다. 이 두 가지 원료를 한군데로 모아 철강을 생산해내는 제철소도 번성했다. 대규모 동과 은 광산도 개발되었고, 뒤이어 납과 시멘트 공장들도 생겨났다.

산업이 번성함에 따라 대량생산 방식도 개발되었다. 19세기 말, 과학적 경영의 개척자인 프레드릭 W. 테일러(Frederick W. Taylor)는 근로자들에게 다양한 업무를 배분한 다음 좀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진정한 대량생산 방식은 1913년 헨리 포드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는 자동차를 생산할 때 종업원들이 한 가지의 간단한 작업만 담당하는 작업 라인을 설치하였다. 게다가 헨리 포드는 종업원들에게 일당 5달러라는 비교적 후한 임금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사도록 함으로써 사업을 확장하였다. 당시로서는 선견지명이 있는 경영방식이었다).

19세기 후반부의 ‘부호의 시대’에는 재계 거물의 신기원을 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거대한 재정왕국을 건설한 재계 거물을 이상적인 인물로 영웅시했다. 그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잠재력 있는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석유를 그렇게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경제적 성공과 권력 추구라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경쟁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록펠러나 포드 외에도 제이 굴드(Jay Gould)는 철도로 많은 돈을 벌었고 J. 피어폰트 모건(J. Pierpont Morgan)은 금융업으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철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어떤 거물은 그 시대의 사업상 도의를 따르는 정직한 사람이었는가 하면 어떤 거물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힘과 뇌물과 배신을 이용하기도 했다. 좋든 나쁘든 사업상의 이권은 정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건은 가장 화려한 명성을 누렸던 기업가로, 개인으로도 사업가로도 대단한 번영을 구가했다. 그와 동료들은 도박을 하고 요트를 타고 사치스런 파티를 열고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으며 유럽의 예술작품들을 사들였다. 반대로, 록펠러나 포드 같은 사람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소박한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고수했으며, 독실한 신도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꼈다. 인간적인 덕을 쌓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근면과 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훗날 그들이 남긴 유산은 미국에서 가장 큰 자선 재단을 설립하는 기금으로 쓰였다.

유럽의 상류층 지식인들은 대체로 사업을 경멸하는 편이었지만, 비교적 유동적인 조직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미국인들은 돈 버는 방법이라면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그들은 사업적인 모험과 흥미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생활수준의 향상 또는 안락한 삶 같은 잠재적 대가를 즐겼고 성공이 가져다줄 갈채를 마음껏 누릴 줄 알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미국 경제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자 자유분방하던 재계 거물들은 미국인의 우상으로서 그 빛을 잃었다. 주식회사의 등장과 함께 재계 판도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가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철도 사업이었으며, 이후 여러 분야에서 생겨났다. 경제계의 귀족들은 월급을 많이 받는 관리자이자 나중에는 회사의 대표가 되는 ‘전문가 출신 관리자’들로 대체되었다. 한편 주식회사가 부상하면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은 비즈니스의 권력과 영향력에 반작용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기술혁명은 새로운 기업가문화를 낳았으며, 또 한차례 부호의 시대를 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게이츠가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야말로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 말 그의 회사는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규제국에 의해 경쟁사를 협박하고 독점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제소되었다. 하지만 게이츠는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자선기금 기부자 명단에서도 최고가 되었다. 게이츠처럼 오늘날의 미국 사업가들은 대부분 고자세로 살지 않는다. 그들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지만 학교나 자선단체의 이사로 봉사하기도 한다. 또한 국가 경제나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정부 관료와 의논하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틀림없이 그들은 정부에 영향을 주지만 부호 시대의 몇몇 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개입


미국 역사상 초기에는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이 교통을 제외한 민간 부문의 사업에 연방정부가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꺼렸다. 그들은 정부와 법을 제정하고 질서 유지에 필요한 일이 아닌 한 경제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레세페르(laissez-faire, 무간섭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후반 소규모 자영업자나 농민, 노동단체가 정부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중재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중산층이 생겨났다. 그들은 비즈니스 엘리트와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벌이는 중서부 및 서부의 농부, 노동자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진보당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람들은 경쟁과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정부가 경제 문제에 개입하길 원했다. 한편 그들은 공공 분야에서 벌어지는 부패와도 맞서 싸웠다.

1887년 의회는 철도회사의 관행을 규제하는 주간통상법(the Interstate Commerce Act)을 제정했고, 1890년에는 한 개의 대기업이 하나의 사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셔먼 반독점법, Sher-man Antitrust Act)을 발효시켰다. 그러나 이런 법은 1900년과 1920년 사이에 공화당 대통령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901~1909 재임), 민주당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913~1921 재임)과 기타 진보당의 이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강력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의 규제 기관인 주간통상위원회(the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 식품의약국,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와 같은 기관들은 모두 그 시기에 창설되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일은 특히 1930년대 뉴딜 정책이 시행되던 기간에 많이 증가하였다. 1929년의 증권시장 붕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적 혼란기인 대공황(1929~1940)을 초래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펼쳤다.

오늘날 미국 경제를 특징짓는 주요 법안이나 기관들이 탄생한 것은 대부분 뉴딜 시대였다. 뉴딜 법안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금융, 농업, 공공복지 분야까지 확대시켰다. 그리고 시간당 수당에 대한 최소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철강이나 자동차, 고무산업으로 노동운동이 확대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국가가 경제를 움직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나 기관들은 거의 그 시기에 창설되었다. 여기에는 주식시장을 감독하는 증권거래위원회, 은행 예금을 보증하는 연방예금보험공사, 그리고 노인들이 젊었을 때 납부한 기금을 가지고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사회보장 시스템 등이 있다.

뉴딜 법안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기업과 정부가 서로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고심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 중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폐기되기도 했다. 뉴딜 법안 가운데 생명력이 가장 짧았던 것은 국가산업부흥법(the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으로, 국가의 감독하에 기업의 관리자와 근로자들이 갈등을 해소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법안이었다. 미국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기업과 노동자와 정부가 타협했던 것처럼 전체주의로 기울었던 적은 없지만, 뉴딜 정책의 제안자들은 기업과 노동자와 정부라는 경제 주체들 사이에 새로운 권력을 분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일은 전쟁이 일어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당시에 전시생산국(the War Production Board)은 군수품 조달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지도록 국가의 생산능력을 조절하였다. 따라서 소비자들 위주로 생필품을 생산하던 공장에서 군사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에서는 탱크와 비행기를 만들었고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의 무기고’가 되었다. 국가의 수입이 증가하자 정부는 생필품 부족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것을 막으려고 물가관리국(Office of Price Administration)을 신설하여 주택임대료를 억제하고 설탕에서 석유까지 모든 생필품을 배급제로 바꾸었으며 다른 경우에도 물가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후 경제 : 1945∼1960년


많은 미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군사비 지출이 삭감되면서 곧장 대공황 때의 시련기로 되돌아가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억눌려왔던 소비욕구가 분출하면서 전후 경제성장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자동차산업은 성공적으로 원래의 자동차를 만드는 일로 다시 돌아갔고, 항공기 제작이나 전자제품 생산과 같은 새로운 산업이 성큼성큼 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주택자금을 쉽게 대출해주자 주택건설 붐이 일어났다. 국가의 총생산량이 1940년의 2천억 달러에서 1950년이 되자 3천억 달러로, 그리고 1960년에는 5천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와 함께 ‘베이비 붐’이라고 하는 전후 출산율이 크게 증가하면서 소비자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더 많은 미국인이 중산층 대열에 합류했다.

군수품 생산의 필요성은 군수산업을 거대하고 복잡하게 발전시켰다(군수산업이라는 용어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만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위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미국은 소련과 냉전체제에 돌입함으로써 실질적인 전투능력을 유지해야 했다. 또 수소폭탄 같은 정교한 무기를 연구하기 위해 군사비 지출을 줄이지 않았다. 더욱이 마샬 플랜(Marshall Plan)에 따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 국가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미국 물자의 시장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한 정부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1946년에 제정된 고용법은 ‘고용과 생산과 구매력을 최대한 장려하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미국은 전후에 국제적인 통화관리를 재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선두에 서서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l Monetary Fund)과 세계은행(World Bank)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이 기구들은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개방경제를 보장하기 위한 취지로 세워졌다.

그러는 사이 기업은 합병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기업들은 거대하고 다양한 복합기업으로 합병되었다. 예를 들어 국제 전신전화회사(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는 쉐라톤 호텔과 콘티넨탈 은행, 하트포드 화재보험, 아비스 렌터카 등의 여러 기업을 사들였다.

노동력의 성격도 크게 변화하였다. 1950년대 들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제조업에 종사는 근로자들의 숫자에 육박하더니 얼마 안 있어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더 많아졌다. 1956년경 미국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생산직보다 화이트칼라 위주였다. 동시에 노동조합은 장기고용 계약을 맺고 직원들에게 다양한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농민들에게는 어려운 시기가 닥쳐왔다. 농업이 대규모로 기업화됨에 따라 곡물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생산되었다. 소규모 가족 영농은 점점 더 경쟁력을 잃었고, 결국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났다. 그 결과, 1947년에는 790만 명이던 농업인구가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1998년에는 겨우 340만 명이 농업 관련 일에 종사했다.

농민이 아닌 사람들도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핵가족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도심을 떠나 교외로 이주했다. 에어컨이 발명되자 남부와 남서부의 휴스턴, 애틀랜타, 마이애미, 피닉스와 같은 이른바 ‘선 벨트(Sun Belt)’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정부의 주도하에 고속도로가 건설되자 교외 지역으로 나가는 일이 한결 쉬워졌으며 산업 형태도 변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는 8개밖에 없던 쇼핑센터가 1960년에는 3,840개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사람들이 교외로 이주하고 많은 산업들도 이를 뒤따라가자 자연스럽게 도시공동화가 진행되었다.



변화의 계절 :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인들에게 1950년대는 만족스러웠던 시기인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대격변의 시대였다. 세계적으로 신생국가가 탄생했으며 기존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이 일어났고, 미국에 맞먹을 만큼 경제적인 강국으로 성장한 나라도 생겨났다. 또한 경제력 있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군사력만이 성장과 확대의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인식이 점점 커져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1961~1963 재임)은 강력한 통치력을 지니기 위해 행동주의자적인 접근방법을 활용했던 선도적인 인물이다. 그는 1960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프런티어’의 도전에 대응하라고 외쳤다. 대통령이 된 그는 정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삭감함으로써 강력한 경제성장책을 썼으며, 노령자를 위한 의료 지원을 강력히 지시하고 대도시 빈민촌을 구제하며 교육 기금을 확충했다. 미국인을 개발도상국으로 파견하여 지원하려는 케네디의 비전은 평화봉사단의 설립으로 현실화되긴 했지만 그가 제안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실행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또 케네디는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에 착수했다. 그가 죽은 후에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은 소련을 뛰어넘었고 1969년에는 미국인 우주비행사가 달에 착륙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63년 케네디의 암살로 국회는 그의 입법안을 대부분 법률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후임인 린든 베인즈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63~1969 재임)은 더 많은 시민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나누어주는 ‘그레이트 소사이어티(Great Society)’ 정책을 펼쳤다. 정부가 메디케어(고령자를 위한 의료보험제도), 푸드 스탬프(빈곤층을 위한 식량지원), 수많은 교육사업(학교나 대학 설립은 물론 학생들을 지원하는 사업)과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시하다보니 연방정부의 지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면서 군사비 지출도 늘어났다. 케네디가 재임할 당시엔 소규모 국지전으로 시작했던 것이 존슨 재임 기간에는 군사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비 지출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난과의 전쟁과 베트남전쟁 모두 단기간에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책으로 세금을 인상하는 데 실패하면서 성장률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1973년과 1974년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회원들 간에 석유생산량을 줄이기로 결정함에 따라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고 에너지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심지어 생산량 감축이 끝난 후에도 에너지 가격은 계속해서 오르고, 거기다 인플레이션까지 겹쳐서 실업률도 높아졌다. 연방정부 예산은 적자였고 외국과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주식시장은 침제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지지부진하게 1975년까지 계속되었고 탄핵 위기에 처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Richard Nixon, 1969~1974 재임)은 사임했고, 미국인들이 1년 넘게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가는 경제문제를 비롯해 어떠한 사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에서부터 강철,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값도 싸고 품질도 좋은 수입품들이 늘어나자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기업활동이 침체되고 실업률이 계속해서 높아지는 경제 상황을 가리켜 ‘스테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한다. 사실 인플레이션은 그 자체로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더 많다. 사람들은 물건 가격이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 생각하고 더 많이 사들인다. 이렇게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도 상승하고, 임금 인상에 대한 요구도 생겨나며 물가는 더욱 오르고 다시 수요와 가격 등이 따라서 올라가게 된다. 근로계약서에는 생계비에 관한 항목이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고, 정부는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척도인 소비자 물가지수에 따라 사회보장 따위의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은 근로자나 퇴직자들이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도록 도와주긴 했지만 끝없는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방치한 꼴이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기금은 자꾸만 늘어나서 적자 예산이 되었고, 정부는 차관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자 압박을 받으며, 기업과 국민들의 부담은 더욱 증가했다. 에너지 가격과 이자율이 높아지면서 기업의 투자는 감소하고 실업률은 위험수위까지 올라갔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취임한 지미 카터(Jimmy Carter, 1977~ 1981 재임) 대통령은 경제의 악순환을 타파하고 정부 지출을 늘려 실업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으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근로자들이 스스로 임금을 내리고 생산자가 가격을 낮추도록 정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대신 항공, 화물트럭, 철도를 비롯해 여러 산업의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완만하게 인플레이션을 잡았던 것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산업은 그동안 요금이나 노선 등에서 정부의 철저한 보호와 규제를 받아왔다. 이러한 규제 철폐는 카터 행정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80년대에는 정부가 은행 이율이나 장거리통신 요금에 대한 통제를 완화시켰으며 1990년대에는 지역전화 요금에 대한 규제마저 풀어주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통화 공급을 단속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통화량의 공급을 억제함으로써 이율을 올렸다. 그 결과, 소비자 지출과 기업 대출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경제는 곧 깊은 침체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0년대 경제


1982년 내내 미국은 깊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년도에 기업은 50퍼센트나 도산했다. 특히 농민들이 타격을 많이 입었다. 농산물 수출이 줄어들고 곡물 가격이 떨어졌으며 이자는 올라갔다. 이에 정부는 급히 해결책을 모색했다. 경기 하락을 해결하기 위해 급히 처방한 치료약은 삼키기엔 힘이 들었지만, 경제가 처해 있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었다. 1983년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경제는 반등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성장도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내내,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도 인플레이션 비율은 5퍼센트 아래를 밑돌았다.

1970년대의 경제 격변은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인들은 1980년에 카터를 낙선시키고, 헐리우드 배우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1981~1989 재임)을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연방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레이건 정부는 세율을 줄여서 수입을 늘리는 공급 측면 경제학 이론에 충실한 경제정책 기조로 나아갔다. 이 이론은 세율을 낮춤으로써 사람들이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도록 하고, 이렇게 하면 결국 더 많은 저축과 투자가 이루어져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레이건이 추진한 감세정책은 주로 미국의 부유층에게로 이익이 돌아갔지만, 감세정책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기업투자가 많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일자리도 많아지고 임금도 올라가기 때문에 저소득층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건이 생각했던 국가적 아젠다의 중심주제는 연방정부가 그동안 너무 비대해졌고 경제에도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초에 그는 세금을 삭감하는 동시에 사회 프로그램을 수정하는 대수술에 들어갔다. 또 임기 내내 소비자나 근로현장, 그리고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 규제를 줄이거나 철폐하는 데 주력했다. 한편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의 전철을 밟아 군사력 증강에 소홀해질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국방비 예산을 크게 늘렸다.

감세에다 높은 국방비 지출은 국내 정책에 지출해야 할 예산을 더욱더 삭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결국 연방 예산적자는 1980년대 초의 경기침체기 때보다 훨씬 불어나게 되었다. 연방정부의 적자는 1980년에 740억 달러에서 1986년에는 2,210억 달러에 이르렀다. 1987년에는 1,500억 달러로 떨어졌지만 이후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연방정부의 과다한 지출과 차입이 인플레이션을 다시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물가상승을 조절하기 위해 불침법을 서면서 위험신호가 보일 때마다 재빨리 이자율을 인상했다. 의장인 폴 볼커(Paul Volcker)와 그의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의 지휘하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경제의 교통경찰 역할을 수행하면서 국가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데 의회나 대통령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1980년대에 비로소 경제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농민들, 특히 소규모 가족영농을 하는 농민들은 계속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특히 1986년과 1988년에 미국의 중부 지방에 심각한 가뭄이 닥쳤고 몇 년 후에는 홍수를 겪었다. 몇몇 은행은 금융 경색에 무분별한 대출 관행으로, 특히 저축대부조합이라고 하는 곳은 부분적인 규제완화 이후 흥청망청 대출을 남발하다가 휘청거리기도 했다. 연방정부는 이런 금융 기관들의 문을 닫게 하고, 납세자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면서 예금자들에게 예금액을 지급해주었다.

레이건과 그의 후임자 조지 부시(1989~1993 재임) 대통령 임기중에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했고, 1980년대에도 1970년대에 국가를 괴롭혔던 경제적 병폐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은 1970년대 들어서는 10년 중 7년 동안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무역적자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게다가 빠르게 성장한 아시아는 경제의 발전소였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특히 장기적인 경제계획과 기업, 정부, 금융이 긴밀히 관계를 맺고 효율적으로 협력했던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 경제성장의 대안적인 모델처럼 보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기업들의 주식 가격을 끌어내린 뒤 재가공하여 경영권을 되팔거나 분해하는 ‘기업사냥꾼’이 등장했다. 기업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자기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거나, 아예 기업사냥꾼에게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이런 다툼을 우려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기업사냥꾼이 좋은 기업을 망가뜨리고 근로자들에게 슬픔을 안겨주며 기업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냥꾼이 경제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이 부실한 기업을 인수하여 조직을 슬림화한 후 다시 수익을 내는 회사로 변신시키거나, 투자자들에게 되팔아서 이익을 얻을 수도 있게 하고 그들이 재투자하여 생산성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1990년대를 지나서


1990년대에는 새로운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 1993~2001 재임)이 있었다. 신중하고 온건한 민주당원이었던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과 몇몇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의료보험 수혜자를 확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의회에 의해 좌절된 후 클린턴은 미국에서 ‘큰 정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몇몇 부문에서 시장세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의회와 함께 지역 통신 서비스를 경쟁체제로 개방하였다. 또한 복지혜택을 줄이기 위해 공화당과 손을 잡기도 했다. 클린턴은 지속적으로 연방정부의 업무 영역은 줄여나갔지만 국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뉴딜 정책의 중요한 혁신 과제 대부분과 그레이트 소사이어티 정책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계속해서 경제활성화의 전반적인 속도를 조절하고 인플레이션이 재발되는 징후가 보이는지 감시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 경제는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급속히 튼튼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몰락하면서 그들과 교역할 기회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기술 발전은 복잡하고 새로운 전자제품의 영역을 넓혀주었다. 원격통신과 컴퓨터 네트워킹 분야의 기술혁신은 방대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산업을 발전시켰고 기업들의 운영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기업의 수익은 놀랄 만큼 증가했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낮은 실업률, 거기에다 높은 수익성으로 주식시장이 폭등했다.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1970년대에 겨우 1000포인트였던 것이 1999년에는 11,000포인트를 기록했고,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부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반면에 1980년대 미국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던 일본 경제는 장기 침체로 돌입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더 유연하고 덜 계획적이고 더 경쟁적인 미국 방식이 새로운 세계경제 통합 환경에는 더 나은 전략이라고 결론지었다.

미국의 노동력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특색 있게 변화했다. 장기적인 추세에 따라 농민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게 점원에서 재정분석가까지 다양한 서비스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더이상 철강과 신발이 미국의 제조업을 이끌어가지 않았으며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1992년에 2,900억 달러로 최고를 기록한 후 연방예산은 경제 성장으로 세수는 늘어났지만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1998년 정부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비록 베이비 붐 세대에게 지급할 미래의 사회보장기금 형태로 많은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빠른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낮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자 이에 놀란 경제학자들이 지난 40년 간의 경험을 근거로 들며 과연 미국의 ‘새로운 경제’가 언제까지 빠른 성장을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미국 경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세계경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무역장벽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했다. 북아메리카 자유무역협정(NAFTA)은 미국과 가장 큰 교역상대국인 캐나다와 멕시코 간의 경제적 유대를 한층 더 돈독히했다. 19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아시아는 유럽과 함께 완성품의 주요 공급자이자 미국 수출품의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세계 통신 시스템은 세계의 자본시장을 하나로 연결시켜주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계경제 통합이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되지만 상호의존도가 깊어지면 그만큼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첨단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미국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은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지만 전통적인 제조업 부문에서는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임금 수준이 내려가는 추세이다. 1990년대 말 일본과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이 휘청거리자 세계 금융시스템에 충격파가 밀려왔다. 미국의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국내 경제의 방향을 잡는 데 있어 세계경제의 상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여전히 미국인들은 자신감을 회복한 채 1990년대를 마감했다. 1991년 3월부터 1999년 말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미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긴 평화기를 누렸다. 1999년 11월 현재 실업률은 겨우 4.1퍼센트로 3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소비자물가는 1998년에 겨우 1.6퍼센트 상승했고(1964년 이후 1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조금씩 증가했다), 1999년에 다소 빠르게 상승했다(10월에 2.4퍼센트). 여전히 많은 도전들이 도사리고 있지만 미국은 20세기를 헤쳐오면서 더욱 튼튼해졌다.


top


CHAPTER 4  소기업과 주식회사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기회의 땅에 산다고 믿어왔다. 훌륭한 아이디어와 결단력, 그리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창업을 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이런 기업가 정신에 대한 믿음은 자영업자에서부터 세계적인 복합기업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17세기와 18세기에 사람들은 황무지에 터전을 닦고 시련을 극복하며 생활했던 개척자들을 존경했다. 19세기에 변경 지역에 소규모 영농기업들이 급속히 늘어났던 것처럼 자작농을 하는 농부들이 경제적 개인주의자들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자 자영업의 꿈은 소규모 가게 주인, 독립적인 수공업자, 그리고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전문가 등으로 바뀌었다.

20세기에는 19세기 말에 시작된 추세가 지속되어 경제활동의 규모나 복잡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많은 산업 분야에서 작은 기업은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무엇보다 다양한 취향을 지닌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그런 소비자의 요구에 맞는 물건을 효율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을 만큼의 규모를 갖출 필요가 생겼다. 이렇게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현대의 기업들은 수백 명 심지어 수천 명의 근로자를 고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의 경제는 1인 단독 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규모를 자랑한다. 1995년에는 비농업 분야의 1인 기업이 1,640만 개, 동업자 기업은 160만 개, 주식회사는 450만 개로 총 2,250만 개의 독립 기업이 존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소기업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미국 경제가 거대한 주식회사에 의해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다. 모든 독립기업의 99퍼센트는 직원 수가 500명 미만인 기업을 말한다. 미국 소기업청(SBA:U.S.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에 따르면 미국 근로자의 52퍼센트가 소기업에서 근무한다. 20명 미만의 회사에 다니는 미국인은 1,960만 명이고, 직원 수가 20명에서 99명 사이인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은 1,840만 명이며 직원 수가 100명에서 499명 이내의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1,460만 명이다. 그런가 하면 직원 수가 500명 이상의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은 4,770만 명이다.

소기업은 미국 경제가 역동성을 잃지 않는 원천이 되고 있다. 소기업은 1990년부터 1995년 사이에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의 4분의 3을 창출했으며 1980년대보다 경제성장에 더 많이 공헌을 한 주역이었다. 또한 새로운 그룹이 경제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예컨대 여성들은 주로 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여성이 창업주인 기업은 약 810만 개로 1987년과 1997년 사이에 89퍼센트나 증가했고, 여성 소유의 개인회사는 2000년까지 모든 벤처기업의 35퍼센트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소기업은 나이 든 근로자나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고용하는 경향이 있다.

소기업의 장점은 변화하는 경제환경에 재빨리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객들을 일 대 일로 만나며, 특히 고객 한명 한명의 욕구에 맞출 수 있다. 또한 소기업(예를 들어 컴퓨터 관련 벤처인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 그리고 다른 첨단기술 기업군)은 기술혁신의 원천이다. 많은 컴퓨터 관련 산업의 혁신자들은 처음에는 땜장이처럼 차고에서 손으로 기계를 조립하다가 갑자기 크고 강력한 기업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빠른 속도로 국가와 세계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 포장배달 서비스 회사인 페더럴 익스프레스, 스포츠 의류 제작업체인 나이키, 컴퓨터 네트워킹 회사인 아메리카 온라인, 아이스크림 제조업체인 벤 앤 제리 등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많은 소기업들이 실패를 경험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사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낙인 찍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업 실패는 사업가로서 경험을 쌓고 훗날 재도전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으로 본다. 경제학자들은 실패를 일컬어 더 유능한 인재로 육성하려는 시장세력의 배려라고 설명한다.

소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은 의회나 주 입법부에서 소기업을 위한 강력한 로비 세력으로 바뀐다. 그 결과, 보건안전법 같은 연방정부 규제에서 소기업은 제외되는 혜택을 누렸다. 또한 1953년 의회에 신설된 소기업청은 소기업을 신설하고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전문적인 지식과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연방정부의 계약 금액 중 35퍼센트는 소기업에게 할당된다). 예를 들어 소기업청은 자금을 융통하거나 건물, 기계류, 장비를 구입하는 소기업을 위해 100억 달러의 대출기금을 조성하였다. 또한 소기업청이 후원하는 소기업 투자회사는 벤처 캐피털의 형태로 20억 달러를 투자한다.

소기업청은 아프리카, 아시아, 히스패닉계의 소수 이민자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다. 수출잠재력을 가진 소기업을 위해 시장을 주선해주고 조인트 벤처의 기회도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게다가 은퇴한 기업가들이 신설했거나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기업에 경영지원을 해주는 에이전시 스폰서 프로그램도 있다. 소기업청은 또한 주립 관계 기관이나 대학들과 함께 900군데의 소기업 발전센터를 운영하며 기술과 경영 지원을 해주고 있다.



소기업의 구조


개인사업주

대부분의 기업은 개인사업이다. 즉, 한 사람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기업의 소유주는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사장이 혼자서 책임진다. 그는 수익을 추구하지만, 만약 모험이 실패로 끝나면 돈을 잃는다. 사업체를 팔아서라도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자기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개인사업은 다른 사업구조보다 특별한 이점이 있다. 개인사업은 자기가 주도권을 갖고 사장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다. 소유주가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지 않고 재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으므로 유연성이 있는 편이다. 법적으로 개인사업주(sole proprietor)는 주식회사보다 세금을 덜 낸다. 그리고 고객들은 책임이 있는 개인이 일을 더 잘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개인회사에 더 끌린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사업구조에는 단점도 있다. 개인회사는 소유주가 사망하거나 능력이 없을 경우, 비록 다른 사람이 그 재산을 물려받고 계속해서 사업을 해나가더라도 법적으로는 회사의 생명이 끝난다. 또한 개인회사는 일반적으로 소유주가 저축하거나 빌릴 수 있는 돈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큰 규모의 회사로 키워나가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동업회사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장하는 방법으로, 2명 이상의 동업자가 함께 동업회사(business partnership)를 만드는 것이 있다. 동업은 복수의 소유주가 지닌 재능을 결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명의 동업자는 생산을 맡고, 다른 동업자는 마케팅을 맡는 식이다. 동업기업은 정부가 주식회사에 요구하는 보고사항을 대부분 면제받으며, 주식회사에 비해 세금에 있어서도 상당한 우대를 받는다. 동업자는 자신의 지분에 따라 세금을 내지만 기업 자체에 대한 세금은 없다.

주마다 동업회사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동업자는 보통 각 동업자의 의무를 명시해놓은 법적 동의서에 서명을 한다. 이때 돈만 투자했지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침묵의 동업자’도 서명을 해야 한다.

동업이 갖고 있는 중요한 단점은 각 동업자가 다른 동업자의 채무에 대해 변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며, 법적으로는 두 동업자의 행위를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 만일 한 동업자가 돈을 함부로 썼을 경우 다른 동업자도 그 빚을 함께 갚을 의무가 있다. 또 동업자끼리 지속적으로 심각한 불화를 겪을 경우에도 중요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프랜차이즈와 체인스토어

성공적인 소기업은 이따금 프랜차이즈라고 알려진 형태를 통해 성장하기도 한다. 프랜차이즈 기업의 전형적인 경영 형태를 보면, 어떤 성공한 기업이 개인 혹은 소수의 기업가들에게 상호와 판매 품목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판매액을 일정 비율로 나눈다. 모기업은 마케팅 비결과 명성을 대여하고,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사업권자는 개인적으로 판로를 관리하고 재정적인 책임을 지며 확장과 관련된 위험부담도 진다.

아무 기반도 없이 사업을 시작하는 것에 비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면 비용이 더 많이 들지만 운영자금도 덜 들고 실패할 확률도 줄어든다. 프랜차이즈 사업은 광고나 유통, 종업원 교육과 같은 이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는 너무 복잡하고 광범위해서 누구도 그 범위에 대해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소기업청에 따르면 미국에는 1992년 당시 53만 5천 군데의 프랜차이즈 회사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딜러에서부터 주유소, 레스토랑, 부동산회사, 호텔, 모텔, 세탁소에 이르기까지 그 업종이 매우 다양하다. 1970년보다 35퍼센트가 증가한 수치이다. 1975년부터 1990년 사이에 프랜차이즈 소매점의 판매액은 비프랜차이즈 상점의 매출액을 능가했고, 2000년에는 미국 소매점이 거둔 매출액의 40퍼센트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성장 속도가 빠를수록 프랜차이즈점이 아닌 다른 사업 기회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프랜차이즈 기업은 1990년대 들어 증가 속도가 꺾였다. 그래서 어떤 프랜차이즈 기업은 합병을 시도했고 동종업계의 다른 가맹점을 사들여 자신들의 가맹점망을 늘리기도 했다. 시어스 로벅 앤 컴퍼니(Sears Roebuck & Co.)처럼 기업이 소유한 체인스토어의 경우엔 가맹점이 되려면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이런 체인점은 대량구매를 해서 많은 양을 판매하고 스스로 서비스를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소유의 상점보다 가격을 더 낮출 수 있다. 세이프웨이(Safeway) 같은 체인 슈퍼마켓의 경우에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격을 낮추는 바람에 주변의 자영 식품점들이 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많은 프랜차이즈 기업들이 살아남는다. 어떤 개인사업자는 다른 사업자 혹은 주식회사와 손을 잡고 체인점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체인점은 흔히 특화된 시장을 공략한다.



주식회사


소규모나 중간 규모의 회사들도 많지만 대기업 또한 미국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대기업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소규모 기업보다 더 효율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은 대량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판매 단가를 낮출 수 있고, 그에 따라 낮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 더구나 많은 소비자들이 인지도가 높고 품질이 보장되는 대기업 제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시장에서도 우위를 점한다.

대기업은 소기업보다 더 많은 자금원을 갖고 신제품에 대한 조사와 개발을 하기 때문에 경제 전반에 있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다양한 일자리와 더 높은 직업안정성, 임금 그리고 건강과 은퇴에 대한 수당도 더 많이 제공한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대기업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대기업이 경제의 건전성에 끼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대기업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신생기업을 억누르거나 소비자의 선택권을 빼앗아갈 것을 경계한다. 더욱이 대기업은 빠르게 변화하는 경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의 자동차회사들은 가솔린 가격이 오르면 연료 소모가 적은 차를 요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한발 늦었다. 그 결과 외국, 주로 일본의 자동차회사에게 내수시장을 상당부분 빼앗겨버렸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대기업이 주식회사 형태이다. 주식회사는 특정한 법률 요건을 갖춰야 하며, 50개의 주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든 설립 인가를 받아야 하고, 법적으로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즉, 주식회사는 자신만의 재산을 가지며 법정에 제소할 수도 있고 제소를 당하기도 하며, 계약을 맺을 수도 있다. 주식회사는 법적인 지위를 갖기 때문에 소유주는 주식회사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부분적으로 면제받기도 한다. 또 주식회사의 소유주들은 재정에 대해서도 유한책임을 갖는다. 예컨대 소유주는 회사의 채무에 대해 책임이 없다. 만일 주주가 주식회사의 주식 10주를 100달러에 샀는데 회사가 파산을 했다면 주주는 100달러의 투자액을 잃게 되지만, 단지 그뿐이다. 주식회사의 주식은 양도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소유주가 사망하거나 이해관계가 없어지더라도 주식회사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소유자는 자신의 지분을 언제든지 팔 수 있으며 상속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주식회사는 단점도 있다. 주식회사는 분명한 법인체로서 반드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채권에 대한 이자와는 달리 주주들에게 지급되는 배당금은 세금을 공제받는 비즈니스 경비가 아니다. 회사가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할 때 주주는 배당금에 대해 세금을 낸다(주식회사가 이미 소득에 대한 세금을 납부했기 때문에 혹자는 주주에게 지급되는 배당금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이 ‘이중과세’라고 지적한다).

많은 대기업들이 엄청나게 많은 수의 소유주 또는 주주를 갖고 있다. 주요 기업은 백만 명이 넘는 주주들이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그 주주들 중 많은 사람이 100주 미만을 갖고 있는 소액주주이다. 이처럼 널리 보급된 소유권은 많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나라에서 가장 큰 회사에 직접적으로 자금을 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990년대 중반, 미국 가정의 40퍼센트 이상이 직접 혹은 뮤추얼 펀드, 그리고 다른 중개수단을 통해 보통주를 소유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유권과 지배권의 분리를 뜻한다. 주주들은 일반적으로 주식회사의 사업 내용을 자세히 모르고 관여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사진을 선출하여 회사의 정책을 정하도록 한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일반적으로 보통주의 5퍼센트 이상을 소유하지 못한다. 물론 예외적으로 그 이상을 소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 밖에 개인과 은행, 연기금도 주식을 대량으로 소유하지만 이런 지분은 대체로 전체적으로 보면 소량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소수 이사진이 회사의 임원을 관리한다. 어떤 이사는 이사진의 명성을 위해 회사측에서 선임하기도 하고, 어떤 이사는 특정한 기술을 제공하거나 대출금융 기관을 대표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여러 주식회사의 이사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주식회사의 이사진은 이사진의 대표이며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최고경영자(CEO)에게 매일매일 경영상 결정해야 할 일들을 건의한다. 최고경영자는 회사의 다양한 기능을 감독하는 여러 명의 부회장을 포함해 임원들을 감독할 뿐만 아니라 최고 재무책임자이자 최고경영책임자 그리고 최고의 정보관리책임자(CIO)이다. CIO는 1990년대 말 첨단기술이 미국 비즈니스 업무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함에 따라 최고경영자의 업무가 되었다.

CEO가 이사진의 신임을 얻는 한 그는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무한한 자유가 허용된다. 그러나 이따금 개인이나 기관 주주가 단결하여 경영진을 바꾸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례행사인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주주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주주는 대리로, 즉 우편으로 보내주는 의결권을 통해 이사진 선거와 중요한 정책 제안에 대해 찬반을 표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주주들(많으면 수백 명)이 참석하는 주주총회도 있다. 미국 증권거래소(SEC)는 경영에 도전적인 주주 단체가 회사측에 주주인 명부와 주소 열람을 요구할 경우 응하도록 제도화했다.


주식회사의 자금조달 방법


대기업은 자본금을 확충하기 위해 혁신적인 자금조달 방법을 찾지 않고서는 현재의 회사 규모를 키울 수가 없다. 주식회사가 자금을 조달하는 기본적인 방법으로는 다음의 5가지가 있다.


채권 발행

채권이란 특정 날짜에 정한 액수의 돈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증서로 남긴 것이다. 돈을 돌려받기 전에 채권소유자는 정한 날짜에 고정적인 비율의 이자를 지급받는다. 채권소유자는 만기일이 되기 전에 누군가에게 채권을 팔 수 있다.

주식회사는 채권투자자에게 이자를 지급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돈을 빌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또 채권에 대해 지급하는 이자가 세금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영업비용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다만 수익을 내지 못했을 때에도 이자는 지급해야 한다. 만일 회사의 이자 지불 능력이 의심스러울 경우 투자자는 채권을 매입하지 않거나 위험부담을 감안하여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작은 기업은 대개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모으지 않는다.


우선주 발행

회사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우선주’를 새롭게 발행할 수도 있다. 이 지분을 매입하는 사람은 혹시 회사가 재정 곤란에 빠질 경우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가령 회사의 수익이 한정되어 있을 때 가장 먼저 채권소유자들에게 이자가 지급되고, 그 다음엔 우선주 소유자 그리고 보통주 소유자 순으로 배당금이 돌아간다.


보통주 매각

기업은 재정 상태가 건전할 경우에 보통주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투자은행은, 일반인이 주식을 특정한 최소 가격에 매입하지 않을 경우 그 지분을 대신 매입할 것을 동의한 상태에서 기업의 주식을 발행하도록 도와준다. 보통주 소유자는 이사진을 선출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갖지만 이익을 분배할 때 채권소유자나 우선주 소유자들보다 뒤에 위치한다.

투자자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주식을 매입한다. 어떤 기업은 배당금이 높아서 투자자들이 지속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기업은 배당금을 전혀 혹은 조금만 지급하는 대신 회사의 수익성을 높임으로써, 즉 지분 가치를 개선시킴으로써 투자자들을 끌어들인다. 일반적으로 어떤 기업의 수익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투자자들이 많을 경우 그 주식의 가치는 오르게 되어 있다. 주식 값이 오르는 기업은 종종 주주들에게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에 대해 추가 지분을 주기 위해 주식을 ‘분할(split)’하기도 한다. 이것은 회사 규모를 키우기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아니며 주식보유자들이 공개 시장에서 주식을 쉽게 팔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주식 1주를 2주로 분할하면 주식 가격이 반으로 떨어져서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기 쉽다.


차용

기업은 보통 재고 금융을 위해 단기자금이 필요한 경우 은행이나 여타 금융 기관에서 자금을 빌린다.


이익금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금을 유보함으로써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보유 잉여금을 운용하는 전략은 다양하다. 어떤 기업, 특히 전기나 가스, 그 밖에 공익사업을 하는 회사들은 잉여금의 대부분을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지급한다. 또 어떤 기업은 잉여금의 50퍼센트를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회사 운영과 사업 확장에 사용한다. 또 좀더 작은 규모의 회사들은 순이익금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사업 확장이나 개발에 투자함으로써 투자자들의 지분 가치를 높여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독점, 합병, 구조조정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는 것은 미국에서 기업이 성공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열쇠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따금 대기업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고, 경영진들도 규모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회의를 품기도 한다.

19세기 말, 많은 미국인들은 대기업이 엄청난 자금으로 소기업을 흡수하거나 다른 회사와 결탁하여 경쟁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시장을 독점하는 것은  소비자들이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사게 만들고 선택권을 빼앗는 행위이다. 미국인들은 이런 우려에서 독점을 분산시키거나, 또는 예방하기 위해 두 개의 중요한 법을 탄생시켰다. 바로 1890년의 셔먼 반독점법과 1914년의 클레이톤 독점금지법(Clayton Antitrust Act)이 그것이다. 정부는 20세기에도 이 독점금지법을 계속 유지했다. 1984년 정부의 ‘독점금지론자’들은 미국 전신전화회사(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가 갖고 있던 전화에 대한 독점권을 폐지했다. 1990년 말, 법무성은 불과 수년 사이에 223억 5,700만 달러의 자산을 가진 주요 기업으로 성장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장을 독점할 우려가 있자 서둘러 그 싹을 잘라버렸다.

대체로 정부의 반독점주의자들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시장지배력이 3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면 독점 위험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탁상이론일 뿐이다. 그 비율은 시장에서 경쟁사의 점유율에 따라 달라진다. 즉, 시장지배력이 30퍼센트가 넘어도 다른 기업의 시장지배력 또한 그 정도가 된다면 그만큼 독점력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반독점법은 경쟁을 부추기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기업 규모가 커지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전까지는 성장이 위축되었던 7대 거대 기업은 1999년에 들어서서 각각 3천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어떤 비평가들은 자동차제조업이나 철강산업 같은 경우는 몇몇 메이저급 기업이 과점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몇 개의 대기업이 기간산업을 장악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대기업이 세계적으로 치열한 경쟁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설령 규모가 크더라도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소비자가 국내 자동차 제조회사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다면 외국 회사의 자동차를 구매할 것이다. 게다가 소비자가 대체품으로 바꿈으로써 독점력이 커지는 것을 저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강철은 알루미늄이나 유리, 플라스틱, 콘크리트로 대체할 수 있다.

실업계 지도자들 중에 기업의 거대화를 우려하는 정도는 다양하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에는 많은 야심찬 기업들이 자기 업종과 상관없는 사업체를 사들임으로써 다양화를 꾀했다. 이것은 연방정부의 반독점법 강화로 경쟁기업과의 합병을 저지시킨 데에도 일부 원인이 있었다. 사실 재계 지도자들도 인정했듯이 복합기업(하나의 지주 회사가 영화산업과 정유산업처럼 서로 다른 분야의 자회사들을 여러 개 거느리는 기업 형태를 말한다)은 더 안전하다. 이론상으로 어떠한 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수익이 나지 않았을 때 다른 사업으로 수지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합기업은 한정된 생산 라인으로 한 제품만 생산하는 전문화된 기업보다 다양한 사업을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여러가지 이점이 상쇄되기도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흡수, 합병을 주도했던 많은 비즈니스 리더들은 새로 흡수한 자회사들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대개의 기업들이 자신보다 더 약한, 즉 경영 상태가 좋지 않은 기업을 인수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기업 스스로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합병과 ‘적대적인’ 경영권 인수라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어왔다. 예를 들어 합병은 석유, 소매업, 철도 산업에서 두드러졌다. 1978년에 많은 항공사들이 정부의 규제가 사라지고 자유경쟁 체제가 도입되자 합병이라는 길을 모색했다.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장에서도 규제가 사라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줄줄이 합병이 이루어졌다. 정부가 시장에서 더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유도하자 여러 기업들이 지방 전화 사업체 인수에 나섰다. 이스트코스트 지역에서는 벨 애틀랜틱(Bell Atlantic)이 나이넥스(Nynex)사를 흡수했다. SBC 커뮤니케이션스(SBC Communications)는 자회사인 사우스웨스턴 벨(Southwestern Bell)을 서부의 퍼시픽 텔레시스(Pacific Telesis), 서던 뉴잉글랜드 그룹 텔레커뮤니케이션스(Southern New England Group Telecommunications)와 합병했고, 이어서 중서부의 아메리테크(Ameritech)사도 흡수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장거리 전화회사인 MCI 커뮤니케이션스(MCI Communications)와 월드컴(WorldCom)이 합병하고, AT&T는 두 개의 거대 케이블 텔레비전 회사인 텔레커뮤니케이션스(Tele-Communications)와 미디어원 그룹(MediaOne Group)을 인수한 뒤 지역 전화사업에 뛰어들었다. AT&T사는 경영권 취득으로 미국인 가정의 약 60퍼센트에 이르는 가입자에게 케이블 회선 접속을 제공하게 되었고, 케이블 TV와 초고속 인터넷 접속 시장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90년대 말, 시티콥(Citicorp)은 트래블러스 그룹(Travelers Group)을 인수하여 세계 최대의 금융회사가 되었고, 포드 모터(Ford Motor Company)사는 스웨덴의 자동차회사 AB 볼보(AB Volvo)를 사들였다. 1980년대에는 일본 기업이 미국 회사를 인수하는 물결이 밀어닥쳤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독일의 다임러-벤츠 AG(Daimler-Benz AG)가 크라이슬러(Chrysler)사를 인수합병하고, 도이치 뱅크 AG(Deutsch Bank AG)가 뱅커스 트러스트(Bankers Trust)를 인수함으로써 독일과 영국 회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예상치 못했던 결과는 엑슨(Exxon Corporation)사와 모빌(Mobil)사의 합병이었다. 1911년 법무성에 의해 분할되었던 존 D.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이라는 거대 독점회사가 다시 합쳐진 것이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자산 규모가 813억 8,000달러가 된 이 합병을 만장일치로 승인하긴 했지만 반독점주의자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대신 위원회는 엑슨과 모빌사에 노스웨스트와 애틀랜틱 중부, 캘리포니아, 텍사스의 2,143군데 주유소를 매각하거나 공급 계약을 해지하고 거대한 캘리포니아 정제소와 오일 터미널, 송유관, 그리고 그 밖의 자산을 정리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반독점위원회가 내린 명령 중에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연방거래위원회의 의장인 로버트 피토프스키(Robert Pitofsky)는 차후 석유산업계에서 이와 비슷한 ‘국가적’ 합병이 있을 경우에는 ‘반독점의 경종’을 울릴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고 나서 연방거래위원회는 BP 아모코 PLC(BP Amoco PLC)의 애틀랜틱 리치필드 컴퍼니(Atlantic Richfield Company) 인수에 제동을 걸었다.

어떤 기업은 합병 대신 경쟁사와의 합작 벤처를 통해 사업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이런 방식은 기업 간에 협력하기로 동의한 제품에 한해 경쟁하지 않음으로써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원리에 위배될 수 있다. 그러나 연방반독점위원회는 기업들이 서로 자기 이익을 양보하는 조인트 벤처만은 승인해왔다.

많은 미국인 기업들이 힘을 합쳐 연구개발 활동을 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기업은 무역기구를 통해, 그리고 환경과 안전기준에 맞는 경우에만 공동개발을 했다. 그러나 외국 제조업체들이 서로 협력하여 상품을 개발하고 제조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들 혼자서 연구개발을 하기에는 돈과 시간의 여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몇몇 주요 연구는 반도체 연구소나 소프트웨어 생산 콘소시엄처럼 콘소시엄 형태로 이루어졌다.

1991년에는 적대적이었던 경쟁자가 하루아침에 손을 잡는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 부품 회사인 IBM사는 개인용 컴퓨터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애플 컴퓨터사와 함께 여러 컴퓨터에서 호환되는 새로운 컴퓨터 소프트웨어 운영체제를 개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중반에도 IBM사와 마이크로소프트사 간에 운영체제를 공동개발하자는 제의가 있었고, 그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윈도 시스템으로 업계를 석권하게 되었다. 1999년 IBM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델 컴퓨터(Dell Computer)사와 함께 새로운 컴퓨터 기술을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합병의 물결이 일렁이면서 기업의 재편과 청산이 잇따랐던 것과 같이 최근의 합병 또한 경영구조를 재편하려는 회사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세계의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미국 기업들은 조직을 좀더 단순화하고 효율적으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많은 기업들이 생산성 낮은 작업 라인을 폐쇄하고, 자회사나 관련없는 사업들을 정리했고, 수많은 공장과 도매점, 소매점들이 합병되거나 정리되었다. 이러한 몸집 줄이기의 추세 속에서 보잉사나 AT&T, 제너럴모터스사 같은 많은 기업들이 수많은 관리자와 낮은 직급의 고용인들을 해고시켜야 했다.

많은 제조업체들이 직원을 줄였는데도 1990년대의 호황 덕분에 경제는 곧 회복되었으며 실업률도 낮아졌다. 고용주는 첨단기술을 습득한 능력 있는 근로자를 찾기 위해 경쟁을 벌였으며, 제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계속 성장중인 서비스 분야에서 노동력을 흡수했던 것이다. 〈포춘〉지 상위 500개 기업의 고용 실태는 1986년 1,340만 명에서 1994년 1,16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포춘〉지가 업종에 상관없이 500대 기업에 초점을 맞춰 분석을 달리한 결과 서비스업의 호황 덕분에 고용된 인원은 1994년 2,020만 명이었던 것이 1999년에는 2,230만 명으로 증가했다.

미국 경제의 장기 호황과 합병, 통합, 구조조정 덕분에 기업의 평균 규모는 1988년과 1996년 사이에 고용인 17,730명에서 18,654명으로 늘어났다. 합병과 재편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작은 기업들은 고용과 규모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top


CHAPTER 5  주식과 상품, 그리고 시장


미국의 자본시장은 자본주의의 활기를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공장이나 사무실, 비행기, 기차, 배, 전화선과 같은 자산을 마련해야 할 때, 연구나 개발을 해야 할 때, 그 밖에 중요한 기업활동을 해야 할 때 기업은 자본시장에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 돈의 대부분은 연기금이나 보험회사, 은행, 재단, 대학과 같은 주요 기관에서 나온다.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1990년대 중반에는 통계상 미국 가정의 40퍼센트 이상이 보통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돈이 필요할 경우에 주식을 매도할 수 없다면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식시장과 그 밖의 자본시장은 투자자들이 끊임없이 지분을 사고팔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시장은 미국 경제에서 여러가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투자자들에게는 수입의 원천이 된다. 주식이나 다른 금융자산의 가치가 올라갈 때 투자자는 더욱 부자가 된다. 그리고 투자로 벌어들인 돈으로 물건을 사면 경제 성장은 더욱 촉진된다. 투자자는 어떤 회사가 미래에 수익을 낼 것인가를 판단하여 매일 주식을 사고팔기 때문에 주식 값을 통해 기업의 임원들은 투자자들이 자신들의 경영활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즉각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주식가치는 정부 정책에 대한 투자자들의 반응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일 정부가 어떤 정책을 발표했을 때 투자자들이 그 정책이 경제와 기업의 수익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주식시세는 하락한다. 반대로 어떤 정책이 경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주식시세는 올라간다. 비평가들은 이따금 미국의 투자자들이 너무 단기적인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기업이나 정책입안자들이 당장 주식시장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해서 장기적으로 이익이 날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주식시장은 수많은 투자자들에 의한 수많은 결정의 총체가 반영되기 때문에 주식시장을 통해 경제정책을 시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쨌든 미국인들은 주식시장과 자본시장의 효율성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매일 수많은 매도자와 매수자가 수백만 건의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의 이러한 성공은 컴퓨터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지만 전통과 신용 덕분이기도 하다. 중개인의 다른 중개인에 대한 신용, 중개인이 주식을 판 뒤에 안전하게 전달해주고 또 사줄 거라는 고객의 믿음 말이다. 물론 때로는 이런 믿음을 남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연방정부는 정직하고 공정한 거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그 결과 시장은 계속해서 투자기금의 원천으로 발전해왔으며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다. 또 많은 미국인들이 국가의 부를 공유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어주었다.

시장이 효과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정보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투자자들은 주식의 실제 가치를 지속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투자자들이 매일, 매 시간, 심지어 몇 분 단위로 시장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도록 수많은 정보들이 제공된다. 이를테면 기업은 매 분기별로 얼마의 이익을 냈는지 법적으로 보고해야 하며, 더 자세한 연간 보고서와 자신들이 어떤 경영활동을 하고 있는지 주주들에게 낱낱이 공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투자자들은 매일 신문의 주식시세표를 통해 특정 주식이 전날 얼마에 거래되었는지 알 수 있다. 투자자들은 다양한 지수를 확인하고 시장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판단한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30개의 중요한 주식 가격의 흐름을 나타내는 다우존스 산업지수(DJIA)이다. 투자자들은 또한 특정 주식과 시장에 관해 분석을 해놓은 잡지나 신문을 이용할 수도 있다. 특정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도 주가의 변동 상황을 계속해서 중계 방송해준다. 그리고 이제 투자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개별 주식에 대한 실시간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주식 거래도 할 수 있다.



주식거래소


수천 개의 주식이 있지만 시가 총액이 크고, 잘 알려져 있으면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종목은 대체로 뉴욕증권거래소(NYSE:New York Stock Exchange)에 등록되어 있다. 주식이 맨 처음 거래된 것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주식중개인 단체는 뉴욕시 월스트리트에 있는 아메리카 플라타너스나무 아래 모여서 주식을 사고파는 데 필요한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1990년대 말 현재, 뉴욕상장거래소에는 3,600개의 주식이 등록되어 있다. 거래소의 모습을 살펴보면 1,366명의 회원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는데, 이는 각 증권사에서 고가에 사놓은 것으로 그곳에 앉아 공개적으로 주식을 사고판다. 중개사무실과 거래소 사이에는 320킬로미터의 유리섬유로 만든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어 자동으로 정보가 전달되며, 시세를 부르고 주문을 낼 수 있는 8,000회선의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식을 거래할까? 캘리포니아의 한 교사가 크루즈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고 치자. 그녀는 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제너럴모터스사 주식을 100주 팔기로 했다. 그래서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최대한 좋은 값으로 주식을 팔아달라고 주문한다. 동시에 플로리다의 한 기술자가 저축해놓은 돈으로 제너럴모터스사의 주식을 100주 사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100주를 시장 가격으로 ‘사달라는’ 주문을 했다. 두 중개인은 자신들의 대리인이 거래를 협상하고 있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주문을 낸다. 이런 모든 과정은 정말 놀랍게도 채 1분이 걸리지 않는다. 결국 교사는 현금을 갖게 되고 기술자는 주식을 갖게 되며, 두 사람은 중개인에게 각각 수수료를 낸다. 거래소의 모든 업무가 그렇듯이 주식매매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전국의 모든 증권회사에 자동적으로 전송된다.

이 과정에서 주식거래 ‘전문가’는 사자와 팔자 주문을 교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시장을 질서 있게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필요한 경우 매도자와 매수자가 부족할 때 스스로 주식을 매매하기도 한다.

뉴욕증권거래소보다 조금 작은 미국증권거래소(American Stock Exchange)는 주로 에너지산업 관련 주식들이 등록되어 있는데, 뉴욕증권거래소처럼 월스트리트에 위치하고 있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거래된다. 그 밖에 다른 대도시에도 좀더 규모가 작고 지역적인 증권거래소가 있다.

성격이 좀 다른 주식이나 채권은 미 증권업협회 자동호가 시스템(National Association of Securities Dealers Automated Quotation system) 또는 나스닥(Nasdaq)이라는 곳에서 거래된다. 소위 점두매매(over-the-counter exchange:증권거래소에서 행해지는 거래가 아니라 증권업자가 점두에서 고객과 직접 매매하는 것. 즉, 증권회사 점두에서 행해지는 매매를 뜻하는 것이지만 현재는 장외거래라 한다―역자주)로 5,240종의 주식이 거래되는 나스닥은 주식을 사고파는 곳이 따로 없다. 주식과 채권 딜러들은 자동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 거래를 한다. 미증권업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Securities Dealers)는 점두매매 시장을 감독하고, 불성실하고 지불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기업이나 딜러를 퇴출시킬 권한을 갖고 있다. 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많은 주식들이 규모가 작고 불안정한 회사이기 때문에 나스닥은 증권거래소보다 위험부담이 큰 시장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만큼 투자자들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 예컨대 1990년대에 빠르게 성장한 첨단기술주들은 나스닥에서 거래되었다.



투자자들의 천국


1990년대에는 전례 없이 호황이었던 주식시장과 손쉬워진 주식투자 방법 덕분에 일반들이 주식시장에 많이 뛰어들었다. ‘빅 보드(Big Board)’라고도 불리는 뉴욕증권거래소의 연간 거래량도 1980년에 114억 주에서 1998년엔 1,690억 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89년과 1995년 사이에 직접투자 또는 연기금같이 중간 매개를 통해 주식을 보유한 미국 가정은 31퍼센트에서 41퍼센트로 증가했다.

주식시장에 일반인들이 활발하게 참여하게 된 것은 개인들로부터 모은 돈을 가지고 다양한 주식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투자하게 하는 뮤추얼 펀드 덕분이었다. 뮤추얼 펀드란 수천 개의 주식 중에 무엇을 선택하면 좋을지 잘 모르거나 시간이 없는 소규모 투자자들이 전문가에게 주식을 맡기는 방법이다. 한편 이 뮤추얼 펀드는 다양한 주식을 보유하기 때문에 주식 하나하나의 변동으로 인해 입을 수 있는 손실을 피할 수 있다.

뮤추얼 펀드의 종류는 투자자들의 선호도나 요구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어떤 펀드는 목표했던 수익률이 나면 당장 현금화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장기적인 자산평가를 목적으로 한다. 어떤 펀드는 보수적으로 투자를 하고 어떤 펀드는 더 높은 수익률을 바라며 위험을 무릅쓴다. 어떤 펀드는 특정 산업의 주식 또는 외국 기업의 주식만 거래하고, 어떤 펀드는 다양한 시장전략을 쫓는다. 전체적으로 펀드의 숫자는 1980년에 524개에서 1998년에는 7,300개로 늘어났다.

뮤추얼 펀드의 높은 수익률과 다양한 선택에 매력을 느낀 미국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상당한 액수의 투자를 했다. 1990년대 말, 뮤추얼 펀드의 투자액은 5조 4천억 달러였고 뮤추얼 펀드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인 가정은 1979년에는 6퍼센트였지만 1997년에는 37퍼센트로 증가했다.



주식 값은 어떻게 결정되나


주식 값은 유능한 분석가라도 지속적으로 이해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해진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기업의 잠재적 수익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즉, 투자자들은 어떤 기업이 장래에 상당한 실적을 올릴 것이라고 기대하면 그 기업의 주식에 매력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회사의 주식을 사고 싶어하기 때문에 당연히 주식의 가치는 상승한다. 반대로 투자자들은 어떤 기업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면 그 주식의 매입을 꺼린다. 이런 주식은 사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팔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주식 가격은 떨어진다.

주식을 살 것인가, 팔 것인가를 결정할 때 투자자들은 일반적인 경기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재정 상태, 투자를 고려하는 개별 기업에 대한 전망, 전통적인 기준으로 볼 때 주식 가격이 기업의 순이익에 비해 너무 높은가 아니면 낮은가 하는 점들을 고려한다. 금리의 추세도 주식 가격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금리가 오르면 주식 값을 누르는 경향이 있다. 금리가 오르면 일반적으로 경기의 활성화와 기업의 이윤이 둔화될 거라는 전조이고, 투자자는 주식시장에서 발을 빼고 이윤이 더 높은 새로운 투자상품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반대로 금리가 떨어지면 흔히 주식 가격은 올라간다. 금리가 떨어지면 대출 받기가 쉬워지고 경제성장이 빨라질 것임을 시사하며, 그만큼 다른 투자상품이 덜 매력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식 값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가령 투자자들은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고 주식을 산다. 이 기대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그중 많은 것들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따라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주식 가격과 실적 간에 별 연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

모멘텀(추세) 역시 주식 가격을 왜곡시킬 수 있다. 대개 주식 가격이 오르면 투자자들을 더 많이 시장으로 끌어들이고, 그래서 수요가 증가하면 주식 값은 더 오른다. 게다가 이 주식을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값에 팔려는 투기꾼들이 개입하면 주식 값은 훨씬 더 상승한다. 분석가들은 이렇게 주식 값이 끊임없이 상승하는 것을 ‘불 마켓(bull market)’이라고 표현한다. 투기 열풍이 더이상 지속되지 않으면 주식 값은 하락한다. 그때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자기 지분을 팔게 되면 하락 추세가 이어진다. 이것을 ‘베어 마켓(bear market)’이라고 한다.



시장 전략


20세기 동안 주식을 오래 보유한 투자자들은 다른 금융상품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

단기간으로 보면 주식 가격은 매우 변덕스럽다. 성급한 투자자들은 시장이 하락할 조짐을 보이면 주식을 쉽게 팔아버리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최대의 주식 뮤추얼 펀드를 운영했던 유명한 매니저인 피터 린치(Peter Lynch)에 따르면 미국 주식은 지난 72년 동안에 20년 간은 가격이 하락했다. 린치의 말에 따르면 투자자들은 1929년에 주식시장이 붕괴된 이후 주식으로 손해 본 금액을 되찾을 때까지 15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년 이상 보유한 사람들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았다. 미국 의회에 제출한 분석보고서에서 연방정부의 회계감사원이 말하기를 1926년 이후 최악의 20년 동안에도 주식 값은 3퍼센트나 상승했다. 그리고 최고의 20년 동안에는 17퍼센트가 상승했다. 반면에 주식 대신으로 흔히 투자하는 채권은 20년 동안 수익률이 1퍼센트에서 10퍼센트에 불과했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소액투자자일수록 다양한 포트폴리오의 주식에 투자하고, 오랫동안 보유할 수 있다면 가장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어떤 투자자들은 단기간에 더 많은 수익률을 올리려는 욕심에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다. 또 그들은 다음과 같은 투자 전략들을 고안해냈다.


위탁증거금으로 산다

미국인들은 많은 물건을 외상으로 사는데, 주식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자격을 가진 투자자들은 ‘위탁증거금’에 따라 50퍼센트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중개인에게 채무로 남겨둔 채 주식을 살 수 있다. 만일 외상으로 산 주식 가격이 오르면 투자자는 주식을 팔아 빌린 돈에 이자와 수수료를 얹어 중개인에게 주고도 이익이 난다. 그러나 만일 주식 값이 떨어지면 중개인은 ‘마진 콜’(추가증거금 요구 또는 반대매매라고 한다―역자주)로 들어간다. 즉, 투자자로 하여금 계좌에 돈을 더 적립하도록 요구함으로써 투자자의 차용금이 주식 가치의 절반 이하를 유지하도록 한다. 만일 투자자가 현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중개인은 주식의 일부(투자자의 손실금만큼)를 팔아서 부채를 갚는다.

위탁증거금으로 주식을 사는 것은 차입금을 이용한 투기적 거래라고 할 수 있다. 투기꾼(위험이 높은 상황에서도 기꺼이 도박을 거는 트레이더)에게는 주식을 더 많이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일 투기꾼의 투자결정이 옳다면 수익을 더 많이 올릴 수 있을 테지만 시장을 잘못 판단하면 손실 또한 크다.

연방정부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투자자가 주식을 살 때 얼마큼의 현금이 있어야 하는지를 명시해놓은 최소증거금의 한계를 정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위탁증거금의 비율을 다양하게 조정한다. 만일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싶다면 증거금을 낮게 책정한다. 반대로 투기 열풍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면 증거금을 높인다. 어떤 해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100퍼센트 결재를 요구했지만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대부분 위탁증거금 비율을 50퍼센트로 유지했다.


초단기 투자를 한다

투기꾼들의 또다른 종류는 ‘공매도자’들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특정 주식의 가격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나중에 더 낮은 값에 시장에서 사서 수익을 남기기 위해 브로커에게서 주식을 빌려 파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방법으로 베어 마켓에서 수익을 내려고 하는 것은 주식거래에서 가장 위험한 방법이다. 만약 판단이 틀려서 공매도를 한 주식 가격이 급상승하면 투자자는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옵션으로 주식을 한다

비교적 적은 현금을 가지고 투기를 하는 또다른 방법으로, 훗날 현재의 가격과 비슷한 가격으로 특정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콜 옵션’을 사는 방법이 있다. 만일 시장이 상승하면 투자자는 매매선택권(옵션)을 행사하여 높은 시장 가격에 주식을 팔 수 있기 때문에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그렇지 않고 주식 가격이 상승해서 옵션 가치도 올라가면 투자자는 옵션 자체만 매각할 수 있다). 반면 주식을 팔 수 있는 권리인 ‘풋 옵션’은 콜 옵션과 반대로 투자자가 훗날 현재와 비슷한 가격으로 특정 주식을 매도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풋 옵션은 공매도와 마찬가지로 주가하락기에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주식 가격이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경우엔 많은 돈을 잃을 수 있다.



상품과 기타 선물


상품 선물은 미래 어느 시점의 가격을 정해놓고 특정 상품을 사거나 팔기로 계약하는 것을 말한다. 선물은 전통적으로 밀이나 가축, 동, 금과 같은 물건과 관련이 있지만 최근엔 외국환이나 기타 금융자산과 연계되어 많은 발전을 했다. 미국에서는 가장 유명한 시카고상품거래소(Chicago Board of Trade), 시카고상업거래소(Chicago Mercantile Exchange)와 뉴욕에 있는 여러 거래소에서 상품이 거래된다. 시카고는 역사적으로 미국의 농업 관련 산업의 중심지이다. 전체적으로는 1991년에 2억 6,100만 건에서 1997년에는 4억 1,700만 건으로 선물 계약이 증가했다.

상품 거래를 하는 사람들은 크게 헤저(hedger)와 투기자로 나뉜다. 헤저란 사업가나 농민들, 상품을 확보해두기 위해 또는 보증한 가격에 물건을 팔 능력이 있어서 선물 계약을 한 개인들을 말한다. 그들은 예상치 않았던 물건값 폭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물을 이용한다. 그런가 하면 위험을 무릅쓴 수많은 개인들이 투기 목적으로 선물 거래에 뛰어들기도 한다. 물론 적은 돈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거라는 전망을 갖고 거래를 시작한다(주식처럼 선물 계약도 계약 금액의 10 내지 20퍼센트의 증거금만 있으면 입찰할 수 있다).

선물 계약은 투기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모험을 무릅쓰길 꺼리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날씨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상품 가격이 오르느냐 떨어지느냐에 따라 수익도 크지만 손실도 클 수 있다. 미래 시장을 잘 예측할 수 있는 전문적인 거래인들은 수익을 낼 가능성이 있지만 소규모 선물거래자들의 90퍼센트가 변동성이 큰 시장에서 돈을 잃는다.

선물 거래는 일종의 ‘파생상품’으로, 금융 투기를 알 수 없는 자산과 연계시킨 복잡한 투자 수단이다. 파생상품은 저당과 이율을 포함해 광범위한 자산을 투자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1990년대에 활성화되었다. 몇몇 은행과 보험회사, 부유한 개인이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고수익 펀드에 가입했다가 크게 손실을 본 후 의회와 조정자들은 이 거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었고, 어떤 선물거래소는 규제를 피하기 위해 미국 밖에서 등록을 하기도 했다.



주식시장의 규제 기관


1934년에 설립된 증권거래위원회(SEC: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증권시장 규제 기관이다. 1929년 이전에는 각 주별로 증권시장을 감독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촉발된 주식시장 대붕괴는 주정부의 관리가 부적절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연방정부는 1933년의 증권법과 1934년의 증권거래법을 잇따라 제정하여 증권거래위원회로 하여금 소액투자자들이 사기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그들이 기업의 재정보고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겼다.

위원회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법을 통한 감독과 제재 역할을 한다. 주식이나 채권, 기타 유가증권을 발행하는 기업들은 반드시 재무재표를 자세히 작성하여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증권거래위원회는 이 재무재표가 제대로 작성되어 있는지, 투자자들이 다양한 주식에 대해 충분히 정보를 얻고 현실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감독한다. 또한 증권거래위원회는 주식 거래를 감독하고 주가 조작을 막기 위한 법을 집행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식시장과 장외시장의 중개인과 딜러는 반드시 증권거래위원회에 등록해야 한다. 또 증권거래위원회는 기업에게 그 기업의 임원이 주식을 사거나 파는 것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도록 요구한다. 이런 ‘내부자’들은 기업의 정보를 가장 먼저 입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업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투자자들에게 그들의 매매 상황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증권회사의 내부자들 또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근거로 해서 주식을 매매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나아가 1980년대 말, 증권거래위원회는 임원뿐만 아니라 낮은 직급의 직원, 회사의 중요한 정보를 미리 접할 수 있는 변호사 같은 외부인에게도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증권거래위원회는 대통령이 지명한 다섯 명의 위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세 명이 같은 정당 소속일 수 있으며, 임기는 5년이다.

상품거래위원회(Commodity Futures Trading Commission)는 선물시장을 감독한다. 특히 많은 장외 선물 거래를 할 때 승인된 거래방식을 따르는지 엄밀하게 감시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증권거래위원회보다 규제가 훨씬 약하다는 평을 듣는다. 예를 들어 1996년에는 92건에 달하는 새로운 종류의 선물과 농산물 옵션 계약을 승인해주었다. 그래서 이따금 증권거래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물 거래를 엄격하게 규제하겠노라고 선포하기도 한다.



블랙 먼데이와 기나긴 불 마켓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주식시장이 세계적으로 폭락했다.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22퍼센트가 떨어져서 1,783.42가 되었으며 1914년 이후로 그 유명한 1929년의 대폭락 때보다도 더욱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브래디 위원회(Brady Commission:폭락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대표위원회)와 증권거래위원회 그리고 여러 기관들은 1987년 대폭락의 원인이 투자자들의 불안한 심리, 연방정부의 예산 적자와 무역수지 적자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 최악의 경우 자신이 주식을 매입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린 뉴욕증권거래소 전문가들의 잘못, 그리고 시장상황에 따라 자동으로 주식을 사거나 팔도록 되어 있는 컴퓨터를 통한 ‘프로그램 매매’ 등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주식 거래에 안전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다우존스 산업지수가 하루에 50포인트 상승하거나 하락하면 프로그램 매매를 제한시키고, 일시적으로 250포인트까지 하락하면 모든 거래가 정지되는 ‘서킷 브레이커(circuit-breaker)’가 발동되도록 했다. 이런 비상장치는 나중에 다우지수의 상승폭을 감안하여 다시 재조정되었다. 1998년 말에는 다우존스 산업지수가 하루 동안에 최근 평균 종가지수에서 2퍼센트 상승하거나 하락할 때마다 매매가 정지되도록 바꾸었다. 1999년 말에는 이런 규정이 다시 바뀌어 약 210포인트의 시장 변화에도 거래가 정지되도록 했다. 말하자면 새로운 규칙이란 모든 거래가 정지되는 기준을 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99년 4분기에는 다우존스 지수가 최소한 1,050포인트만 하락해도 매매가 정지될 것이다.

이런 개혁은 신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경제의 강력한 실적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1929년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투자자들이 마진 콜에 대응할 수 있고 거래를 계속할 수 있도록 신용 상태를 완화해줄 것을 분명히했다. 그렇게 해서 1987년의 폭락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고 시장은 다시 새로운 고지를 향해 폭등했다. 1990년대 초에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3,000포인트를 탈환하고 1999년에는 다시 11,000포인트를 갱신했다. 더욱이 거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60년대 뉴욕증권거래소의 주식매매가 활발했던 날의 주식거래량이 5백만 주였는데, 1997년과 1998년의 어느날 거래된 주식 수는 십억 주를 넘는다. 나스닥 시장도 1998년에는 그 정도의 주식 거래가 이루어졌다.

주식시장을 활성화하는 주역으로는 초 단위의 등락을 이용해 빠르게 수익을 내기 위해 한 주식을 하루에도 여러 번 매매하는 소위 ‘데이 트레이더’를 빼놓을 수 없다. 데이 트레이더들은 인터넷을 이용해 거래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많다. 1999년 초, 개인의 경우 주식 거래 중 13퍼센트, 다른 증권상품 거래의 25퍼센트가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졌다.

거래량이 많을수록 변동성도 커졌다. 하루에 100포인트 이상 변동하는 횟수도 잦아졌고, 1997년 10월 27일에는 다우존스 산업지수가 554.26포인트까지 하락해서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한 적도 있었다. 또 1998년 8월 31일에는 512.61포인트가 하락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장이 너무 급격히 상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주가는 7퍼센트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투자자는 계속해서 시장에 머물러 있어 다시 급반등했다.


top


CHAPTER 6  미국 경제와 연방정부의 역할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자유기업 시스템의 모델 노릇을 한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적 성공은 기업이나 개인이 개방시장(자유경쟁을 허용하는 시장)에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전혀 개입하지 않을 때 경제가 가장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기업 시스템이며, 어떻게 해야 기업들이 정말로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정부의 복잡한 규제는 기업 경영에 여러가지 측면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정부는 매년 어떤 사업은 해도 되고, 어떤 사업은 하면 안 된다는 것까지 꼼꼼하게 설명해놓은 수천 장짜리 법규집을 발간한다.

그러나 정부 규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매우 다양하다. 최근 어떤 지역에서는 규제가 훨씬 까다로워졌고 어떤 지역에선 더욱 느슨해졌다. 사실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 경제 역사상의 지속적인 테마는 정부가 기업의 문제에 언제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이다.



레세페르 대 정부의 간섭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 정부의 대對기업 정책은 ‘내버려두라’는 뜻의 프랑스어인 레세페르(Laissez-Faire, 무간섭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레세페르는 18세기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 나온 용어인데, 그의 저서는 미국 자본주의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을 통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로 경쟁할 수 있고 자유로운 시장이 보장되는 한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의 행동은 사회에도 선이 되는 쪽으로 가게 마련이라고 했다. 스미스는 정부의 간섭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경우에만 찬성했다. 그가 미국에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개인에 대한 신뢰와 권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던 미국에서 레세페르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세페르 정책은 개인이 정부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경우에 제대로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만든다. 19세기에도 철도회사는 정부로부터 토지 무상임대와 공적 보조금을 받았다. 오늘날 외국과의 치열한 경쟁에 당면해 있는 기업들은 무역정책을 통해 보호받게 해달라고 오래 전부터 정부에 호소해왔다. 거의 개인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농업도 정부의 지원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운 처지이다. 농업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들도 세금 삭감부터 노골적인 보조금까지 여러모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싶어하며, 또 받고 있다.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경제적인 규제와 사회적인 규제이다. 경제적인 규제는 일차적으로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는 소비자나 특정 기업(주로 소기업)을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대기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출발했다. 경제적인 규제는 완전자유경쟁 체제인 시장은 존재할 수도 없고, 만일 존재하더라도 그와 같은 보호가 불가능하다는 근거에 의해 종종 합리화된다. 그러나 대개는 어떤 기업을 파괴적인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기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향으로 경제적인 규제가 발전해왔다. 한편 사회적인 규제는 더 안전한 근로환경이나 더 깨끗한 생활환경 같은 경제 이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적인 규제는 사회에 해가 되는 기업 행위를 금지하거나 좌절시키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독려한다. 예를 들어 정부는 공장 굴뚝에서 매연이 나오는 것을 통제하고, 기업에서 고용인을 위해 건강보험과 연금을 보장할 경우 세금을 깎아주기도 한다.

미국의 역사는 레세페르와 정부의 규제 요구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했다. 지난 25년 동안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자칫하면 잘못된 규제로 소비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기업을 보호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본 다음 경제적인 규제의 어떤 카테고리를 폐지하거나 축소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사회적 규제에 대해서는 정치지도자들 간에도 의견 차이가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경제 이외의 다양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간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정부 간섭이 기업들 간의 경쟁을 막고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왔다.



점점 더 커진 정부의 간섭


미국 초창기의 정부 지도자들은 기업활동을 규제하길 꺼렸다. 그러나 20세기를 눈앞에 두고 미국 기업들이 아주 빠르게 강력한 주식회사 형태로 통합되자 소기업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간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890년, 의회는 독점을 금지하여 기업들이 다시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셔먼 반독점법을 제정했다. 1906년에는 식품과 의약품의 경우엔 정확히 품질표시를 하고 육류는 판매하기 전에 검사를 받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1913년에는 정부가 새로운 연방은행제도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만들어 국가의 통화공급을 규제하고, 금융활동에 어느 정도 통제를 가할 수 있도록 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단행하는 동안 정부의 역할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1930년대에는 미국이 최악의 기업 위기와 역사상 유례 없는 실업률을 보이고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족쇄 풀린 자본주의가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정부가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던 원인을 해결해주고 궁핍을 완화시켜주길 기대했다. 루스벨트와 의회는 정부에게 경제에 개입할 권한을 주는 새로운 법안을 제정했다. 이를테면 주식 거래를 통제하고 노조를 결성하며 노동자의 권위를 보장하고 임금과 시간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실업자에게는 생계보조금, 고령자에게는 은퇴 연금을 지급하고 테네시밸리에 거대한 지역 발전 기구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근로자와 소비자를 보호해주는 더 많은 법안과 규제들이 만들어졌다. 그에 따라 고용주는 나이와 성, 인종, 종교를 가지고 채용에 차별을 두는 것은 법을 어기는 일이 되었다. 어린이를 고용하는 것도 대부분 금지되었다. 독립적인 노조에게는 결성과 교섭과 파업의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정부가 작업환경과 안전에 대한 규정을 만들고 강화하였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제품은 어느 정도 정부의 규제를 받도록 했다. 식품제조업자들은 상품을 깡통이나 상자, 병에 포장하고 그 내용을 정확히 밝혀야 했다. 약물은 완벽하게 시험을 통과해야 판매할 수 있었다. 자동차는 안전 기준과 오염 기준에 맞게 생산하도록 했다. 물건 가격은 반드시 명시해야 하고 광고를 할 때는 소비자를 현혹해서는 안 되었다.

1990년대 초에 의회는 거래에서부터 통신에 이르기까지, 핵에너지부터 상품 안전까지, 의약품에서부터 고용기회에 관계되는 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정부 소속의 규제 기관을 100군데 이상 신설했다. 그중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미국 연방항공청(Federal Aviation Administration)을 들 수 있다. 1966년에 설립된 미국연방항공청은 항공기의 안전수칙을 강화했다. 1971년에 설립된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STA)은 자동차와 운전자의 안전을 감시하는 곳이다. 두 기관 모두 연방정부의 교통성 소속이다.

많은 규제 기관이 이론적으로는 대통령이나 정치권의 압력을 받지 않는 별개의 기구로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되어 있다. 규제 기관의 운영은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주의회의 승인을 받은 회원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이사진이 맡는다. 법적으로 이사진의 임기는 5~7년이며, 이사진에는 양 정당 출신의 의원들이 포함된다. 각 기관마다 보통 1,000명 이상의 직원을 둔다. 의회는 이 기관을 위한 전용 운용기금을 승인하고, 그 운영을 감시한다. 규제 기관은 어떤 의미에서 법정처럼 운영된다. 법정과 비슷하게 공청회가 열리고 그들의 판결은 연방법원의 감사를 받는다.

규제 기관의 공적인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의회 의원들은 종종 자신들의 선거구민을 위해 위원회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노력한다. 또한 어떤 비평가는 기업들이 자신을 규제하는 기관에 과도한 영향력을 갖는다고 비판한다. 규제 기구의 직원들이 기업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업으로부터 높은 연봉의 일자리를 제의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도 나름대로 불만을 갖고 있다. 어떤 기업은 기업환경이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정부가 기업에 내릴 규정 사항을 종이에 적자마자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기 일쑤라고 불평한다.


독점을 통제하려는 연방정부의 노력


독점은 연방정부가 기업으로부터 일반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단행한 첫번째 규제 대상이었다. 작은 기업들이 큰 회사로 합병되면 지나치게 힘이 커진 회사가 가격을 ‘고정시키고’ 경쟁기업을 곤경에 빠뜨려 시장 질서를 교란시킬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은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밖에 없고 소비자들의 선택권도 줄어들게 된다. 1890년에 통과된 셔먼 반독점법은 어떠한 개인이나 기업도 독점적 거래를 해서는 안 되며 다른 누군가와 결탁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거래를 방해해서도 안 된다고 규정했다. 정부는 1900년대 초에 존 D.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를 분할하고, 그 밖에 시장지배력을 남용하는 대기업들에게 회사 분할 명령을 내릴 때 이 법을 적용했다.

1914년 의회는 셔먼의 반독점법을 지원하는 두 개의 법안을 더 통과시켰다. 바로 클레이톤 반독점법과 연방거래위원회 법(Federal Trade Commission)이다. 클레이톤 반독점법은 어떻게 하는 것이 거래를 불법적으로 제한하는 일인지 더욱 분명히 정의해놓았다. 이를테면 어떤 구매자에게 다른 구매자보다 이익을 주는 것은 가격차별이라는 불법행위이다. 제조업체가 경쟁업체의 물건을 팔지 않기로 약속한 딜러에게만 물건을 공급해주는 행위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경쟁을 막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합병이나 행위도 금지시켰다. 연방거래위원회 법은 불공정하고 반경쟁적인 기업행위를 감독하는 정부위원회의 설립에 관한 법이다.

비평가들은 이런 새로운 반독점 방법들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1912년 U.S. 스틸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는 미국에서 생산되는 철강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반독점법에 위배되었다. 회사에 대한 법적인 소송은 1920년까지 질질 끌었다. 그러다가 1920년에 대법원은 U.S. 스틸사가 ‘불합리하게’ 거래를 교란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독점이 아니라는 획기적인 판결을 내렸다. 법정은 시장지배력이 크다는 것과 독점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명확히했고, 이 판결로 큰 회사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해서 반독점 판결을 내렸다. 연방거래위원회와 미 법무부 독점규제국은 경쟁 질서에 위협을 주고, 소비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잠재적인 독점 행위를 감독하고 합병 행위를 막았다. 다음의 네 가지 사례는 그들의 노력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쪾1945년 미국 알루미늄 회사와 관련된 사례에서 연방정부는 법원에 어떤 기업이 독점행위를 했는지 조사하기 전에 시장점유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평가해야 한다고 항소했다. 법원은 60~65퍼센트 정도로는 독점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의심스럽고, 33퍼센트는 분명히 독점이 아니며, 90퍼센트는 되어야 독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쪾1961년 여러 전기회사가 경쟁을 막고 가격을 고정시켰다는 의혹을 받았다. 기업들이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치기 위해 결탁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어떤 기업의 임원은 형을 받고 감옥에 갔다.


쪾1963년 미국 대법원은 시장지배력이 큰 회사가 연합하면 경쟁을 막으려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필라델피아 국립은행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법정은 합병으로 인해 시장지배력이 과도하게 커진다면 설령 합병이 피해를 준다는 증거가 없어도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쪾1997년 연방법원은 소매점이 밀집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 ‘대형슈퍼마켓’ 같은 소매점이 생길 경우, 멀리 떨어진 시장과도 경쟁을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따라서 이런 시장에서 두 개의 유명한 회사가 합병을 할 경우 공정한 경쟁을 막는다고 법원은 판결했다. 이에 해당하는 사례로는 사무용품 유통회사 스테이플스(Staples)와 홈 디팟(Home Depot)을 들 수 있다. 두 회사의 합병 계획은 무산되었다.

앞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떻게 하는 것이 반독점법에 위배된다고 꼬집어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법률적 해석도 다양한데다 분석가들마다 어떤 회사가 과도한 시장지배력으로 시장 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는 데 있어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황은 계속해서 바뀌고, 한때는 반독점법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였던 기업합병도 시대가 바뀌면서 소비자들에게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900년대 정부는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의 막강한 지배력을 우려하여 록펠러의 석유제국을 엑슨과 모빌 석유회사를 포함해 여러 개의 회사로 분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1990년대에 엑슨과 모빌사는 합병을 선언했다. 비록 정부가 몇 차례에 걸쳐 재고해보라고 요구했지만, 기름 값도 낮았고 경쟁을 보장할 만큼 강력한 석유회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합병을 승인했다.



운송 기관에 대한 규제 철폐


반독점법은 서로 경쟁을 시키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반면, 다른 많은 규제들은 같은 목적을 위해 철폐되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새로운 정밀조사를 통해 가격경쟁을 줄이기 위해 여러가지 규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규제 덕분에 기업이 시장의 압력을 피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교통 기관은 규제를 풀어야 할 첫번째 목표물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1977~1981)이 재임하고 있을 때 의회는 항공기와 트럭, 철도를 보호하는 대부분의 규제를 철폐하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업들은 스스로 항로나 철로, 도로의 노선을 정함으로써 경쟁을 하게 되었고 서비스에 대한 가격도 더욱 자유롭게 정해졌다. 교통 기관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과정에서 의회는 결국 두 개의 중요한 경제적 규제 기관을 폐쇄시켰다. 설립된 지 109년 된 주간통상위원회(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와 45년 된 민간항공위원회(Civil Aeronautics Board)였다.

규제 철폐의 즉각적인 효과는 평가를 내리기 어렵지만 관련 산업에 막대한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항공업을 한번 살펴보자. 정부의 통제가 사라진 후 항공회사들은 낯설고 불확실한 환경에서 자신들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부심했다. 낮은 임금의 비노조원 조종사와 승무원을 고용하여 더 값싸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불필요한 서비스를 과감히 없앤 새로운 경쟁기업이 등장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부가 정해준 요금으로 자신들의 비용을 충분히 감당해온 대형 항공사들은 갑작스런 경쟁에 압박감을 느끼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비행기 여행과 동음이의어로 사용했던 팬 아메리카 월드 에어웨이(Pan American World Airways)나 다른 어떤 항공사보다도 연간 이용승객이 많았던 이스턴 에어웨이(Eastern Airways)를 비롯해 몇몇 항공사는 결국 적응에 실패했다. 미국의 최대 항공사였던 유나이티드 에어라인(United Airlines)은 경영난에 빠졌고, 종업원들이 회사를 인수하기로 합의를 본 끝에 겨우 구출되었다.

소비자들도 영향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항공사와 새로운 서비스에 어리둥절했다. 요금 체계의 변화도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승객들도 있었다. 정부의 규제하에 독점을 해왔던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경비를 보장해줄 수 있는 선에서 요금을 정했다. 승객에 대한 서비스가 항공료에 맞게 충분히 이루어지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규제가 철폐되기 전에는 전국을 횡단하는 요금이나 장거리 항로 요금 그리고 대도시 지역을 운항하는 서비스 요금은 실제 비행기가 운행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높게 책정되었다. 반면 비용이 덜 드는 단거리 노선과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가는 비행기 요금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낮게 정해졌다. 그런데 규제가 철폐되자 소규모 경쟁사는 요금을 인위적으로 높여놓은 노선이나 승객이 많고 수지가 맞는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과거의 요금 체계는 무너져버렸다.

이런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항공사들은 항공료를 할인하거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노선에 대해서는 서비스를 줄이거나, 심지어는 결항을 했다. 대신 ‘커뮤터(commuter, 통근용)’ 항공기로 대체하였다. 이 소형 항공기는 자주 운항하지 않는데다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지만(제트기 대신 낡은 프로펠러 비행기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시장이 서비스는 좋지 않더라도 운항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랐다.

대부분의 운송 관련 기업은 처음엔 규제 철폐에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싫더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규제 철폐 초기에 등장했던 저렴한 요금의 항공기는 사라지고, 항공사 간의 합병 물결로 특정 노선에 대한 경쟁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분석가들은 규제가 있던 시절보다 항공 요금이 낮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항공 여행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1978년 항공사 규제 철폐가 시작되었을 때 미국 항공사들의 총 비행거리는 3,628억 킬로미터였다. 그런데 1997년에는 그 수가 3배로 증가하여 승객 1명당 968,640킬로미터였다.



통신 시장


1980년대까지 미국에서는 ‘전화회사’라고 하면 AT&T(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로 통했다. AT&T는 전화산업의 거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베이비 벨(Baby Bells)’이라고 부르는 자회사가 특정 지역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고 있어서 사실상 독점이나 다름없었다. 연방통신위원회는 주간 장거리 전화요금을 정했고, 각 주의 조정자들은 지역과 장거리 전화의 요금을 승인해야 했다.

정부는 전기사업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화사업자들도 독점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당연히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마다 전화선을 어지럽게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을 하는 것은 낭비이고 비효율적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통신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1970년대에 이르러 그런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회사들이 AT&T와 경쟁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광대한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면 자연스럽게 통신 분야의 독점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통신에 대한 규제는 2단계에 걸쳐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984년 법정은 거인 AT&T에게 지역 자회사를 분할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통신 독점의 시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후  AT&T는 계속해서 장거리 전화 사업은 독점할 수 있었지만 MCI 커뮤니케이션스와 스프린트 커뮤니케이션스(Sprint Communications) 같은 적극적인 경쟁자들이 더 저렴한 가격으로 더 개선된 서비스를 펼치면서 장거리 통신시장조차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년 뒤 지역 전화 서비스에 대한 베이비 벨즈의 독점권을 해체하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새로운 기술(케이블 텔레비전, 휴대폰, 인터넷 등)을 가진 회사들이 지역 통신회사에 대체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막강한 독점권을 가진 전화회사 때문에 이런 대체산업의 발달을 저해하게 될 거라고 지적했다. 특히 베이비 벨즈 같은 기존 회사가 일시적으로라도 자신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게 하면 다른 경쟁사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96년 의회는 통신법(Telecommunications Act)을 통과시킴으로써 그에 대해 화답을 했다. 법은 AT&T와 같은 장거리 통신회사뿐만 아니라 케이블 텔레비전 그리고 다른 신설 회사들에게 지역 텔레비전 사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지역의 독점권자들에게는 새로운 경쟁자들에게 그들의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명령했다. 나아가 지역 통신회사들의 경쟁체제가 자리를 잡으면 장거리 전화 사업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규정을 고쳤다.

1990년대 말, 아직은 새로운 법률의 효과를 평가하기엔 이른 시기였다. 그러나 몇몇 긍정적인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소 업체들이, 특히 도시 지역에서 지역 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많은 고객들이 저렴한 값에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휴대폰 서비스 제공업자들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가정과 인터넷을 연결해주는 인터넷 서비스 업자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의회가 예상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던 상황이 벌어졌다. 수많은 통신회사들이 합병했고, 베이비 벨즈는 경쟁을 훼방 놓기 위해 장벽을 세워놓았다. 지방 업체들이 장거리 서비스 시장으로 진출하기엔 성장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러는 사이 어떤 소비자들, 특히 기업이나 도시 소비자들 덕분에 보조금을 받아왔던 가정용 전화가입자들이나 농촌 지역의 전화가입자들은 경쟁체제 이후 더욱 비싼 전화요금을 내게 되었다.



특별한 경우로서의 은행


정부의 규제 대상으로 은행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은행은 어떤 면에서 보면 장난감 제조업체나 철강회사처럼 개인 기업이다. 그러나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기 고객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 1930년대 이후 미국인들은 은행이 가진 특별한 위치를 인식하고 다양한 규제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런 규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금보험이다. 대공황 당시 미국 경제는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은행에 저금한 돈을 돌려받지 못할까 우려한 예금주들이 일시에 돈을 인출해가려고 했다. 인출 사태가 쇄도하자 너도나도 당장 자기 돈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리하여 착실하게 운영되던 은행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은행들도 예금자들을 안심시킬 만큼 빠르게 자산을 현금화시키지 못해 문을 닫게 되었다. 그 결과 은행의 기업대출 기금이 바닥나는 바람에 망하는 기업이 속출했고 경기는 더욱 추락했다.

예금보험은 은행의 인출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다시 말해 정부가 예금액의 일정 수준까지(현재는 10만 달러이다) 보장해줄 거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엔 은행들이 재정난을 겪는 것처럼 보여도 예금주들은 더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라고 하는 정부의 예금보험 기관은 은행에서 보험료처럼 징수한 기금을 이용해 예금자들에게 돈을 지불해준다. 필요한 경우 정부가 일반적인 세수를 이용해 예금자들의 손실을 막아주기도 한다. 규제주의자들은 과도한 재정 리스크에서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은행을 감독하며, 은행이 지나친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생각될 경우엔 시정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1930년대 뉴딜 정책도 은행이 유가증권이나 보험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았다. 대공황에 앞서 많은 은행들이 주식투자로 지나치게 손실을 많이 보거나 은행 간부나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기업체에 돈을 대출해주는 바람에 은행이 자금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공황 시절의 정치가들은 은행이 증권사나 보험 업무를 하는 것을 막는 글래스 스티걸 법(Glass-Steagall Act)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1970년대 들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은행측에서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 자기 고객을 다른 금융회사에 빼앗긴다고 불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은행에게 새로운 종류의 금융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1999년 말, 의회는 글래스 스티걸 법을 폐지하고 금융개혁법안(Financial Services Moder-nization Act)을 새로 제정했다. 이 새로운 법은 은행이 고객에 대한 금융 업무부터 보험업까지 모든 업무를 자유롭게 취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은행은 이제 보험과 증권 업무까지 취급하여 복합 금융회사로 변신했으며 뮤추얼 펀드에서부터 주식, 채권, 보험, 자동차보험까지 광범위한 금융상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운송 기관과 통신, 기타 산업에 대한 규제를 폐지하는 법과 함께 이 새로운 법은 금융 기관 간에 합병의 물결을 예고하게 했다.

대체로 뉴딜 시대의 법안들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은행 시스템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건전해졌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들면서 다시 어려움에 부딪혔다. 부분적인 이유는 사회적인 규제 때문이었다. 전쟁 후 정부는 국민들의 내 집 마련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그에 따라 모기지라고 알려져 있는 장기주택대출을 집중적으로 취급하는 ‘저축대부조합(S&L)’이라는 새로운 금융 부문이 탄생했다. 그런데 저축대부조합들이 중요한 문제에 부딪혔다. 모기지는 보통 30년에 걸쳐 상환하고 고정금리를 적용하는 반면 대부분의 예금은 그보다 기한이 짧았다. 그래서 단기예금의 이율이 장기의 모기지보다 높이 상승하면 신용대부조합은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 신용대부와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 규제주의자들은 예금액에 따라 이율을 조정하기로 결정했다.

한동안 이 시스템은 잘 돌아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인들 대부분이 신용대부조합을 통해 집을 샀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은 예금보험을 믿고 열심히 저축했다. 그러나 1960년대가 시작되면서 인플레이션으로 전반적인 이자율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많은 예금자들이 MMF(Money Market Fund)나 비금융 자산의 형태로 저축하는 등 좀더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은행이나 신용대부조합은 장기대출 포트폴리오를 충당할 새로운 예금주를 끌어들이지 못해서 점차 재정 위기에 빠져들어갔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0년대에 은행과 신용대부조합의 이자율 상한선(interest rate ceilings:변동이자율 모기지의 월납부금에 부과되는 이자율의 상한선―역자주)을 단계적으로 낮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금액을 다시 끌어오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저축대부조합의 모기지 포트폴리오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고, 대부분이 당시 신용대부조합이 예금주에게 지급하는 이자율보다 훨씬 낮은 대출이자를 받았다. 다시 불만에 직면한 의회는 대출에 관한 제한을 없앴고, 신용대부조합에게 고수익 상품을 개발하도록 허용했다. 특히 의회는 일반 고객이나 기업, 상업용 부동산에 대한 대출도 허용해주었다. 또한 신용대부조합이 어느 정도의 자금을 보유해야 할지를 통제하는 일부 절차도 자유화했다.

시대에 도태될까 두려웠던 신용대부조합은 투기성 부동산 벤처 같은 매우 위험한 곳으로까지 투자 영역을 넓혔다. 많은 경우에 이런 벤처는 특히 경제상황이 나쁘게 돌변하면 하루아침에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어떤 신용대부조합은 흑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많은 신용대부조합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정부는 예산부족과 정치적 압력 때문에 규제 기관들의 권한을 위축시켰기 때문에 이미 드러난 위기에도 신속히 대처하지 못했다.

몇 년 사이에 신용대부조합의 위기는 미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금융 스캔들로 자라났다. 결국 많은 신용대부조합이 지불불능 상태에 빠져버렸다. 1970년대에 영업을 했던 신용대부조합의 과반수가 1989년에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예금자의 돈을 보장해주는 연방신용대부보험공사(Federal Savings and Loan Insurance Cor-poration)조차도 지불불능 상태에 빠졌다. 1989년 의회와 대통령은 ‘금융기관의 개혁과 회복 및 강화에 관한 법률(FIRREA:Financial Institutions Reform, Recovery, and Enforcement Act)’에 따라 국민의 혈세로 구제 조치를 단행하기로 합의했다. 이 법안으로 문 닫기 직전의 신용대부조합에 500억 달러를 제공했고, 저축기관에 대한 규제 장치를 완전히 개정하고 새로운 업무에도 제한을 두었다. 정리신탁공사(RTC:Resolution Trust Corporation)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부 기관이 지불불능 상태의 기관들을 청산하기 위해 발족되었다. 1990년 3월 정리신탁공사에 또다시 780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저축대부조합을 청산하는 데 드는 총비용이 계속해서 늘어나서 2,000억 달러에 육박했다.

미국인들은 전후의 은행에 대한 규제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정부의 예금보험은 소액예금주를 보호하며 은행이 파산될 위험을 줄여줌으로써 은행 시스템을 안정되게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둘째, 이자율을 통제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셋째, 정부는 어떤 투자은행을 설립할 것인지에 결정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투자은행 스스로 시장세력과 경제적 이득을 기반으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 넷째, 내부자나 내부자와 친분이 있는 기업에 대한 은행대출은 치밀한 감독이 필요하며 한도를 두어야 한다. 다섯째, 은행이 지불불능 상태가 되면 되도록 빨리 문을 닫고 예금주에게 예금액을 지불하고 다른 건전한 대금업자에게 대출을 양도해야 한다. 지불불능 상태의 금융 기관이 계속해서 영업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대출을 동결시킬 뿐이며 경제활동을 질식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불불능 상태가 된 은행은 대체로 망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계속해서 그 은행을 감독하며, 불필요하고 위험한 대출을 해주지 않도록 개입하는 것은 경제 전반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규제주의자들은 직접적인 감독뿐만 아니라 은행이 자기 자본의 비율을 상당히 높이도록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끊임없이 강조한다. 은행이 손실을 흡수할 수 있도록 기금을 대주는 것 외에 자기 자본의 요건을 강화하면 은행 소유주들이 책임감 있는 경영을 하게 된다. 은행이 망하면 기금들도 모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규제주의자들은 은행에게 재정 상태를 공개하도록 요구하면 은행은 자신들의 경영 성적이 외부에 알려지기 때문에 더욱 책임감 있는 경영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얘기한다.



환경보호


환경에 영향을 주는 업무를 규제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사회적인 목적을 위해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산업 발달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미국인들이 우려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으로, 지금도 그 우려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날로 증가하는 자동차들의 엔진 배기가스는 스모그와 대기오염을 일으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오염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외부성(externality: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 이에 대해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역자주)의 대표적 사례이다. 책임의 실체를 피할 수는 있지만 사회 전체가 참아야 할 희생이라는 뜻이다. 환경주의자들은 정부가 지구의 연약한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의무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경제적인 성장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1963년 청정대기법(Clean Air Act), 1972년 수질보호법(Clean Water Act), 1974년 안전음용수법(Safe Drinking Water Act)과 같은 많은 법들이 환경 보호를 위해 제정된 법들이다.

환경보호론자들은 1970년 12월 미국 환경청의 설립이라는 중요한 목표를 성취했다. 이로써 단일 창구를 통해 환경보호를 위한 연방정부의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환경청은 오염의 허용치와 함께 오염원을 기준에 맞게 줄일 수 있도록 시한을 정했다. 대부분 최근 시점을 기준으로 시한을 정했기 때문에 기업들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환경청은 또한 주와 지역 정부, 사적럭坪?단체, 교육 기관의 오염방지에 관한 연구를 조정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지방 환경청은 광범위한 환경보호 활동을 위해 지역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제안하고 수행한다.

환경청은 다양한 환경보호 활동을 통해 환경의 질이 괄목할 만큼 개선된 후에 그 성과를 보고서로 내놓았다. 실제로 전국에 걸쳐 대기오염원의 배출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1990년에도 많은 미국인들은 여전히 대기오염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의회는 청정대기법의 중요한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조지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법안도 승인했다. 산성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산화황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시장 시스템에 대한 혁신적인 규제 조항도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오염원은 숲과 호수, 특히 미국과 캐나다의 동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사회적 규제에 대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의 분열은 환경문제와 작업장의 환경, 그리고 안전 기준을 둘러싸고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이 또한 다른 종류의 규제로 확대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부는 1970년대에 대단한 열의를 갖고 사회적 규제를 추진했지만 1980년대 공화당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몇 가지 규제만 성공적으로 관철시켰다. 미국 고속도로안전관리국(National High-way Traffic Safety Administration)이 연방정부의 기준에 따라 자동차 제조업체들에게 신차에 한해 에어백 장착을 의무화했을 때 논란이 벌어졌던 일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 고속도로안전관리국과 직업안전보건국(OSHA: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과 같은 기관이 규제를 적용시키는 데에는 여러 해가 걸렸다. 결국 에어백 장착은 필수조건이 되었다.

사회적 규제는 1993년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모멘텀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5년 40년 만에 의회를 장악하게 된 공화당은 다시 사회적 규제주의자들을 수세로 몰고 갔다. 공화당은 직업안전보건국과 같은 기관에 비해 좀더 신중한 규제안을 만들어냈다.

1990년대 미국 환경청은 엄격하게 규제를 적용하고 처벌하는 대신 기업에게 환경을 보호하도록 설득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환경청은 자동차 제조업체와 전기설비회사에게 제조과정에서 매연을 덜 뿜어내게 하고, 수질을 오염시키는 폐수를 방출하거나 농업용 비료를 마구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는 사이에 클린턴 재임 기간중 부통령이었던 환경보호주의자 앨 고어(Al Gore)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대기오염을 막기 위해 미국 환경청의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또한 대기 오염물질을 덜 배출시키는 고효율 엔진(super-efficient engine) 자동차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근로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한편 정부는 시장세력을 분열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규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격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대기오염 신용 시스템을 개발하여 환경보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업체에게만 자동차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방법은 정부의 바람대로 전체적인 대기오염 수준을 가장 효율적으로 낮춰주었다.

1990년대가 끝날 때까지도 경제적 규제에 대한 소송이 잇따랐다. 서비스 지역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는 바람에 더욱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나자 많은 주들이 더이상 규제를 통해 전기설비업자들을 지배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적렌瑛?설비가 뒤섞이게 되었고, 발전 시설을 건설하는 동안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top


CHAPTER 7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미국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특정 산업에서 규제자 역할을 하는 것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부는 고용률을 최고로 유지하고 물가안정을 이루기 위해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속도를 조절한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두 가지 효과적인 수단을 갖고 있다. 바로 세율과 지출 수준을 적절하게 결정하는 재정정책과 돈의 흐름을 관리하는 통화정책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의 경제 역사는 재정과 통화정책의 합일점을 찾으려는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연관된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야말로 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어느 한쪽으로 크게 실패할 확률도 높다.

그러나 정부는 지속적으로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을 비교적 잘해왔다. 1854년부터 1919년까지는 미국의 모든 기업이 성장에 소요된 기간만큼 후퇴했다. 경제가 팽창했던(재화와 서비스의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기간은 평균 27개월이고, 반면에 경기가 침체했던 기간(생산량이 줄어드는 기간)은 평균 22개월 정도 되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는 평균 35개월 동안 경기가 상승했고, 후퇴하는 기간은 평균 18개월로 점차 성적이 나아졌다. 그리고 1945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가 상승했던 기간은 평균 50개월이었고, 후퇴했던 기간은 단지 11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은 더욱 힘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물가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1940년의 소비자가격은 1778년의 소비자가격보다 결코 높지 않았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1980년의 물가는 1940년보다 400퍼센트나 높아졌다.

정부의 인플레이션 정책이 비교적 부진했던 것은 전후 초기에 경기후퇴(그 결과 실업자가 늘어났다)를 막으려는 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9년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인플레이션에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1990년대 말까지 국가는 높은 경제 성장률과 낮은 실업률, 그리고 완만한 인플레이션이라는 3가지 복을 동시에 누렸다. 그러나 정책입안자들은 미래에 대해 대체로 낙관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기는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재정정책, 예산과 세금


1930년대 이후 정부의 지출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정부의 규모도 함께 커졌다. 1930년, 연방정부는 국가 총생산 또는 수입과 수출을 제외한 재화와 서비스 생산량의 겨우 3.3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던 1944년에는 GDP의 44퍼센트까지 증가했고, 1948년에는 11.6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지출은 곧 GDP 증가와 함께 계속해서 증가했고, 1983년에는 거의 24퍼센트에 육박했다. 그후에는 다소 줄어들어서 1999년에는 21퍼센트 정도를 차지했다.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매우 신중한 절차를 거친다. 대통령은 매년 예산 또는 지출 계획을 의회에 제안한다. 입법자들은 대통령의 제의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심의한다. 먼저 지출과 세수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결정한다. 그 다음에는 전체 예산안의 액수를 각 분야별로 나눈다. 예를 들어 국방, 보건, 교통과 같이 분야에 따라 예산액을 나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회는 각 분야별로 정확히 얼마나 지출할 것인지를 정한 지출금 법안을 조목조목 심의한다. 지출금 법안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서명해야 효력을 발생한다. 이 예산심의 과정은 의회의 전全 회기에 걸쳐 이루어지며, 대통령은 2월 초에 요청을 하고 의회는 보통 9월(어떤 때는 그보다 더 늦어진다)이 되어서야 지출 법안에 대한 심사 작업을 완료한다.

연방정부가 지출하게 될 재원의 중요한 원천은 국민들이 낸 소득세인데, 1999년에는 연방정부의 총수입에서 약 48퍼센트를 차지했다. 사회보장과 메디케어 프로그램의 재원이 되는 소득세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1998년에는 소득세가 전체 연방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고용주와 근로자들은 각각 1년에 최고 68,400달러의 세금을 각자의 월급에서 7.65퍼센트씩 동등하게 납부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는 기업 이익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연방정부의 예산으로 쓰이는 비율을 또다시 10퍼센트 올렸고, 나머지 연방 수입은 각종 세금에서 충당했다(지방 정부는 이와 대조적으로 재산세가 세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정부는 전통적으로 판매세와 물품세에 의존해왔고, 주의 소득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중요해졌다).

연방 소득세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미국 국민과 미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에게 징수하며, 미국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미국 내에서 수입을 올릴 경우에는 연방 소득세를 부과한다. 미국의 소득세법은 1862년 남북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징수한 것이 시초이다. 1862년의 세법에서는 세금 징수 업무를 관장하는 국세청장을 두고 비급여자의 재산과 수입을 파악하도록 했으며, 징수 행위를 강화하기 위해 법규를 만들도록 규정해놓았다. 국세청장의 권위와 권력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유지된다.

소득세는 헌법에 규정된 대로 징수하지 않는 주가 있었기 때문에 1895년 대법원에 의해 위헌판결을 받았다. 그후 1913년에 16번째 헌법개정안이 채택된 뒤에야 의회는 저항 없이 소득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기간을 제외하고 1930년대까지도 소득세는 여전히 연방정부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연방 소득세를 관리하기 위한 현대적인 시스템이 도입되어 소득세율이 상당히 높아졌으며, 소득세는 연방 수입에서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1943년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고용주에게 종업원들의 급여에서 소득세를 납부하게 함으로써(소득세를 뗀 후에 급여를 주도록 했다) 징수 방법을 간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서 납세자의 수는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오늘날에는 소득세를 둘러싼 논쟁이 3가지 문제를 두고 벌어지고 있다. 적절한 소득세율은 어느 정도인가, 누진세는 어떻게 부과할 것인가, 사회적인 목적을 위해 어떤 세금을 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전체적인 세금의 수준은 예산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미국인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전반기처럼 정부가 징수한 세금보다 많이 지출하는 적자운영도 허용하지만 가능하면 예산을 균형 있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세율을 더 높이는 데 기꺼이 찬성하는 반면에 공화주의자들은 작은 정부, 즉 세율이 더 낮아지기를 원한다.

처음부터 소득세는 수입이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누진세였다. 대부분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수입이 많은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당연하다며 누진세를 높이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은 가파른 누진세율 구조가 국민들의 근로 의욕과 투자 의지를 꺾기 때문에 경제에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공화주의자들은 되도록 균등한 세율 구조를 주장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단일한 세율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부르짖었다(어떤 경제학자들―민주당 지지자도 있고 공화당 지지자도 있다―은 정부가 모든 사람들에게 소득세를 줄이고 그 대신 소비세를 늘린다면 소득보다 지출에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경제가 더욱 활성화될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90년대 말에도 그랬듯이 이런 아이디어는 소득세를 징수할 때보다 특별히 좋은 점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입법자들은 특정한 종류의 경제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소득세에 다양한 공제대상 항목을 두었다. 대표적인 것이 납세자가 주택대출금을 받았을 때 그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소득세에서 공제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부는 중산층 이하의 소득세 납세자가 은퇴를 대비하거나 자녀의 대학 학자금 마련을 위해 드는 특정 개인연금(IRAs:Individual Retirement Accounts)의 불입금에 대해서도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1986년 세제개정법(Tax Reform)은 소득세가 도입된 후로 미국의 세법 체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바꾼 법이다. 세제개정법은 소득세율을 줄인 반면 가장 대중적인 소득세 공제를 폐기해버렸다(그러나 주택모기지 공제와 개인연금 공제는 유지하였다). 세제개정법은 기존의 세율에서 상위 50퍼센트를 차지했던 15개 세목을 단 2개의 세목(15퍼센트와 28퍼센트)으로 대체하였다. 다른 세금은 납세율을 줄이거나 없애고 수백만 명의 저소득층을 위해 소득세만 남겨두었다.


재정정책과 경제의 안정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으로 휘청거릴 때 정부는 처음으로 재정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회정책을 지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반적인 경제성장과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정책입안자들은 〈고용, 이자 그리고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이라는 저서를 통해 재화나 서비스의 수요가 충분하지 않으면 실업이 증가한다고 주장한 영국의 경제학자 메이너드 케인스(Maynard Keynes)의 이론에 감화를 받았다. 케인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경제가 생산해낸 모든 것을 구입할 만큼 수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물가가 떨어지고 기업은 수익을 내지 못해 파산하게 된다고 했다. 이때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는 또 많은 기업들이 파산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수입이 더욱 줄어들어 경제는 추락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추락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정부가 국고를 지출하거나 세금을 줄이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수입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쓸 것이고, 그러면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따라서 정부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자 운영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케인스는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는 경제가 추락하는 것보다 그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케인스의 이론은 1930년에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군사비 지출이 막대하게 늘어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의 이론에 동조하는 듯이 보였다. 정부의 지출이 팽창하자 사람들의 수입도 늘어나고 공장은 다시 쉬지 않고 가동했으며 대공황의 고단함도 차츰 기억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경제는 주택 구입과 결혼을 미루었던 사람들의 억눌렸던 수요가 분출하면서 호황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60년대 정책입안자들 역시 케인스의 이론에 집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당시 정부가 경제정책에서 잇따라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데 동의했다. 1964년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감세정책을 발표한 후 린든 B. 존슨 대통령(1963~1969 재임)과 의회는 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한 정부 지출 프로그램을 연달아 시행했는데, 이 프로그램들은 비용이 많이 들어갔다. 또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미군들을 위해 군사비 지출을 늘렸다. 이러한 대규모 정부 프로그램 덕분에 소비 지출이 늘어나고 경제가 생산할 수 있는 양 이상으로 물건이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결국 임금과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 임금과 물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올라가는 현상을 보였다. 이렇게 경제 전반에 가격이 오르는 것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케인스는 이런 과잉수요 기간에는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로 보아 반인플레이션 재정정책은 정치적으로 납득시키기가 어려웠고, 정부 역시 정책 기조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1970년대 초반이 되자 정부는 국제 유류 가격과 식품 가격의 가파른 상승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정책입안자들은 곧 딜레마에 빠졌다. 연방정부의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올리면 통화 수요를 차단해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높은 유류가 때문에 이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경제로부터 소득세를 쥐어짜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실업률이 가파르게 상승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정책입안자들이 유류가를 올림으로써 생기는 수입의 손실을 보전하기로 결정한다면 정부 지출을 늘리거나 감세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정책적으로 유류나 식품의 공급을 증가시킬 수 없으므로 공급의 변화 없이 수요를 진작시키는 일은 단지 가격만 올려놓을 뿐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1977~1981 재임)은 두 갈래 전략으로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실업률을 낮추는 재정정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연방정부의 적자 규모를 늘리도록 허용하고, 실업자를 위한 취업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자발적인 임금 삭감과 가격 통제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1970년대 말, 국가는 높은 실업률과 높은 인플레이션의 이중고를 겪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런 ‘스태그플레이션’을 케인스의 경제학이 실패한 증거라고 여겼고, 정부가 재정정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정부의 재정적자는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경기침체로 우울했던 1970대에 재정 적자는 또하나의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그러고 나서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81~1989 재임)이 감세정책과 군사비 지출을 늘리는 바람에 적자폭은 더욱 커졌다. 1986년에는 적자액이 무려 2,210억 달러로 늘어나서 총지출의 22퍼센트를 넘어섰다. 이제는 정부가 수요를 늘리기 위해 정부지출이나 세금정책을 펴고 싶어도 엄청난 적자 때문에 섣불리 고려할 수가 없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적자를 줄이는 일이 재정정책의 지상 목표가 되었다. 해외교역 기회가 빠르게 늘어나고 기술 발달로 신제품이 속속 출시되자 정부는 정책적으로 성장을 촉진시켜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대신 관료들은 적자 규모가 적으면 정부의 차용액을 줄일 수 있고, 이율을 낮출 수 있어서 기업이 사업확장을 위한 재원을 쉽게 조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 예산은 마침내 1998년에 흑자로 돌아섰다. 곧 감세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세금을 낮추겠다는 정부의 열의는 조금 시들해졌다. 새로운 세기에는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은퇴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보장 시스템과 의료보험 수령액이 늘어나서 정부 예산상 중요한 도전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90년대 말, 정책입안자들은 전임자들에 비해 광범위한 경제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재정정책을 이용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경제의 수익성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작은 정책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레이건과 그의 후임인 조지 부시는 자산 매각 소득, 즉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 가치를 평가한 결과 새롭게 증가한 부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을 감면하기로 추진했다. 그렇게 하면 저축과 투자로 인한 수익이 증가해서 저축과 투자를 활성화시킬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부유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예산 적자가 줄어듦에 따라 클린턴 대통령은 이를 묵인했고, 1996년에 양도소득세를 28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줄였다. 한편 클린턴은 노동 생산성과 경쟁력을 갖춘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각종 교육과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장려함으로써 기업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했다.



미국 경제와 돈


예산이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었던 시절에는 재정정책이 경제 전반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통화정책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통화정책은 미국 정부의 독립 기관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의 영역이다. 연방준비제도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과 25군데의 연방준비은행 지점(Federal Reserve Bank branch)으로 구성된다. 전국적인 인가를 받은 상업은행은 모두 법에 의해 연방준비제도의 회원이 되며, 지방 은행은 원하는 경우에 회원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은행은 연방준비제도의 회원이며, 우리가 자기 동네의 은행을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행은 자기 지역의 준비은행을 이용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연방준비제도를 운영한다. 이사회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7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14년이다. 이사회의 가장 중요한 통화정책 결정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 Federal Open Market Committee)에서 맡고 있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7명으로 구성되는데,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와 다른 연방준비은행의 총재 4명이 돌아가면서 위원장을 맡는다. 연방준비제도는 분기별로 의회에 자신들의 활동을 보고해야 하지만, 법적으로 이사회는 의회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그들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방이사회의 활동은 중요한 정책의 경우 비밀리에 논의하고, 분기가 끝난 다음에 공개하는 경우도 흔하다. 또 연방준비이사회는 투자 수입에서 운영비를 스스로 인상하며 자신의 일에 대한 보수를 스스로 지급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경제에 있어 통화의 공급과 신용대부를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공개 시장을 운영하고, 정부 채권을 사고파는 일이다. 통화 공급을 늘리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은행이나 다른 기업 또는 개인에게서 공채를 사들이고 수표(check)를 지급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수표가 은행에 예치되어 있으면 그것은 새로운 준비금이 되어 은행은 그 양만큼 대출해주거나 투자함으로써 시중에 통화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 한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통과 공급을 줄이고 싶을 때 은행에 공채를 팔고 은행으로부터 준비금을 사들인다. 은행은 준비금이 적어지기 때문에 대출을 줄여야 하고, 따라서 통화 공급은 줄어들게 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또한 예금 수취 기관들이 자기 금고에 현금으로 또는 지역 준비은행에 예금 형태로 준비금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지 지정함으로써 통화량 공급을 조절한다. 지불준비금의 수준이 올라가면 은행은 더 많은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통화 공급을 줄이고, 반대로 지불준비금의 수준이 내려가면 통화 공급을 늘린다. 은행들은 종종 이 지불준비금을 맞추기 위해 밤 사이에 서로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 주어진 시점에 ‘연방기금 금리(federal funds rate)’라고 하는 이 대출 이율에 따라 통화정책이 ‘긴축적인지’ 아니면 ‘느슨한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세번째 수단은 상업은행이 준비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릴 때 지급하는 이자 또는 할인율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할인율을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따라 은행이 대출을 해줄 수 있는 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대출을 장려하거나 위축시키게 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위와 같은 수단들을 통해 통화량이나 신용대부를 증가시키거나 위축시킨다. 가령 통화량이 올라가면 신용대부는 느슨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자율이 떨어져서 기업의 지출과 소비자의 지출이 늘어나게 되며 고용도 증가한다. 만일 경제가 이미 이런 정점에 근접해 있다면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유통되고 있어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달러의 가치도 떨어진다. 반면에 통화량이 줄어들면 신용대부는 엄격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자율이 올라가고 지출 수준은 내려가며 인플레이션 가능성도 약해진다. 만일 경제가 이렇게 침체되었을 때 돈줄을 죄면 실업률이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특정 목적을 위해 통화정책을 이용할 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여러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돈의 종류가 다양해서 어떤 것을 목표로 하는지 명확치 않다는 점이다. 가장 기본적인 종류는 동전과 지폐이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동전은 1달러를 기준으로 해서 정해진다. 1페니는 1센트로 1달러의 100분의 1의 가치를 지닌다. 니켈은 5센트를 의미하며, 다임은 10센트의 가치를 지니다. 1쿼터는 25센트이며, 1달러의 반은 50센트이고, 1달러짜리 동전이 있다. 지폐는 1, 2, 5, 10, 20, 50, 100 달러 등이 있다.

더욱 중요한 통화량의 구성 요소는 은행과 다른 금융 기관에 예치되어 있는 당좌계좌(수표예금)와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당좌대월 한도이다. 개인은 현금 대신 수표(writing check)를 지불하는데, 이는 은행으로 하여금 수표를 받은 사람에게 수표에 표시된 금액을 지급해주라고 지시하는 것과 같다. 정기예금은 예금자가 일정 기간 돈을 예치시키기로 약속한다는 점만 빼면 당좌예금과 비슷하다. 예금자는 만기일 전에도 예금을 찾을 수 있지만 그만큼 위약금을 내고 이자의 일부를 몰수당하게 된다. 통화에는 MMF도 포함되는데, 이는 단기성 유가증권 지분뿐만 아니라 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자산을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보관되고 있는 돈의 양은 사람들의 선호도와 그 밖의 요인들(경제 전반에 중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요인들)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업무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통화량의 변화가 불확실하게 지속된 뒤에야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통화정책과 재정 안정화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오랜 세월 중요한 상황에 대처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해왔다. 1913년 의회는 금융 시스템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19세기에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금융 공황에 대한 예방책으로 연방준비제도를 마련했다.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후 의회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준비금 요건을 다양화하고, 주식시장의 마진(사람들이 신용으로 주식을 살 때 적립해두어야 하는 현금의 양)을 조절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종종 경제정책을 세울 때 의회의 의견을 좇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중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미국 재무성이 낮은 이자로 돈을 빌리도록 도와주는 하부조직에 불과했다. 훗날 정부가 한국전을 지원하기 위해 재무성의 막대한 채권을 팔았을 때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하락하는 채권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사들였다(그래서 통화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1951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재무성과의 합의하에 자신들의 정책이 재무성의 자금조달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선언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여전히 정치적인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예를 들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1953~1961 재임)이 보수적인 재정정책을 집행했을 때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물가 안정과 통화량 억제를 강조했다. 반면 1960년대 좀더 자유스러운 대통령 임기 동안에는 고용안정과 경제성장에 역점을 두었다.

1970년대에는 대체로 실업률을 낮추려는 정부의 의지에 따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신용대부를 급격히 늘리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경제의 발목을 잡자 1979년부터 갑자기 엄격한 통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성공적으로 통화공급을 늦췄지만 1980년과 1981~1982년에 경기침체를 유발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의 증가율이 둔화되고,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다시 조심스레 확대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방정부가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해 자금을 많이 빌려 쓰게 됨에 따라 이자율은 비교적 높은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990년대가 되어 예산 적자가 줄어들다가 마침내 흑자로 돌아서자 이자율도 서서히 낮아졌다.

경제 안정에 있어 통화정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재정정책의 역할이 줄어든 것은 정치적럭姸╂?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의 경험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실업률은 그렇다 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재정정책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정부는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인상하는 등 반대중주의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반면에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정부가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재정정책은 지출을 늘리거나 세금을 깎는 등 더욱더 인기영합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정치권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통화정책을 더욱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른 이유는 ‘왜 재정정책은 실업률을 낮추는 데 훨씬 적합하고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훨씬 효과적인지’를 암시해준다. 1930년대처럼 미국이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던 시기에는 통화정책으로 경제를 살리는 데 한계가 있다. 경기침체를 처방하는 통화정책은 이자율을 낮춤으로써 시중에 돈이 많이 돌게 해야 하는데, 일단 이자율이 0이 되면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더이상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미국의 경우엔 경제학자들이 ‘유동성 함정’이라고 부르는 이런 지경에 이른 적은 없지만 일본은 1990년대에 이런 시기를 겪었다. 경기침체와 함께 이자율이 0에 근접했을 때 경제학자들은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면 막대한 예산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지출을 다시 늘리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경제란?


오늘날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경제전문가들은 통화정책을 풀 것인가, 죌 것인가를 결정할 때 여러가지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중 하나는 경제의 실질 성장과 잠재 성장력을 비교하는 것이다. 잠재 성장력은 노동력의 성장과 생산성에 따른 소득 또는 근로자 1인당 총생산액과 같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 노동력은 1년에 1퍼센트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고, 생산성은 1~1.5퍼센트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잠재 성장률은 2~2.5퍼센트 정도 될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추정한 결과, 실질 성장이 장기간의 잠재 성장력을 초과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될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통화량을 억제했다.

두번째 예측 방법은 인플레 비가속 실업률이라고 부르는 NAIRU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실업률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10년 동안 경제전문가들은 대체로 NAIRU를 6퍼센트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후 10년 동안에는 약 5.5퍼센트까지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된 중요한 이유는 1990년대 후반 반도체 제조나 레이저, 화이버옵틱(유리섬유에 의한 빛의 굴절 전달 장치―역자주), 인공위성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경제전문가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미국 경제의 생산성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보기술이라고 부르는 최근의 기술혁명은 사업을 하고 가치를 창조해내는 일을, 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은 1999년 중반에 이런 말을 했다.

그린스펀의 지적에 의하면 소비자 욕구나 원료의 위치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면 재고 창고를 더 크게 만들어야 하고 종업원도 더 많이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의 질이 좋아지면 더욱 효율적으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정보기술은 배분 시간도 단축시켜주므로 혁신의 과정을 더 단순화, 가속화시킨다. 예를 들어 건축회사에서는 컴퓨터가 설계를 하게 되면서 필요한 직원도 줄어들었고 설계 시간도 단축되었다. 또 병원에서는 병을 진단하는 시간이 더욱 빨라지고 정확해졌다.

이러한 기술혁신은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로 생산성을 급격히 향상시키는 듯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연간 1퍼센트도 안 되었던 생산성이 1990년대 말로 갈수록 3퍼센트 정도가 증가했다. 경제학자들이 예측했던 것 이상이었다. 높은 생산성은 비즈니스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근로자들이 무리하게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게 된 것도(경제 환경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근로자들이 직업 유지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갑자기 ‘새로운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인플레이션 없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 조롱을 보냈다.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미국의 산업 중에 많은 부분이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컴퓨터는 미국인들의 사업 방식을 바꾸었고 경영을 한층 복잡하고 새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전문가들은 경제가 의미심장한 ‘구조적 변화’의 와중에 있다는 그린스펀의 견해에 전폭적으로 동의했고, 경제가 변화하고 있는가에 관한 논란 대신 이런 놀랍고도 강력한 성과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토론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해답은 경제 구성 요소 중에 역사가 가장 오래된 노동력에 달려 있는 듯했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산업 분야에서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에는 전체 인구증가율보다 빠르게 고용률이 증가했다. 하지만 이런 추세는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않았다. 1990년 중반, 16~64세의 ‘잠재적 노동인구(실업 상태에 있지만 직업을 구할 경우 일할 의사가 있는 경제인구)’의 숫자는 천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가 1970년에 처음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에 경제전문가들은 미국이 머잖아 노동력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되어 임금이 오르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거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게 경기를 진정시키라고 촉구했다.

여전히 성장을 지연시킬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것처럼 보였다.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이면 활용할 수 있는 노동력의 폭이 커질 것 같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증가하는 이민자들을 곱게 보지 않는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그 방법은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는 미국인들 중에 점점 더 많은 수가 전통적인 은퇴 연령인 65세를 넘어서도 일하는 경우가 많아질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또한 잠재적인 노동력의 공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1999년 저명한 비즈니스 리서치 조직인 경제발전위원회(CED, Committee on Economic Development)는 고용주들에게 나이 많은 근로자들을 작업현장에서 내몰았던 기존의 장벽들을 치우라고 권유했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2030년에는 65세 이상의 노인 한 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세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 될 거라고 예측했다. 1950년대의 일곱 명에 비하면 획기적인 변화로, 경제발전위원회는 머지않아 기업들이 인력을 찾아 길거리로 나서야 할 거라고 예측했다.

“기업들은 지금까지 젊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조기퇴직제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력이 남아돌던 옛날에나 가능했던 꿈같은 얘기이다. 아마도 인력 부족으로 문을 닫는 기업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공을 누리는 동안 미국은 어느덧 1990년대를 보내고 미지의 경제적 영토로 들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는 새로운 경제의 시대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확실성을 염두에 둔다. 물론 불확실성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도 조심스런 낙관론을 피력한다. 1997년 그린스펀은 이렇게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역사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환상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 환상은 결국 신기루로 밝혀지곤 했다. 다시 말해 역사는 우리들에게 신중하라고 충고한다.”


top


CHAPTER 8  미국의 농업, 그 중대한 변화


건국 초기부터 농업은 미국의 경제와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물론 농민은 식량을 제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에서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특히 미국에서는 농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왔다. 건국 초기에 농민들은 근면함, 주도권, 자기만족과 같은 기업가의 미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더욱이 많은 미국인들, 특히 땅을 한 평도 가져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이나 제품에 대한 소유권을 가져보지 못한 이민자들은 농토를 소유함으로써 비로소 미국의 경제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티켓을 얻게 된다고 생각했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도 농토를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또다른 투자 수단으로 여겼다.

미국의 농부들은 대체로 식량을 생산하는 일로 꽤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이따금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다. 농업 부문은 주기적으로 과잉생산을 하는 바람에 가격이 하락하여 고통을 겪었다. 오랜 세월 정부는 이런 최악의 상황을 원만하게 넘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정부의 재정 지출이 줄어들고 농업 부문의 정치적 영향력도 줄어듦에 따라 정부의 지원도 줄어들고 있다.

미국의 농부들은 여러가지 요인 덕분에 대량생산을 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매우 좋은 자연환경에서 일한다. 미국의 중서부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농토이다. 강수량 또한 가장 적당하다. 강과 지하수 덕분에 관개농업이 가능하다.

대규모의 자본 투자와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의 증가도 미국의 농업이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엔 농부들이 냉방이 잘 된 트랙터 운전석에 앉아 있거나 매우 비싸고 성능 좋은 쟁기, 경작기, 탈곡기 등을 작동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생명공학의 발달 덕분에 병충해나 가뭄에 잘 견디는 종자가 개발되었다. 비료와 살충제도 흔하게 사용된다(환경단체에서는 너무 많이 사용해서 탈이라고 한다). 컴퓨터로 농사 경영을 관리하고, 심지어는 공간 기술을 이용하여 어떤 곡물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연구원들이 물고기를 기르기 위해 양어장을 만들듯이 새로운 경작법이나 새로운 작물을 소개해준다.

그러나 농부들은 여전히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능력 밖의 힘, 주로 날씨라는 변수를 받아들여야 한다. 날씨는 대체로 좋은 편이지만 북미 지역에도 이따금 홍수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찾아온다. 날씨 변화 때문에 농작물도 나름대로의 경제적 주기를 갖는다.

어떤 원인으로든 농사를 망치게 되면 정부에 대해 지원 요청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1930년대는 과잉생산과 나쁜 날씨, 대공황이 겹치는 바람에 미국의 농민들에겐 더할 수 없이 불운한 시절이었다. 정부는 전면적인 농업개혁으로 대처했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격지원제도였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의회는 1990년대 후반에야 많은 지원 프로그램을 폐기하였다.

1990년대 후반 미국의 농업 경제는 호황과 불황의 주기를 이어갔다. 1996년과 1997년에는 호황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두 해 동안에는 침체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는 20세기 초반부터 계속되어왔던 농업경제의 양상과는 사뭇 달랐다.



초기의 농업정책


식민지시대에 영국의 왕권은 거대한 대륙을 커다란 땅 덩어리들로 분할한 다음 개인이나 민간기업에 소유권을 내주었다. 땅주인들은 나중에 자기 땅을 더 분할해서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했다. 1783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은 땅을 분배할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소유자가 딱히 정해지지 않은 땅들을 모두 연방정부에 귀속시킨 다음 1에이커에 2달러 50센트를 받고 팔았다.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고 이 새로운 땅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 땅이라는 명확한 증서도 없는 ‘스쿼터(squatter, 무권리 거주자)’들로 정착을 했다. 건국 초기 1세기 동안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 땅을 개간해서 먹고살면 언젠가는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받게 될 거라고 믿었다. 마침내 1862년 자영농 창설법(Homestead Act)이 제정되면서 서부의 광활한 땅이 정착민들에게 개방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연방정부는 여러 개의 주에 주립대를 설립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연방정부 소속의 토지를 따로 마련해두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 모릴 법(Morrill Act)을 통해 공립 단과대학과 대학들이 설립되어 국민들에게 새로운 교육 기회를 제공했고, 특히 농업을 비롯해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쳤다.

미국에는 적당한 규모의 농장을 소유한 개인들이 서서히 증가했지만 남부만은 그렇지 않았다. 남부는 남북전쟁(1861~1865) 이전부터 이미 수천 헥타르는 아니더라도 수백 헥타르에 달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는 담배나 쌀, 면화 농장들이 많았다. 이들 농장은 몇몇 소수의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농장의 인부들은 대개 노예들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이 노예들은 소작인의 신분으로 전 주인의 관리하에 그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제분소나 공장, 상점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에게 식량을 풍족하게 공급하는 일은 건국 초기에 산업화를 이끌었던 원동력이었다. 농작물을 먼 거리에 있는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도록 수로와 철도 시스템이 발달했다. 중서부의 거친 토양을 개간하는 데 필수적인 강철 쟁기나, 곡물을 베고 탈곡하고 깨끗이 정제하는 콤바인과 같은 새로운 농기구의 발달로 농업 생산성은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기술혁신의 결과로 많은 농촌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대신 그들의 아들과 딸은 새로 만든 방앗간이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1860년에는 전국의 200만 개 농장에서 풍부한 양의 농작물을 생산해냈다. 그 농작물은 1860년대만 해도 82퍼센트가 해외로 수출되었다. 다시 말해 농업은 미국 경제 발전의 기초를 다졌던 것이다.

미국의 농업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농민들은 정부 정책이 자신들의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1867년에 처음으로 농민을 위해 생긴 정치적 옹호 단체인 그랜지(The Grange)가 결성되었다. 그후로 농민연맹(Farmer? Alliance)과 인민당(Populist Party) 같은 비슷한 단체가 빠르게 생겨났다. 이들 단체는 철도와 상인들, 그리고 은행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농민들은 철도 운송료가 너무 비싸고, 상인들은 터무니없이 이익을 챙기는 거간꾼이며, 은행의 신용대출 문턱은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농민단체가 행사한 정치적 압력은 몇몇 가시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철도 요금과 곡물 값의 인상은 정부의 규제를 받게 되었으며 수백 개의 협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896년 농민단체는 이름난 연설가이자 민주당원이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대통령으로 지지함으로써 국가적인 정치 의제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는 낙선하고 말았다. 그후로 도시 거주자들과 동부의 기업들은 농민들의 요구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낮은 이자로 쉽게 대출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농민들의 요구에 대해선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거라고 두려워했다.



20세기의 농업정책


19세기 말에 농민단체의 정치적 영향력이 많이 약해졌는데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초반부 20년은 미국 농업의 황금기였다. 재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지가地價가 오르면서 곡물 가격도 올라갔다. 기술의 발달로 생산성은 계속해서 높아졌다. 미국 농무부는 신기술 덕분에 곡물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1914년에 의회는 농가에게 비료 정보를 비롯해 가족영농법에 관해 조언을 해주는 농업지도소(Agricultural Extension Service)를 신설하였다. 그 밖에 농무부는 적은 먹이로 돼지를 빨리 살찌우는 방법, 곡물의 소출량을 늘리는 비료, 농작물을 더 건강하게 기르기 위한 종자교배법, 농작물이나 가축의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 해충을 박멸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했다.

20세기 초반의 호시절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곡물 가격이 떨어지면서 막을 내렸다. 농민들은 다시 연방정부에 도움의 손길을 청했다. 그들의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동안 다른 국민들, 특히 도시 거주자들은 1920년대의 번영을 마음껏 누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농민들에게는 힘겨운 시기였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더이상 자급자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계류와 종자, 비료뿐만 아니라 공산품을 사기 위해 현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나라 전체가 불경기에 빠져들자 국가는 곧 농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위기에다 과잉생산으로 농민들의 어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게다가 악천후까지 겹쳐 농업 전망마저 어둡게 했다. 가뭄과 끊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거대하고 비옥했던 농토의 흙들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황진(누런 흙먼지, dustbowl)이란 말은 당시의 끔찍한 악천후에서 생겨났다.

1929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Herbert Hoover, 1929~1933 재임)이 연방농업이사회(Federal Farm Board)를 설립하면서 정부가 농업 경제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사회는 대공황으로 인해 더욱 심각해진 농촌의 어려움을 일시에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설립된 것만으로도 국가가 농민들의 생활 안정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농업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라는 선례를 만들었다.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후버 전임 대통령의 권한을 뛰어넘는 전국적인 농업정책을 세웠다. 루스벨트가 제안하고 의회의 승인에 따라 전국적으로 농업생산량을 제한하여 농산물 가격을 인상시키는 법이 제정되었다. 정부는 또한 농민들을 위해 시장이 호황일 때 받는 가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패리티(parity:농가의 수입과 생활비와의 비율―역자주)’ 가격을 보장해주는 가격지원제도를 채택했다. 농산물을 과잉생산해서 곡물가가 패리티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정부가 그 잉여 농산물을 사주기로 합의했다.

뉴딜 정책도 농민들을 도와주었다. 의회는 시골까지 전화선을 보급하는 농업전화국의 신설을 허용했다. 정부는 농가와 시장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여 농촌과 도시의 접근성을 더욱 높였다. 농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토양보전 프로그램 마련에도 역점을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농촌 경제는 다시 한번 과잉생산의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솔린과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류, 살충제와 화학비료의 사용 등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헥타르당 생산량이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과잉생산된 농산물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고, 대신 납세자의 세금을 희생시켰다. 1954년에 의회는 식량난을 겪고 있는 국가에 미국 농산물을 수출하는 평화 식량 프로그램(Food for Peace Program)을 마련하였다. 정책입안자들은 농산물 수출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했다. 또 박애주의자들은 미국의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인류애 넘치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대에 정부는 잉여 농산물을 국내의 빈민층에게도 나눠주기로 결정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빈곤 퇴치’를 부르짖었던 시기에 정부는 저소득층들에게 식료품 가게에서 무료로 식료품을 살 수 있는 쿠폰을 지급하는 푸드 스탬프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그 밖에도 잉여 농산물을 이용해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급식을 주는 프로그램도 잇따라 실시되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농촌 보조금 형태로 도시민을 후원하는 것으로 오랜 세월 지속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농촌뿐만 아니라 빈민을 위한 공공복지의 한 유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농업 생산성은 계속해서 높아졌고, 그에 따라 정부의 가격지원제도에 소요되는 비용도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농촌 지역이 없는 주의 정치가들은 이미 농산물이 풍부한데도 계속해서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장려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특히 잉여 농산물 때문에 가격이 내려가고, 그렇게 되면 정부의 지원도 그만큼 더 커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에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973년 미국의 농부들은 부족분 지불제도 또는 차액보장제도(deficiency payment)라고 하는 형태로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패리티 가격제도와 비슷한 것이다. 이 부족분 지불제도에 따라 농민들은 일부 농토에서 농사를 짓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장 가격을 높이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0년대에 새롭게 도입된 패이먼트 인 카인드 프로그램(Payment-in-Kind Program)은 정부가 곡물이나 쌀, 면화 등의 지분을 사들이는 것을 줄이고 농경지의 25퍼센트를 경작하지 않고 놀려서 시장 가격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가격보조금과 부족분 지불제도는 곡물이나 쌀, 면화 같은 기본적인 농산물에만 적용되었다. 레몬이나 오렌지 같은 몇몇 농산물은 공개적인 매매 제한 방법을 따르도록 했다. 마케팅 오더(marketing order)라고 하는 이 방식은 생산자가 일주일에 한정된 양만큼 신선한 상태로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판매를 제한함으로써 농민들이 높은 가격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1980년대에는 농업 지원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정부(즉, 납세자)의 비용이 1년에 20억 달러를 초과하기도 했다. 그러자 농촌이 아닌 다른 지역의 유권자들은 연방정부가 농토가 아닌 농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고, 비용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다. 의회는 다시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작은 정부를 부르짖는 가운데 의회는 농민들의 정부보조금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대신 미국 농산물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새로운 농업 입법을 마련했다. 법안의 내용을 보면 농가지원금을 줄이고,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농경지를 10년에서 15년 동안 1,600만 헥타르에서 1,800만 헥타르까지 휴경지 상태로 두게 했다. 1985년의 법은 정부의 농촌 지원이라는 골격은 약간만 바꾸고, 지원금의 총액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도록 농가의 경제적 환경을 개선시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를 지나면서 연방의 예산 적자가 더욱 늘어남에 따라 의회는 계속해서 연방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1990년에 의회는 농민들에게 전통적인 부족분 지불제도에 해당되지 않는 작물을 심도록 장려하는 법안을 승인함으로써, 부족분 지불제도의 혜택을 입는 농경지의 면적을 줄였다. 새로운 법률 내용을 보면 특정 작물에 대해서는 높고 고정적인 가격보조금을 지급하고, 정부가 특정 농산물 시장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1996년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1994년에 선출된 새로운 공화당 의회는 농부들이 정부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자유농업법(Freedom-to-Farm Act)의 내용은 비용이 많이 드는 농업지원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또 농민들에게 어떤 작물을 어느 정도 생산하라고 하는 제한도 두지 않고 세계시장을 상대로 자유롭게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농민들은 시장 가격과 상관없이 정해진 보조금을 받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법은 낙농보조금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도록 명시했다.

뉴딜 정책으로부터 갑작스레 바뀐 변화에 농민들은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회는 과도기를 잘 넘길 수 있도록 7년의 유예기간을 두었다. 그동안에는 작물 가격이 많이 오른다고 해도 농민들에게 36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땅콩과 설탕에 대한 가격보조금은 그대로 유지했으며 콩과 면화, 쌀에 대한 보조금은 올렸다. 오렌지와 그 밖의 농산물에 대한 마케팅 오더는 약간 바뀌었다. 이렇게 농민들에게 정치적으로 양보한 것을 보면 정부의 지원이 약간 줄어든 시스템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새로운 법이 적용되더라도 의회가 계속해서 시장 가격을 유지하고, 보조금 삭감의 충격을 흡수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2002년도의 옛날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998년 아시아 지역의 외환위기와 함께 미국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을 때 새로운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고, 곡물과 육류의 가격도 급락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낮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해서 수입을 올리려고 했다. 그 결과 1998년과 1999년에 의회는 단계적인 철폐를 규정했던 1996년의 법조항에 따라 농민들에게 한시적으로 보조금을 주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실제로 1999년에는 225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농업정책과 세계무역


세계시장에 대한 상호의존도가 높아지자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세계 지도자들은 국가간의 농산물 교역을 규제하는 등 더욱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국의 농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정부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세계 농업시장의 환경이 빠른 속도로 다양해지자 농업 비중이 큰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국 농민들을 보호하는 프로그램을 신설하거나 기존의 정책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세계 농업시장을 위축시켰고 국제 농산물 가격을 떨어뜨렸으며, 농산물 수출 국가에는 잉여 농산물이 쌓이게 만들었다.

속좁게 생각하면, 왜 국가적으로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는 대신 잉여 농산물을 자유롭게 수출함으로써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이해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전략은 불가능하다. 자국의 농산물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나라에서 농산물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정부는 보조금을 줄이는 작업에 착수하고 농산물의 자유무역을 허용했다. 1986년 7월 미국은 다자간 교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의 일부로 국가간 농산물 거래를 개혁하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세계적으로 중요한 국제협정 회원국인 90개국이 넘는 나라들에게 모든 보조금과 그 밖의 가격과 생산, 무역을 왜곡시키는 정책들을 서서히 폐기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특히 유럽의 농업 지원금제도를 폐기하고 일본의 쌀 수입 규제를 풀어줄 것을 원했다.

다른 국가나 단체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제안을 하는 대신 무역구조를 왜곡시키는 보조금을 되도록 폐지하고 자유시장체제로 나아가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농업보조금 폐지에 대해 국제적인 합의를 도출하기까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1991년 주요 서구 선진국의 대표들은 농업보조금을 폐지하고 자유시장 체제를 유지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재합의에 들어갔다. 1995년 마침내 우루과이라운드는 완전히 타결되었고, 농업과 수출 보조금을 없애고 자유시장 체제로 가기 위한 변화(수입 쿼터제의 경우는 관세를 쉽게 삭감해주는 쪽으로 바꾼다든지 하는 방식)를 꾀하기로 서약했다. 그후 새로운 회담을 여러 차례 열어서(1999년 말 세계무역기구 시애틀 각료회의) 이 문제를 다시 다루었다. 회담의 목적은 수출보조금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거기까지 합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한편 유럽공동체는 수출보조금을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1990년대 말에는 무역 긴장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농산물 교역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공동체는 농업보조금을 삭감한 후에 취해야 하는 후속 조치가 미흡해 보였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로부터 우호적인 결정을 얻어냈고, 이어 1995년 GATT는 유럽이 계속해서 보조금을 지급하는 일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인공 호르몬을 첨가하거나 유전자 조작을 한 미국 식품에 대한 수입 장벽을 오히려 높였다. 이는 미국의 농업 부문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1999년 초에 미국 부통령인 앨 고어는 다시 한번 농업보조금과 관세를 낮출 것을 세계에 요청하였다. 일본과 유럽 국가들은 우루과이라운드와 마찬가지로 이런 제안에 저항을 느꼈다. 한편 세계무역 자유화로 나아가려는 미국의 노력은 1990년대 말에 수출 경기가 침체되면서 또다른 장벽에 부딪혔다.



대규모 사업으로서의 농업


미국 농민들은 20세기에 겪었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안은 채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문제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과잉생산이다. 정부가 재원을 조달해주고, 계속해서 우수한 농기구를 개발해내고, 양질의 종자와 비료를 연구하고, 더 많은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효과적으로 병충해를 방제하기 시작한 이후로 농민들은 자신의 일을 한층 더 성공적으로 해오고 있다(돈 버는 일만 빼고). 그리고 농민들은 대체로 가격이 오를 때까지 수확물을 보유하고 싶어하는 반면 생산량을 줄이는 것은 꺼리고 있다.

기업들이 회사의 규모를 키우고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농민들도 더 넓은 농토에서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싶어한다. 사실 미국의 농업은 급격하게 ‘기업농’ 형태로 발전해왔다. ‘기업농’이란 현대 미국의 경제에서 많은 농장들이 기업화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기업농은 가족끼리 농사를 분담하는 가족농에서부터 거대한 농토를 소유하고 농민들을 고용해 농사를 짓는 복합기업 혹은 다국적기업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 말에 기업농이 출현한 것은 농장의 숫자는 적어진 대신 규모는 커졌음을 의미한다. 이따금 외부의 주주가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형 농장은 기계를 많이 사용하고 사람의 일손은 덜 쓴다. 1940년에는 전국에 평균 67헥타르의 농토를 소유한 600만 군데의 농장이 있었다. 1990년대 말에는 220만 군데의 농장에서 평균 190헥타르의 농토를 소유했다. 이런 변화와 함께 농장의 일꾼들도 굉장히 많이 줄어들어서 1930년에는 1,250만 명에서 1990년대에는 120만 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그동안에 미국의 인구는 2배 이상 늘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1900년에는 노동력의 절반이 농부였지만 세기말에 와서는 겨우 2퍼센트만이 농사를 전업으로 삼고 있다. 그렇지 않은 농민들 중 60퍼센트는 농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농토에서 나오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농토나 농기구 등 자본투자 비용이 너무 높아서 대부분의 농민들이 전적으로 농사만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수치가 말해주듯이 미국의 가족농―건국 역사의 뿌리였으며, 자영농의 신화 속에서 찬양받았던 농업 형태―은 강력한 경제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도시나 교외에 사는 미국인들은 지금도 산뜻한 울타리에 잘 가꾼 텃밭이 있는 전통적인 전원생활을 동경하지만 그들이 가족농을 보존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할 것인지는―비싼 농산물을 사 먹는다든지 정부의 농업보조금을 허용한다든지 하는 것―불확실하다.


top


CHAPTER 9  미국의 노동력과 근로자의 역할


농업사회에서 현대의 산업국가로 넘어오는 동안 미국의 노동력에는 굉장한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농업국가였다. 초기 미국 경제에서 비숙련 노동자들은 숙련된 노동자나 장인, 기술자가 받는 임금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도시 노동자의 40퍼센트는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나 봉제공장의 재봉사였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공장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아이들이나 여자들 그리고 가난한 이민자들이 주로 공장 노동자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는 빠른 속도로 산업이 발달했다. 농장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소읍에 있는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겼고, 공장들은 대량생산과 수직적인 직급 체계, 비숙련공의 낮은 임금에 의존해 굴러갔다. 이런 환경에서 하나둘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노동조합은 결국 근로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민주당에 동조하여 미국의 정치를 바꾸었다. 노조는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부터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때까지 실시되었던 여러가지 사회 규제에 대한 대표적인 지지세력이었다.

노동조합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중요한 정치적럭姸╂?압력단체이지만, 그 영향력은 눈에 띄게 미약해지고 있다.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지고 서비스 부문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근로자들이 블루칼라의 공장 일자리보다는 화이트칼라의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산업’이 필요로 하는 숙련된 기술자는 컴퓨터와 기타 첨단기술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할 줄 안다. 주문제작과 시장의 요구에 발빠르게 대응하여 물건을 만들어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고용주는 직급 체계를 없애고 자기주도적이고 전공을 넘나드는 직원들로 구성된 팀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철강과 중공업 같은 산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동조합은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몇 년 동안은 노조가 번성했지만 그후에는 전통적인 제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수가 줄어듦에 따라 노조 조합원들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낮은 임금으로 무장한 외국 경쟁업체들에게 도전을 받는 고용주들은 더욱 유연한 고용관계를 원하게 되었다. 임시직이나 시간제 직원을 점점 더 많이 고용하였고, 종업원과 장기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임금 체계나 복리후생에 대해서도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고용주들은 조직적으로 선동과 파업을 하는 노조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웠다. 한때는 노조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려 하지 않던 정치가들도 앞장서서 노조의 기반을 뒤흔드는 규제를 법으로 통과시켰다. 한편 요즘의 젊고 능숙한 근로자들은 노조를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아나키즘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정부나 공립학교처럼 불가피하게 독점적인 기능을 하는 부문에서만 노조가 존재할 뿐이다.

비록 노조의 세력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성공한 산업의 숙련 기술자들은 최근과 같은 작업환경에서도 과거 노동조합 운동의 혜택을 입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산업현장의 미숙련 노동자들은 종종 어려움에 부딪힌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와 숙련 노동력과 미숙련 노동력 사이에는 임금 격차가 점점 더 많이 벌어졌다. 그래서 1990년대 말, 미국의 노동자들은 강력한 성장과 낮은 실업률을 바탕으로 태어난 지난 10년의 번영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다.



노동의 기준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경제적 성공이 부분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용주들도 시장의 환경이 변화했을 때 종업원을 쉽게 고용하거나 해고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노동자들은 전통적으로 환경의 변화에 스스로 적응해왔다.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직업을 바꾼다. 또한 고용주들도 장기적으로 승진의 기회를 제공하면 종업원들의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종업원들 역시 경제적 목표 가운데 직업안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노동의 역사는 두 가지 가치, 즉 노동의 유연성과 장기적인 충성 사이의 긴장과 연관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많은 분석가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듯이 고용주들은 유연성을 더욱 강조한다. 그렇게 되면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유대감은 점점 더 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주와 연방법은 여전히 노동자의 권리를 폭넓게 보호해주고 있다. 연방노동법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쪾1938년의 공정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은 근로자의 최저 임금과 최장 작업시간에 대해 규정해놓았다. 초과수당과 어린이 고용 금지법에 대해서도 명시해놓았다. 1963년에 개정된 법에서는 여성에 대한 임금차별을 금지했다. 의회는 정기적으로 최저 임금을 조정하는 데 종종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근로자들의 요구가 거세어져 비숙련 노동자들까지 최저 임금보다 많이 받고 있는데도 1999년에는 최저 임금을 시간당 5.15달러로 정했다. 어떤 주에서는 그보다 조금 더 높기도 하다.


쪾1964년의 민권법(Civil Rights Act)은 인종과 성, 종교와 출신 국적에 따라 채용이나 고용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않도록 규정했다(또한 선거나 주택 구입에 있어서도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쪾1967년에 제정된 고용에 관한 연령차별 금지법(Age and Discri-mination in Employment Act)은 나이 든 근로자가 직장에서 차별 받는 것을 금지시켰다.


쪾1971년의 직업안전보건법(Occupational Health and Safety Act)은 고용주가 안전한 근로환경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 법에 따라 직업안전보건청은 작업안전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준을 잘 지키고 있는지 감시한다. 기준을 지키지 않는 작업장에 대해서는 소환장을 발부하고 벌금을 부과한다.


쪾근로자은퇴연금보장법(Employee Retirement Income Security Act)은 기업 또는 기타 비영리 조직이 연금 플랜을 세우도록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 법은 1974년에 제정되었다.

쪾가족 구성원을 돌보기 위한 휴가와 병가에 대한 법령(Family and Medical Leave Act)은 1993년에 제정되었으며, 근로자가 출산과 입양 또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무보수로 병가나 휴가를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쪾1990년에 통과된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은 장애인에 대한 직업 권리를 보장한다.



연금과 실업보험


미국에서는 종업원이 은퇴연금을 적립하는 경우 고용주의 역할이 중요하다. 민간기업은 고용인의 절반 정도가, 그리고 공무원은 거의 대부분이 어떤 종류가 되었든 연금 혜택을 받는다. 고용주들은 연금 플랜을 지원하도록 강요받지는 않지만 정부는 고용주가 고용인을 위해 연금에 가입하고 일부를 부담할 경우엔 세제 혜택을 많이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연방정부의 세금징수 기관인 국세청(Internal Revenue Service)은 연금 플랜에 관한 규정을 세워놓았으며, 노동성(Labor Department)은 연금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또다른 연방기구인 연금수혜보장공사(Benefit Guaranty Corporation)는 전통적인 개인연금 가입자의 연금 수령을 보장한다. 1980년에서 1990년 사이에 제정된 일련의 법들은 이런 보험에 대한 보험료 납입금을 인상하고, 연금 플랜을 재정적으로 건전하게 유지할 책임이 있는 고용주의 자격 요건을 강화했다.

고용주가 지원하는 연금의 성격은 20세기 후반의 30년 동안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많은 고용주(특히 소기업의 고용주)들이 종업원의 근속 연수와 급여에 기초를 두고 매달 퇴직자에게 지급해주는 전통적인 ‘확정급여식(defined benefit)’ 플랜을 중단했다. 그 대신 ‘확정분담식(defined contribution)’ 연금 플랜에 가입하는 고용주가 훨씬 더 많아졌다. 확정분담식 플랜은 고용주가 어느 정도의 돈을 적립해야 하지만 일정 금액의 수령액을 보장할 책임은 없다. 그 대신 고용인이 자신의 적립액을 결정하고(고용주들 역시 강요받지는 않아도 갹출을 한다), 종업원들은 몇 년마다 직장을 바꾸더라도 계속해서 연금을 유지할 수 있다. 고용인이 퇴직 후에 받을 수 있는 돈의 액수는 그가 매달 얼마나 불입했는가, 그리고 얼마나 성실하게 불입했느냐에 달려 있다.

확정급여식 연급 수령자는 1965년에는 17만 명에서 1997년에는 5만 3,000명으로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에 확정분담식 연금가입자는 46만 1,000명에서 64만 7,000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직장에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유대관계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연방정부는 군인과 공무원, 상이군경을 포함해 정부에 소속된 고용인들을 위해 여러 종류의 연금 플랜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연금제도는 사회보장보험으로 65세 이상의 퇴직자에게는 전액이 지급되며, 62~65세 퇴직자들에게는 수령액이 약간 줄어든다. 이 보험은 연방 기관인 사회보장국에서 운영하지만 기금은 고용주와 고용인이 소득세에서 납부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사회보장보험이 퇴직자들에겐 유용한 ‘안전망’ 역할을 해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상 은퇴하여 연금을 받으면 필요한 수입의 일부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전후 베이비 붐 세대는 21세기 초반에 은퇴를 하게 되는데, 정치가들은 1990년대부터 수령액을 줄이든지 납부액을 늘리든지 하지 않고서는 정부가 사회보장규정에 나와 있는 대로 연금을 지급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국민들 역시 세기가 바뀌면 사회보장보험의 재정 건전성이 가장 중요한 국내 문제로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체로 자영업자들이나 고용주가 연금을 내줄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연금 플랜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인퇴직계좌(IRAs:Individual Retirement Accounts)나 키오그 플랜(Keogh plan)이라는 세제 혜택을 받는 계좌에 자신의 수입 일부를 저축한다.

한편 실업보험은 사회보장보험과 마찬가지로 1935년 사회보장법에 의해 생겨났는데, 사회보장보험과는 달리 연방정부와 주에서 운영하며, 실업자에게 기본적인 생계비를 지급한다. 임금근로자가 일시 해고를 당했거나 비자발적으로 실업을 한 경우(부정 행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실업을 한 경우)에도 특정 기간 동안 월급여의 일부를 받는다.

각 주마다 나름대로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연방정부가 정한 특정 기준을 따르지는 않는다. 실업수당의 주당 금액과 기간은 실업자가 직장에 다닐 때의 임금과 근무 기간에 따라 달라진다. 고용주는 자기 회사 종업원들의 실업과 보험금 지급액을 근거로 해서 세금을 납부한다. 연방정부도 고용인들의 실업보험 세금을 납부한다. 주정부는 호황기에 적립해두었던 잉여 기금으로 경제침체기도 잘 넘길 수 있기를 바라지만 기금이 바닥나면 연방정부에서 빌려오거나 세율을 인상할 수 있다. 주정부는 실업이 발생했을 때 미리 정해놓은 ‘발동(trigger)’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수령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연방정부 또한 침체기에 실업률이 올라가면 수령액 지급 기간을 연장하고, 일반적인 연방 수입 한도 이상으로 지급하거나 고용주에게 특별세를 부과한다. 실업수당 기간을 연장하게 되면 연방 지출이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세금 인상으로 이어지므로 종종 이를 놓고 정치적인 논쟁이 벌어진다.



초기 노동운동


1930년대가 시작되고 20~30년 동안 근로자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많은 법안과 프로그램이 마련되었고, 때를 맞춰 미국의 노동운동은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노동자의 지위가 처음부터 이렇게 높았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미국 경제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기까지에는 1세기 반이 넘는 투쟁운동이 있었다.

다른 나라의 노동단체와 달리 미국의 노조는 기존의 자유기업 시스템 안에서 운동을 펼쳐왔고, 그런 전략은 사회주의자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미국에는 봉건제도의 역사가 없었던데다 노조원들 자신이 계급투쟁을 한다고 생각했던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만큼 향상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찾고자 했을 뿐이다. 계급 간의 반목이 적었던 또다른 이유는 미국의 노동자들(적어도 백인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보다 더 빨리 투표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초기 노동운동이 비교적 산업 전반에 걸쳐 대규모로 일어났던 것과 달리, 이후에 노조 설립자들이 모집할 수 있는 신입 조합원들의 폭은 한정되어 있었다. 전국 단위로 결성된 최초의 노동조합은 1869년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 피복공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공헌했다. 그후 1886년 노동기사단은 흑인, 여성, 임금근로자, 상인, 농민 단체를 포함한 70만 명의 조직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단체 간의 이해가 서로 어긋나는 바람에 노조원들은 별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노동기사단은 1880년대 중반 미국의 백만장자 제이 굴드가 소유했던 철도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벌여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켰지만 1886년 2차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그후로 노조원들의 결속력이 급격히 와해되었다.

1881년 네덜란드 출신의 이민자이자 담배공장 공원이었던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는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과 노조연맹을 만들었는데, 5년 뒤 미국노동총연맹(AFL : American Federation of Labor)으로 발전했다. 미국노동총연맹의 구성원들은 주로 임금근로자들이었으며 직종별로 조직화되었다. 곰퍼스는 초대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임금 인상과 근로환경 개선 등 실용주의 노선을 따랐고 전국적인 노동운동을 이끌어낼 만큼 실질적인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노동총연맹 설립자들은 곧 고용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경영자측은 종업원 개개인과 임금 등의 문제를 협상하려 했고, 노조에 동조하는 종업원은 다른 회사에서도 채용되지 못하도록 합의한 상태에서 해고하거나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어떤 때는 종업원이 노조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황견계약서(yellow-dog contract)에 서명하도록 회유했다. 1880년과 1932년 사이에 정부와 법원은 일반적으로 경영자측에 동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공공질서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연방군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하기도 했다. 이때는 경영자측이 고용한 구사대와 노조원들이 격렬히 충돌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1905년, 정부는 근로자의 근로시간을 제한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노동운동도 후퇴일로를 걷기 시작했다(법원의 설명에 따르면 근로시간 규제가 고용계약을 맺을 때 근로자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근로자가 노조에 가입하도록 강요받지 않을 권리인 ‘오픈 숍(open shop)’의 원칙도 커다란 갈등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노동총연맹의 노조원 숫자는 50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1920년대는 노조설립자들에겐 별로 생산적인 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경기가 좋았고 직업이 넘쳐났으며 임금도 인상되었다. 근로자들은 노조 없이도 신분상의 안전을 느꼈고 노조에 가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관대한 인사정책을 펴는 경영자측의 요구에 쉽게 굴복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1929년에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호시절도 끝났다.



대공황과 전후의 승리


1930년대의 대공황은 미국인들의 노조관을 변화시켰다. 대량해고의 위기 속에 미국노동총연맹의 노조원 숫자는 30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전국적인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대공황의 늪이 깊어졌을 때 미국 노동자의 3분의 1이 실업 상태였다. 10년 전만 해도 완전고용 상태였다. 1932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정부, 심지어 법원조차도 노동자에게 더욱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1932년에 의회는 최초의 유사 노동법인 노리스-라가디아 법(Norris-La Guardia Act)을 제정하여 황견계약을 강제로 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파업 등의 노동운동을 중지시킬 수 있는 연방법원의 권한도 제한했다.

루스벨트는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요한 법안을 여러 건 상정했다. 그중에 하나가 1935년의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 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으로, 노동자들에게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와 노조 대표를 통해 집단적으로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법은 전국노사관계위원회를 설립하여 불공정한 노동 관행을 처벌하고 고용인들이 노조를 결성하고자 할 때 선거위원회를 구성하여 표결로 결정하도록 했다. 전국노동관계법은 고용주가 노조활동에 관여한 고용인을 부당하게 다루었을 경우에도 응분의 처벌을 받게 했다.

이런 후원 덕분에 노조의 조합원 수는 1940년까지 900만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더 큰 노조연맹으로 성장하려면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35년 전국노동총연맹 산하 9개의 노조가 자동차나 철강 같은 대량생산 제조업체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산업노조위원회(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숙련공, 미숙련공 가릴 것 없이 모든 근로자들을 한꺼번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전국노동총연맹을 지배했던 직종별 노조들은 미숙련공이나 반숙련공을 노조에 가입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하고 산업 전반을 통틀어 직종별 노조들을 조직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산업노조위원회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덕분에 많은 공장에 노조가 설립되었다. 1938년 전국노동총연맹(AFL)은 산업노조위원회에 가담했던 노조를 탈퇴시켰다. 산업노조위원회는 즉각 산업별 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연맹을 결성하여 전국노동총연맹과 완전한 경쟁체제로 돌입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주요 노조지도자들은 전쟁중에는 파업으로 국가의 방위산업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임금결정권을 쥐고 있었던 정부가 임금인상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결국 노조는 특별 급여, 즉 건강보험이라는 선물을 받음으로써 의미심장한 쾌거를 이루었다. 노조의 조합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파업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한 시한도 끝나고 임금인상에 대해 억눌렸던 욕구가 분출했다. 많은 산업현장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1946년에는 파업하는 작업장의 수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와그너 법 때문에 노조에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다는 시각이 팽배해졌다. 1947년 의회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프트 하틀리 법(Taft-Hartley Act)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노동조정관계법(Labor Management Relations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노조뿐만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행동의 규약처럼 받아들여졌다. 이 법은 근로자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노조에 가입하도록 요구하는 ‘클로즈드 숍(closed shop)’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파업으로 손해를 본 고용주가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 노조에게는 파업을 하기 전에 60일 간의 ‘냉각기’를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 법은 국가의 안보나 안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파업은 정부가 진압할 수 있다는 특별 규정도 마련해놓았다. 노조는 재정 상태를 공개할 의무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노조를 반대하는 분위기에 놓인 전국노동총연맹과 산업별 노조위원회는 시위를 중단하고, 1955년 마침내 통합하였다. 그리고 전국노동총연맹 회장이었던 조지 미니(George Meany)가 새 조직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1962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연방정부 소속의 고용인들이 노조를 구성하고 단체교섭권을 갖도록(파업은 제외) 행정명령을 발동하였다. 주정부 역시 동일한 법령을 통과시켰고, 어떤 주에서는 파업까지도 허용하였다. 연방정부와 주정부,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공공노조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임금의 가치가 떨어지자 여러 주와 도시에서 경찰과 교사, 기타 다른 정부기관의 고용인들이 파업을 벌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흑인과 멕시코계 미국인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서 노조가 활발히 결성되었다. 노조지도자들은 저임금의 직업을 갖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도와 높은 임금을 받도록 해주었다. 예컨대 멕시코계 미국인 노조지도자인 세자르 E. 차베스(Cesar E. Chavez)는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많이 일하는 캘리포니아의 농장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현재의 미국농업노동자연합(United Farm Workers of America)을 만들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가족주의 종말


1940년대와 1950년대 그리고 1960년대에는 가끔 충돌과 파업이 일어나긴 했지만 기업과 노조는 대체로 안정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근로자들은 고용주에 대해 생각하기를, 필요한 기간만큼만 일자리를 제공하고 평범한 생활을 유지할 정도로만 급여를 주며 불편하지 않을 만큼 의료 혜택과 퇴직연금을 보장해주는 사람쯤으로 여겼다.

이러한 안정적인 관계는 안정된 경제 덕분이었다. 기술이나 생산 제품이 별로 변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고용주와 근로자가 쉽게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조와 고용인들의 관계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 산업경제에서 미국의 지배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들은 제품의 질을 더 우수하게 향상시키지 못한 채 더 싸고, 때로는 더 우수한 수입품의 물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상명하달식의 경영구조는 혁신을 어렵게 했으며, 생산성을 높이거나 임금을 외국 근로자 수준으로 삭감하여 노동비용을 줄이려고 해도 훼방만 놓았다.

어떤 미국 기업들은 공장 문을 닫아버리거나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식으로 대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무역과 세법이 바뀌면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훨씬 더 쉬워졌다. 다른 것들은 계속해서 굴러갔지만 가족주의적인 제도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용주들은 더이상 직원들의 평생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유연성을 높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임시직이나 시간제 직원을 더 많이 채용하기 시작했다. 1982년, 비농업 분야에서 41만 7,000명 혹은 정규 인력의 0.5퍼센트가 임시직 파견업체 또는 계약직 근로자였다면 1988년에는 280만 명 또는 비농업 분야의 고용인 중 2.1퍼센트에 달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근로자들 중에도 주당 근무시간을 줄이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기업도 급여와 복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 근무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1968년에는 고용인의 14퍼센트가 주당 35시간 미만을 근무했는데 1994년에는 그 수치가 18.9퍼센트로 증가했다.

이미 지적했듯이 많은 고용주들이 고용인에게 더 많은 책임을 넘기려고 연금 납부 방식을 바꾸었다. 어떤 근로자는 이런 변화를 환영했으며 노동유연성이 높아진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 많은 근로자들이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꼈다. 노조는 옛날처럼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의 가족주의적인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별로 할일이 없었다. 노조원들이 그런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일밖에는 없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노조는 몇몇 작업장에서만 새로 노조를 결성했을 뿐 결속력은 점점 약해지기만 했다. 노조 설립자들은 노조법이 고용주들로 하여금 노조의 단결권을 방해할 수 있는 여지를 줌으로써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약해지기만 하는 노조의 결속력과 정치적 영향력에 위기를 느낀 민간 및 공공 부문의 서비스 노조(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 대표인 존 스위니(John Sweeney)는 1995년 AFL-CIO의 대표인 레인 커크랜드(Lane Kirkland)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그를 이겼다. 커크랜드는 해외의 노조활동에만 치중하고 국내 노조가 직면한 문제에는 소극적으로 대항한다고 널리 비판을 받고 있었다. 40년 넘게 연방정부 노조의 3대 회장을 역임하고 있던 스위니는 조직을 강화하고, 지역별 노조끼리 서로 노조 가입 운동을 도와 지지부진한 노동운동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새로운 노동력


1950년에서 1999년 말 사이에 미국의 비농업 분야 종사자는 4,500만 명에서 1억 2,95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렇게 증가한 부분은 대개 지속적으로 성장한 정보기술 산업의 주역들인 컴퓨터와 건강, 그리고 기타 서비스 분야의 종사자들이 차지했다. 서비스 분야의 직업(서비스, 교통, 설비, 도소매업, 재정, 보험, 부동산, 정부)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총 3,500만 개로 늘어났는데 20년 동안 증가한 일자리는 모두 서비스직이었다. 서비스 분야의 고용 증가는 제조업체의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필요없게 된 노동력을 흡수하였다.

서비스 관련 산업의 일자리는 1946년 당시 2,440만 개로 비농업 분야 일자리의 59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랬던 것이 1999년 말에는 1억 430만 개로 증가하여 비농업 분야 일자리의 8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상품을 만들어내는 분야(제조업체나 건설, 광산을 포함)의 일자리는 1946년에 1,720만 개로 비농업 분야 일자리의 41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런데 1999년 말에는 단지 2,520만 개만 증가하여 비농업 분야 고용의 19퍼센트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 생긴 서비스 직종의 대부분은 저임금이었고, 제조업체처럼 혜택이 많이 주어지지도 못했다. 그 결과 경제적인 압박이 심해지면서 많은 주부들이 맞벌이를 하기 위해 일터로 나갔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고용주들은 회사의 인력을 조직화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어떤 회사에서는 고용인들을 작은 팀으로 나누어 그들에게 할당된 업무를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도록 주도권을 주었다. 관리자는 팀원들에게 목표를 세워주고 그에 따른 업무 진행과 결과만 감독하고, 팀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업무 방식을 정하고 소비자의 수요와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 전략을 세우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고용주는 전통적인 상명하달식 업무체계에 연연해하다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노조가 없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작업팀은 경영진의 지배를 받는 불법적인 ‘노동조합’에 해당한다는 노사관계위원회의 결정도 기업이 변화해나가는 데 지장을 주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고용주는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인력관리를 해야 했다. 새로운 인종 집단(특히 히스패닉과 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밀물처럼 노동력으로 편입되었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남성들의 직업세계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인종, 성, 나이,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근로자를 차별한 고용주에 대해 소송을 하는 일도 늘어났다.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진술서를 제출하게 되는 기관인 평등고용보장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에는 1991년의 6,900건에서 1998년에는 16,000건 이상으로 소송 건수가 급격히 증가했고, 소송 사건 심리로 법정은 늘 만원이었다. 법적 소송을 하면 법정에서 과거의 복잡한 전력을 진술해야 했다. 그중에 많은 사례들이 사소하다는 이유로 기각당하기 일쑤였지만 법정은 해고, 승진, 좌천, 부당해고에 대해 법적 보호조치를 취해주었다. 예를 들어 1998년 미국 대법원 판결을 보면 고용인에게는 관리자가 부하직원에게 성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교육시키고, 다른 직원들에게도 성희롱을 고발할 권리에 대해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다.

‘동일한 업무에 대해 동일한 급여를 지급하는’ 문제도 미국의 사업장에서 끊이지 않는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법에는 엄연히 성에 따른 차별 급여를 금지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미국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급여를 적게 받았다. 이런 차별은 비교적 여직원이 많은 직종(대개 서비스 직종)이 다른 직종보다 급여가 적다는 데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그러나 노조와 여성단체는 이것을 노골적인 성차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무직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주로 차지했던 중역이나 전문 직급으로 승진하는 데 있어 이른바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고위직에 오르는 여성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인구 대비 비율로 보았을 때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전체 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보통 ‘마이너리티’라고 불리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 집단에서도 급여와 직급에 대한 차별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20세기 말 현재, 미국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은 유럽인 조상을 두고 있는 코카서스인이다. 비록 인구 대비 비율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말이다). 연방정부나 주정부들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 외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미 고용주가 직원을 채용할 때 소수민족에게 특혜를 주도록 하는 소수계 우대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소수민족이 차별을 받았던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그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칫 인종적렝구??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어떤 비평가들은 ‘역차별’은 불공정하고 비생산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어떤 주, 특히 캘리포니아주는 1990년대에 소수계 우대 정책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백인들과 소수계 사이의 급여와 실업률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직장 내에서 여성의 지위에 관한 문제와 함께 이 문제는 미국의 고용주와 직원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많은 기업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서로 다른 성과 인종, 인종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 간의 급여 차이를 벌려놓음으로써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에 웬만한 임금인상은 수혜를 입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종업원들이나 노조는 고용안정성을 높이거나 정리해고 자체를 없앤다면 임금을 인상하지 않거나, 심지어 임금을 삭감당하더라도 회사측에 임금 문제를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신입 직원이 경력이 많은 직원들보다 월급을 적게 받고 직급 간에 임금 격차를 두는 일은 일부 항공사와 몇몇 기업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월급은 더이상 직급별로 똑같이 주는 대가가 아니라 컴퓨터 소프트웨어 전문가처럼 꼭 필요한 직원을 유혹하고 잡아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바람에 첨단기술자와 기술이 없는 일반 사무직 간의 임금 격차는 한층 더 벌어졌다. 실제로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는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미국 노동성의 통계를 살펴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통계를 보면 1979년 당시 고등학교 졸업 이하 근로자의 일주일 평균 임금은 215달러였던 반면 대학원 졸업자는 348달러였다. 그런데 1998년에는 이 수치가 337달러 대 821달러로 변했다.

이렇게 임금 격차가 벌어졌지만 많은 고용주들은 연방정부가 최저 임금을 인상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은 최저 임금이 올라가면 노동 비용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소기업에서는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구직자에게도 손해라고 주장한다. 최저 임금은 1970년대에는 해마다 증가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최저 임금은 생계비의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99년 말까지 최저 임금은 255퍼센트가 올랐다(시간당 1.45달러에서 5.15달러로). 그런데 소비자물가는 334퍼센트나 올랐다. 고용주들은 또한 특별한 개인이나 팀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얼마나 많은 성과를 올렸느냐를 기준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성과급’ 보상체계로 눈을 돌렸다. 1999년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고용주의 51퍼센트가 성과급 보상체계를 선호하며, 보통 직원들 가운데 몇 명에게만 최소의 기본임금 인상분 이상으로 올려주었다.

숙련된 노동력의 부족 사태가 계속 이어지자 고용주는 고용인을 훈련시키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다. 또한 학교측에 졸업생들이 첨단기술 산업현장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개선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지역별 고용주 단체는 산학협동으로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한편 연방정부는 1998년 업무환경투자법(Workplace Investment Act)을 제정하여 연방정부와 주정부 그리고 기업을 한데 연결하는 100개 이상의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통합하였다.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실제 고용주의 요구에 맞춰 개발하고, 고용주로부터 프로그램 운영방법에 대해 조언을 받기 위해서였다.

한편 고용주들은 직장과 개인 생활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줄이고 싶어하는 직원들을 위해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가변시간 근무제(Flex-time)’로, 고용인들이 근무시간을 재량껏 조정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자신의 개인용 컴퓨터와 직장을 연결시켜 집에서 근무하는 ‘재택근무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하는 엄마들이나 직장에서 풀 타임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고용주들은 일의 분업화 못지않게 혁신적인 방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1993년 정부는 이런 추세에 부응하여 가족 구성원을 돌보기 위한 휴가와 병가에 대한 법령(Family and Medical Leave Act)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고용주는 고용인이 집안의 급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근무지를 이탈하더라도 근무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쇠퇴하는 노조의 영향력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환경 변화는 노동조합의 위상을 떨어뜨렸으며,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계에서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1945년에는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이 전체 고용인의 3분의 1이 넘었지만 1979년에는 미국 전체 노동력의 24.1퍼센트로 떨어졌고, 1998년에는 13.9퍼센트로 축소되었다. 노조가 정치운동에 꾸준히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존경을 받았고, 노조원들의 부지런한 투표참여율 덕분에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은 조합원이 줄어드는 것만큼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과 전국노사관계이사회의 지배로 노조에 가입하는 직원들이 줄어들면서 어떤 정치적 후보를 지원하거나 반대하곤 했던 영향력은 자연히 사라져버렸다.

국내외 안팎으로 경쟁의 압박을 느끼고 있는 오늘날의 경영자들은 지난 수십 년보다 더욱 높은 임금과 충분한 복지혜택을 요구하는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또한 노조가 종업원들을 조직화하여 투쟁에 나서는 데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그 결과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파업이 그다지 잦지 않았다. 이는 고용주들이 노조가 파업을 할 때 파업파괴자(Strikebreaker)들을 고용하고, 파업이 끝나도 그들을 계속해서 고용했기 때문이다(1981년에 미국항공청 소속 항공관제사들이 불법으로 파업을 벌였을 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들을 해고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더욱더 대담하게 그런 행동을 했다).

사무자동화는 노조원들에겐 계속되는 도전이었다. 노후한 공장들이 예전엔 노동자들의 손으로 처리하던 일을 자동화된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필요한 인력을 줄였다. 노조들은 일자리와 수입을 지키기 위해 무보수 근무나 직원들 간의 일 나누기를 통해 근무 일수를 줄이고, 연봉제 같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으며 결국엔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다.

산업구조가 서비스 산업으로 바뀌는 것 또한 전통적인 노조를 약화시키는 심각한 문제였다. 새로 생겨난 직종들은 노조를 결성하기 어려운 여성들, 어린이들, 임시직과 시간제 근무자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또한 미국의 산업이 전통적으로 노조활동이 약한 남부나 서부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가 이같은 시련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듯, 팀스터스 조합(Teamsters Union)을 비롯한 몇몇 노조의 부패상은 노조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에 따라 과거에 노조가 임금인상과 복지혜택 그리고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성공을 거두었던 일들은 더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젊은 근로자들은 그런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굳이 노조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노조는 자신들이 작업환경의 안전과 직무에 대한 불만 등 직장생활 전반에 걸쳐 근로자들의 권익을 옹호해왔다고 주장했지만 지금은 종종 무시를 당한다. 첨단기술에 힘입은 컴퓨터산업이 극적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립심과 개성이 강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독립심을 죽여버리는 조직에 들어가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1990년대 후반에 노조가 신입 노조원 모집에 어려움을 겪은 가장 큰 이유는 놀라운 경제성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9년 10월과 11월의 실업률은 4.1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경제학자들은 그 수치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거나 만성적인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렇게 예측하지 못했던 경제변화 덕분에 풍부한 일자리가 생겼고, 이는 미국이 여전히 기회의 땅임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주었다.


top


CHAPTER 10  해외무역과 글로벌 경제정책


미국의 해외무역과 글로벌 경제정책은 건국 후 2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아주 극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건국 초기에는 정부와 기업이 해외수출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내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서서히 무역장벽을 없앴으며 세계경제 시스템과 조화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미국이 무역자유화에 전념해온 데에는 경제적려ㅔ÷岵?이유가 있다. 개방무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간 평화관계를 구축하는 열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수출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다. 원래부터 경제적으로 강점이 있었거니와 미국의 산업기계는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테크놀로지와 제조업 기술에서 다른 어떤 국가보다 월등히 앞섰던 덕분이다. 그러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다른 나라와 수출경쟁력 면에서 별 차이가 없어졌다. 더구나 유류 파동과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1970년대 내내 달러의 외환가치가 높아졌으며 무역수지도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고, 미국인들은 자국 상품보다도 외국 상품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유럽인이나 일본인보다 저축에 비해 소비가 많은 경향을 반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기간에 미국 경제가 유럽이나 경제난을 겪고 있던 일본보다도 더 빠르게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의회에서는 무역자유화를 위한 정책적인 지원을 축소했다. 입법자들은 이 기간에 광범위한 보호무역 조치를 제안했는데, 그중 대부분이 미국의 산업이 다른 나라와 효율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의회는 또한 대통령이 다른 나라와의 새로운 자유무역협상을 공짜로 들어주지 못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냉전이 끝나자 미국인들은 인권과 테러, 마약, 수송 그리고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따위의 반인류적 행위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국가에 대해 무역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유무역 의지가 후퇴하는 동안에도 1990년대 미국은 계속해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비준하고, 이른바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를 매듭지었으며 지적 재산권과 금융, 기본적인 통신서비스 교류를 위한 국가간 수칙을 정하기 위해 다국간 협상에 참여하는 등 국가간 협상을 통해 자유무역주의를 발전시켜왔다.

1990년이 끝나는 시점에서도 미국 무역정책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공식적으로는 다국간 무역협상의 새로운 회담을 추진하듯이 자유무역에 헌신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유럽, 라틴아메리카, 아시아가 참여하는 지역별 무역자유화를 추진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쌍무적인 무역마찰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 대한 정치적 후원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미국이 글로벌 경제를 후퇴시키려 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의 금융위기, 특히 1990년대 말 아시아에 불어닥친 금융위기는 세계적인 금융시장과의 상호연관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보여주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도 이런 위기를 감지하고 예방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로 하면서 앞으로는 국가간 조율과 협력을 높여야 한다는 혁신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보호주의에서 무역자유화로


미국이 언제나 자유무역에 대해 열성적인 옹호자였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따금 엄격한 경제보호주의 정책을 펴기도 했다(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부과한다든지 외국 물건의 수입을 제한하는 쿼터제를 실시한다는지 해서 말이다). 예컨대 공화국 초기에 알렉산더 해밀턴 의원은 미국의 산업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보호관세를 옹호했다. 그후 미국의 보호주의는 1930년대 관세를 갑자기 올려버린 스무트 홀리 법(Smoot-Hawley Act)의 제정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법은 즉각 외국의 반격을 불러일으켰고, 1930년대 내내 미국과 세계 여러 국가들 간에 얽혀 있던 경제적 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1934년 이후 미국의 무역정책 접근방식은 스무트 홀리 법으로 인해 불거져나온 문제점들을 바로잡는 식이었다. 그해에 의회는 무역협정법(Trade Agreements Act)을 제정했는데, 이는 미국의 관세를 줄여야 하는 기본 법안을 제공했다. “모든 국가는 다른 국가와 교역할 합리적인 기회를 얻지 못하면 자국민의 복지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없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콜델 헐(Cordell Hull)은 이렇게 설명했다. “무역협정법의 기본에 깔린 이 원칙은 평화의 대궁전을 짓고자 할 때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주춧돌이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미국 지도자들은 국내 상황을 안정시키고 미국의 동맹국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충성토록 하려면 그들의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동맹국들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도 있어야겠지만, 무엇보다 수출시장이 필요했다. 특히 미국은 거대한 시장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무역자유화를 지지하게 되었고, 1947년에는 23개국이 서명한 관세와 무역 원칙에 관한 국제적인 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체결함으로써 적절한 수단을 갖게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90개국이 넘는 국가가 이 협정에 조인했다.

GATT는 국가간 무역에 대한 행위 규정을 정하는 것 외에도 다국간 무역협상을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제 회담을 후원했으며, 미국은 그 회담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리더십을 발휘했다.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에서 회담이 개최되어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이름이 붙은 이 회담에서는 1990년대 이후로 무역을 자유화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의 무역 원칙과 관례


미국은 법 조항에 따른 개방무역제도를 신봉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통령들은 세계무역에 참여하는 것이 미국의 생산자들에게 더 넓은 외국 시장을 열어주고, 미국의 소비자들에게는 좀더 폭넓은 제품 선택권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외국 생산자와의 경쟁이 제품 가격을 낮춰주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자유무역이 다른 국가에도 혜택을 준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은 무역이 각 국가들에게 자신들이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전세계 국가의 생산성을 높여준다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다. 더욱이 미국인들은 무역이 경제 발전과 사회의 안정 그리고 각국의 민주주의를 촉진시켜 세계의 번영과 법에 의한 지배 그리고 국가간의 평화를 앞당긴다고 확신했다.

개방무역 체제는 국가간에 상대방 국가의 시장에 공정하고 비차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은 다른 국가들이 다국간 혹은 양국간의 협정에 의해 상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무역장벽을 줄인다면 그들 국가에도 기꺼이 자국의 시장을 개방한다. 전통적으로 관세를 줄이고 무역에 관한 비관세를 골자로 해서 무역자유화를 위해 노력해오는 동안 최근에는 다른 문제들까지 포함시키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미국인들은 모든 국가의 무역법과 관행이 투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모두가 규칙을 알고 동등한 조건에서 겨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들은 1990년대 무역에 있어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외국의 정부 각료들에게 뇌물을 주는 관행이 불법이라는 데 동의함으로써 투명성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다.

또한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산업 규제를 풀고, 남아 있는 규제들을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하고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을 없애며 국제 관례에 따를 것을 자주 촉구한다. 미국에서 규제 철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규제가 외국의 수출품이 자국 시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간접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재임 기간(1993~2001)에는 미국의 무역정책에 또하나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각국에게 최저 임금과 환경에 관한 기준을 준수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비교적 높고, 물건을 만들 때 환경 기준을 따르기 때문에 물건 가격이 올라가며, 그래서 규제가 덜한 외국과의 경쟁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그 나라의 고용주가 국제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직원들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할 경우 자유무역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1990년 초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이 NAFTA를 승인하는 대가로 캐나다와 멕시코가 환경법과 노동 기준을 강화한다는 합의문에도 서명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클린턴 임기 동안 미국은 또한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와 함께 개발도상국들이 안전한 작업환경과 근로자의 기본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수많은 미개발국의 어린이 노동을 줄이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가 무역협정과 환경보호 그리고 노동 기준을 연계시키려고 한 노력은 다른 국가는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대체로 비차별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특정한 특혜 무역협정에 서명하기도 했다. 가령 미국 일반특혜관세(GSP:Generalized System of Preferences)는 미국에 특정한 상품을 수출하는 나라들에 대해 면세정책을 취함으로써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 개발을 돕고 있다. 다만 상품 생산자가 더이상 지원을 받지 않고도 미국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되면 그 특례법은 끝이 난다. 또다른 특례 제도는 무역특혜조치(CBI:Caribbean Basin Initiative)로, 미국에 정치적으로 중요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를 돕기 위한 조치이다. 이로써 미국은 카리브해 지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모든 제품(직물과 몇몇 가죽 제품, 설탕, 석유 제품은 제외)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미국은 때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유무역을 장려하는 일반적인 정책말고도 인권을 유린하거나 테러를 지원하거나 마약 수송에 관계하거나 혹은 국제평화에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되는 국가로부터 수입을 제한하는 정책도 사용한다. 대표적인 국가로는 미얀마, 쿠바, 이라크, 이란, 리비아, 북한, 수단, 시리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2000년에 미국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맺으려면 매년 의회의 표결을 통과해야 한다는, 1974년에 제정된 법을 철폐했다. 이렇게 해서 과거 중국과의 관계에 갈등을 일으켰던 주요인을 제거함으로써 미국은 중국을 국제무역기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첫 조치를 취했다.

미국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역제재를 이용하는 일은 사실 새로울 게 없다. 미국인들은 200년 전 미국혁명 시절 이후로 제재와 수출 통제라는 방법을 이용해왔다. 다만 냉전체제가 끝난 후로 그런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회와 연방정부 내에서는 무역정책이 외교정책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라는 사실에 대해 논란이 많이 일고 있다.



다자주의, 지역주의, 쌍무주의


국제무역에서 미국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또다른 신념으로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를 들 수 있다. 이것이 오랜 세월 미국이 국제적인 무역협상 회담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고 리더십을 발휘해온 근간이었다. 무역에 관한 협상인 일명 ‘케네디라운드’로 권위를 인정받은 1962년 미국무역확대법(U.S. Trade Expansion Act)은 국가간 무역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53개국이 평균 35퍼센트의 관세를 삭감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1979년 도쿄라운드의 성공으로 미국과 100여 개의 국가는 추가적인 관세 삭감은 물론이고 수입할당제(쿼터제)와 까다로운 수입허가 절차 같은 비관세 장벽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1986년 9월에 시작되어 거의 10년 만에 산업 관세를 줄이고, 나아가 비관세 장벽을 없애며, 농업 관세와 보조금 일부를 삭감하고, 지적 재산권에 대한 새로운 보호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루과이라운드에서 국제무역 분쟁을 해결할 새로운 구속 장치인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를 창설하게 된 점일 것이다. 1998년 말, 미국이 WTO에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해 42건의 불만 사항을 제기했고, 다른 국가들도 미국을 상대로 추가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미국은 다자주의에 헌신하면서도 최근에는 지역주의와 쌍무주의적인 무역협정을 추진했다. 이렇게 협상 통로를 좁힘으로써 더 광범위한 부문에서 더 쉽게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미국이 시작한 첫번째 자유무역협정은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자유무역지대 협상으로 1985년에 시행되었고, 두번째 미국과 캐나다 간의 자유무역협정은 1989년에 발효되었다. 특히 후자의 협상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가 참여한 1993년 북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발전하여 총 8조 5,000억 달러의 재화와 용역을 생산해내는 4억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지역적 근접성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간의 무역을 활발하게 육성해왔다. 북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멕시코가 미국 제품에 부과하는 평균 관세는 10퍼센트에서 1.68퍼센트로 낮아졌고, 미국이 멕시코 제품에 대해 부과하는 관세는 평균 4퍼센트에서 0.46퍼센트로 낮아졌다. 다만 미국은 협의문에 미국이 소유하고 있는 특허권과 상표권, 판권, 무역 비밀에 관한 권리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을 포함시켰다. 최근 들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영화에서부터 의약품, 화학약품에 이르기까지 미국 제품에 대한 도용과 위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국 무역 아젠다


몇몇 성공 사례가 있긴 했지만 세계무역 자유화를 위한 노력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미국의 생산자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서비스와 농업 부문의 무역장벽은 여전히 높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몇 가지 서비스 교류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긴 했지만 서비스 부문에 관련된 20여 가지 항목의 무역장벽은 차후 협상용으로 남아 있다. 한편 과학과 기술의 빠른 변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무역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농산물 수출업자들은 유럽이 유전자 조작 식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좌절에 빠졌고, 이러한 현상은 미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전자상거래의 등장도 무역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98년 세계무역기구 집행부는 각국이 컴퓨터 통신에 의한 송수신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전자상거래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지만 아직 여러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미국은 인터넷을 무관세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어하며, 통신시장에 대해서도 그렇게 요구한다. 또 세계가 디지털 생산품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보호할 것을 강조한다.

1999년 말 워싱턴의 시애틀에서 열린 회담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희망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곧 세계무역협상을 위한 새로운 회담을 제의했다. 미국은 여전히 그 절차를 더욱 투명하게 함으로써 세계무역기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국제 회담을 희망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또한 농산물에 영향을 미치는 무역장벽을 더욱 낮춰주기를 원한다. 현재 미국은 자국의 농토에서 3헥타르당 1헥타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다. 그 밖에도 미국은 서비스 분야의 무역자유화, 지적 재산권에 대한 보호 강화, 공산품에 대한 관세와 비관세 무역장벽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회담, 그리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노동 기준을 세우는 일을 무역자유화 회담 목적에 포함시키고 있다. 

미국은 다자간 무역협상을 위한 새로운 회담을 강력하게 희망하는 한편 새로운 지역적 무역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회담의 가장 큰 목적은 아메리카 대륙, 특히 쿠바를 제외한 서반구 전체를 자유무역지대로 만들기 위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일이었다. 1994년에 시작된 계약과도 같은 협정은 2005년까지 협상을 마무리짓는 것이 목표이다. 미국은 또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APEC) 포럼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APEC의 회원국들은 1990년대 말까지 정보기술 협력에 합의했다.

이와는 별개로 미국은 대서양경제협력(Transatlantic Economic Partnership)을 통해 미국과 유럽 간의 무역 문제를 의논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아프리카와의 교역도 증진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1997년에 시작된 아프리카를 위한 경제 성장과 기회를 위한 협력관계(Partnership for Economic Growth and Opportunity for Africa)라는 프로그램은 사하라 인근 국가로부터 미국 시장으로의 수입을 증가시키고, 미국이 아프리카의 사적인 부문 개발을 지원하고, 아프리카 지역의 경제통합을 후원하며, 매년 미국과 아프리카 간의 포럼을 통해 무역에 대한 정부 대 정부의 대화 채널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개별 국가와의 특별한 무역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일본과의 무역관계에서 진통을 겪어온 미국은 1990년대 말 일본이 계속해서 농산물과 자동차, 자동차 부품을 비롯해 다양한 미국 제품에 대한 무역장벽을 철폐하지 않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또한 일본이 낮은 가격으로 미국에 철강을 수출하는 것(이런 관행을 덤핑이라고 한다)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미국 정부는 계속해서 일본에게 경제의 각 부문, 즉 통신과 주택, 금융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 의약품을 비롯해 다양한 부문의 규제를 철폐하라고 압력을 넣어왔다.

또한 미국인들은 캐나다, 멕시코, 중국을 비롯해 다른 여러 국가와도 특별한 무역 문제를 안고 있다. 1990년대에 미국의 대對중국 무역적자는 대일본 적자를 초과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이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수출시장이지만 뚫고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1999년 11월, 두 나라는 미국측에서 중국과 더욱더 밀접한 무역관계를 맺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선결요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합의했다. 바로 중국을 정식으로 WTO에 가입시키기 위한 무역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13년에 걸친 협상 끝에 도달한 합의에 따라 중국은 일련의 시장개방 조치와 개혁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중국에서 자동차를 판매할 경우 가격 보조를 해주고, 미국의 중국 통신회사의 지분을 50퍼센트까지 소유할 수 있으며 보험증권을 판매하기로 약속했다. 중국 역시 농산물 관세를 줄이고 국가의 수출보조금을 폐지하며,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영화 같은 지적 재산권을 도용하는 일을 막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합의했다. 미국은 이어서 2000년에는 의회가 매년 베이징과의 특혜무역 조항을 허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치권 표결로 결정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중국과의 무역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무역을 자유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는 20세기 말부터 반대하는 목소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의회는 비록 NAFTA가 비준을 하긴 했지만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계속 비판의 목소리를 냈으며 그 협정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치가들도 있었다.

게다가 의회는 새로운 무역회담이 성공을 거두는 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협상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NAFTA와 같은 무역협정은 ‘신속한 절차’에 의해 협상을 해야 하는데, 의회는 정해진 기간 내 비준에 관해 투표를 하고, 이미 제안한 조약에 대해서는 개정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대통령의 권한을 일부 제한시켰다. 외국의 무역관계자는 미국의 입장에서 신속히 절차를 밟으려 하지 않았으며, 자국의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미국과 협상하는 것에 대해 내켜하지 않았다. 어쨌든 미국은 신속한 절차 없이 자유무역협정을 진행시켰고 NAFTA에 칠레를 포함시켰으며, 더 나아가 미심쩍어 보이는 다른 무역자유화 조치까지 추진해나갔다.



미국의 무역적자


20세기 후반, 미국은 늘어나는 무역적자 때문에 무역자유화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년 동안 무역흑자를 경험했다. 하지만 1973~1974년, 그리고 1979~ 1980년의 석유 파동과 뒤이어 나타난 2차 유가 파동으로 세계경제가 침체하자 무역도 침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국은 국제적인 경쟁력의 변화를 절감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많은 국가, 특히 신흥공업국들이 국제 수출시장에서 무서운 속도로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한국, 홍콩, 멕시코, 브라질은 철강과 의류, 신발, 자동차 부품, 그리고 다른 많은 소비재들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생산자로 부상했다.

다른 나라들이 경제적 성공을 이루자 수출업체에서 일하는 미국 근로자들은 미국 시장이 온통 그들의 물건들로 넘쳐나는 게 아닐까 우려하게 되었다. 아닌게아니라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렇게 이전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었으며, 어떤 기업은 외국의 낮은 임금과 느슨한 규제, 그 밖에 생산비 절감 같은 여러가지 이익을 보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무역적자가 급증하게 된 좀더 중요한 요인은 달러 가치의 급상승이었다. 1980년과 1985년 사이에 달러 가치는 다른 중요한 무역국의 통화 가치에 비해 40퍼센트나 상승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수출품 가격은 비교적 비쌌고, 외국에서 수입한 제품 가격은 비교적 쌌다. 그렇다면 왜 달러 가치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1981년과 1982년의 세계 경기침체 속에서 미국이 회복한 점과 미국 연방정부의 엄청난 예산 적자, 이런 요소들이 결합하여 미국 내에서 외환 자본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의 이자율은 올라가고 달러 가치도 상승하게 되었다.

1975년 미국의 수출은 수입에 비해 124억 달러나 초과했지만, 이것은 20세기 미국의 마지막 흑자였다. 1978년 미국의 무역적자는 1,533억 달러나 증가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다른 나라의 경제성장으로 미국 상품에 대한 수입이 늘어나면서 무역수지는 다소 개선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 미국의 무역적자는 다시 큰 폭으로 증가했다. 미국 경제는 주요 거래국의 경제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고,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국민들이 미국 제품을 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외국 물건을 샀다. 게다가 아시아의 금융위기로 그 지역에서의 통화량이 뚝 떨어지면서 미국 제품보다도 비교적 싼 값에 물건을 수출할 수 있었다. 1997년 미국의 무역적자는 1,100억 달러를 기록했고, 계속해서 높아질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관료들은 이같은 무역수지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값싼 외국의 수입품은 인플레이션을 막는 데 도움을 주지만 일부는 1990년대 후반기의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판단했다. 어떤 미국인들은 수입 증가가 국내 산업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예를 들어 아시아의 수요가 줄어들자 외국의 철강 생산업자는 미국 시장으로 눈길을 돌렸고, 이에 미국의 철강 생산업자는 더 싼 값의 철강이 수입될까봐 조바심을 쳤다. 그리고 비록 외국의 대금업자가 무역적자를 메울 필요성을 느끼는 미국인들에게 현재로서는 선선히 자금을 대출해주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태도가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고 이자율이 올라가서 결국엔 경제활동이 위축될 게 뻔했다.



미국의 달러와 세계경제


세계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환율을 안정시킬, 아니 적어도 예측할 수 있는 국제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 도전적인 분위기와 전략상 각국의 이해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정 보완해왔고, 그런 노력은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경제는 주로 금본위제, 즉 각국의 통화를 일정한 양의 금으로 환산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제도는 결국 고정환율, 즉 각국의 통화를 변하지 않는 특정 비율에 따라 서로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고정환율은 변동하는 이율에 따른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세계무역을 촉진시켰지만,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첫째, 각국은 자국의 통화량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각국의 통화량은 자국의 화폐 가치를 다른 나라의 화폐 가치로 환산할 때 이용되는 금의 유통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둘째, 모든 나라의 통화정책이 금 생산량의 속도에 너무 큰 영향을 받았다. 1870년대와 1880년대 금 생산량이 저조했을 때는 전세계의 통화량이 경제성장 속도에 비해 너무 느리게 증가했다. 그래서 디플레이션이 되거나 물가가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 1890년대에 알래스카와 남아프리카에서 금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통화량이 급속히 증가하자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고 물가가 상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각국은 금본위제를 부활시켰지만 1930년대에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어떤 경제학자는 금본위제를 이용할 경우 경제활동을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만큼 통화량을 빠르게 늘리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어쨌든 1944년 세계의 선진국 대표들은 새로운 국제통화 시스템을 의논하기 위해 뉴햄프셔의 브레튼 우즈에서 회담을 개최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제조업체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었고, 세계 금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세계의 통화를 달러로 환산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금 1온스당 35달러로 환산하기로 합의했다.

브레튼 우즈 시스템(Bretton Woods system) 아래서는 미국보다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들이 자국의 통화와 달러 사이의 고정환율을 유지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가령 어떤 나라의 화폐가 달러에 비해 매우 높으면 그 나라의 중앙은행은 자국의 화폐를 팔아서 가치를 떨어뜨린다. 반대로 자국의 화폐 가치가 너무 낮으면 자국의 돈을 사들여서 가치를 올린다. 

브레튼 우즈 시스템은 1971년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미국은 인플레이션이 생기고 무역적자가 커지면서 달러 가치가 하락했다. 미국인들은 양호한 국제수지를 기록하고 있던 독일과 일본에게 통화량을 올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국의 통화 가치가 올라가면 제품 가격이 올라가서 수출이 어려워질까봐 주저했다.

마침내 미국은 달러의 고정 가치를 포기하고 ‘유동적으로’, 즉 다른 통화에 따라 가치가 변동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달러화는 즉시 하락하였다. 1971년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른바 스미소니언(Smith-sonian) 협정을 통해 브레튼 우즈 시스템을 복원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1973년 드디어 미국과 여러 국가들은 환율이 변동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합의했다.

경제학자들은 이 시스템을 관리변동환율제(managed float regime)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화폐에 대한 교환비율을 유동적으로 결정되도록 내버려두되 급격한 변화가 생기지 않게끔 중앙은행이 개입한다는 의미이다. 1971년에 대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한 국가들은 자국의 화폐 가치가 올라가는 것을(이렇게 되면 수출에 지장을 주게 된다) 막기 위해 자국의 통화를 파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같은 목적을 위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국가는 화폐 가치가 절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국의 화폐를 사들인다.

그러나 이렇게 중앙은행이 개입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무역적자가 대규모인 나라는 자국의 통화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다보면 결국 외환보유고가 감소하여 통화량을 계속해서 떠받칠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잠재적으로는 국제적인 의무를 다할 수 없는 경우까지 벌어진다.



세계의 경제


브레튼 우즈 회담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기구가 창설되었는데, IMF는 국가가 국제수지를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IMF는 통상적인 방법(가령 수출을 하거나 장기적인 차관을 도입하거나, 아니면 준비금을 이용해서)으로 빚을 갚기 어려운 국가에게 단기로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한다. 미국이 초기 기금인 88억 달러 중에 25퍼센트를 부담한 IMF는 종종 만성적인 채무국가에게 단기적인 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경제개혁을 요구하기도 한다.

많은 국가들이 자국 경제의 불균형 때문에 IMF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긴다. 전통적으로 IMF에 도움을 청한 국가들을 살펴보면 대규모 정부예산 적자와 과도한 통화 증가 때문에 곤경에 빠진 국가들이다. 다시 말해 그 국가들은 수출을 통해 얻는 수입을 기반으로 살아가기보다 더 많이 소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IMF의 기본적인 처방은 단기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긴축재정과 엄격한 통화정책 같은 강력한 거시경제적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국제 금융시장이 더욱 커지고 상호연관성이 깊어짐에 따라 일반적인 경제관리 실수 때문이 아니라 민간기업이 투자한 달러의 흐름에 갑작스런 변동이 생겨서 외환 채무를 갚는 데 극심한 어려움에 빠지는 나라가 생겨난 것이다. 이런 문제는 국가 경제 전반에 걸쳐 관리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작은 ‘구조적’ 결함 때문에 일어난다. 이런 사실은 특히 1997년 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 때 확인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에 태국과 인도네시아, 한국 같은 국가는 9퍼센트의 고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보다 훨씬 빠른 성장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눈에는 아시아의 경제가 곧 돈으로 넘쳐날 것처럼 보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유입된 자본은 1990년에 250억 달러에서 1996년에는 1,100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되돌아보면 그 액수는 그 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이었다. 경제학자들은 뒤늦게 그 자본의 상당부분이 비생산적인 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지적에 따르면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은행 감독을 소홀히했고, 은행은 경제적 이득이 있는 프로젝트보다 정치적 입김이 작용하는 프로젝트에 돈을 빌려주었다. 그후 경제가 뒤뚱거리기 시작하자 그런 프로젝트 중에 많은 것들이 경제적으로 생존능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결국 많은 프로젝트들이 파산하였다.

아시아 위기의 원인을 추적한 미국과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은 이같은 국제 금융위기를  해결할 수 있도록 IMF의 기금을 확충했다. 불확실성과 정보의 부족이 국제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키웠다는 사실을 깨달은 IMF는 또한 자신들의 조치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기금의 운용을 대부분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IMF를 통해 지원받는 국가에게 구조적인 개혁을 하라고 촉구했다. 또 IMF는 각국 정부에게 스스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적은 기업에 정치적 특혜를 주어 돈을 빌려주지 못하도록 요구했다. 또 파산법을 고쳐 그런 기업들이 경제에 부담을 주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빨리 문을 닫게 했다. 아울러 그들 국가에 외국계 은행과 기타 금융 기관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무역정책을 자유화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한편 IMF는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국제수지가 급속히 악화된 국가에게 전통적인 처방, 즉 긴축적인 금융과 통화정책을 쓰는 것이 언제나 최선의 처방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적자 축소 요구를 조금만 줄이고, 그 대신 빈곤층을 줄이고 실업자를 보호하도록 지출 프로그램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외 원조


브레튼 우즈 회담은 IMF를 탄생시켰고, 이어서 세계은행(World Bank)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는 ‘복구와 발전을 위한 국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을 설립하는 결실을 맺었다. 세계은행은 세계시장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달리 조달할 수 없는 국가에게 차관을 제공해줌으로써 세계무역을 장려하고 경제 발전을 돕도록 만들어진 다자 기구이다. 세계은행은 회원국들이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일정 비율을 출자하여 만든 것이다. 미국은 세계은행의 최초 출자액인 910억 달러 중 35퍼센트를 기부했다. 세계은행의 회원국들은 차관을 받는 국가들이 전액을 상환하고 나서 결국에는 완전한 무역 파트너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초기에 세계은행은 주로 댐 건설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에 차관을 제공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제 발전을 장려하거나 ‘인력 자원’을 양성하는 훈련 프로그램이나 교육 기금으로 쓰이기도 하고, 시장경제를 후원하는 기구를 설립하는 데에도 쓰이는 등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미국은 또한 많은 국가에 일방적인 원조를 하고 있는데, 이런 원조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복구사업을 도왔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은 그전에도 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나라에 조금씩 원조를 해왔지만 1948년 4월에는 전쟁복구에 힘쓰고 유럽인을 격려하기 위해 대대적인 마샬 플랜을 단행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1944~1953 재임)은 다른 국가의 성장을 돕는 일을 서구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미국인들은 이런 원조를 순수한 인간애의 발현으로 생각했다. 어떤 외교정책 전문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미개발 국가들의 ‘달러 부족’ 현상을 우려했지만 트루먼은 그런 국가들이 더욱 부강해질수록 세계 경제에 당당히 참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취임 연설에서 마샬 플랜의 개요를 설명하면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과제라고 단언했다.

프로그램은 1961년에 재정비되자마자 국제개발처(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를 통해 실행에 옮겨졌다. 1980년대에도 국제개발처는 56개국에 다양한 액수의 원조금을 제공했다. 세계은행과 마찬가지로 국제개발처는 최근 댐 건설이나 고속도로 건설, 생필품 공장 같은 대규모 개발계획에서 점차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가령 식품이나 영양 문제, 인구정책, 건강, 교육과 인력 자원, 특정한 경제개발 문제, 기근과 재앙 구제 지원, 최극빈국에 최소한의 값만 받고 식료품과 옷가지 등을 파는 프로그램인 평화식량 지원 프로그램(Food for Peace) 등이다.

미국의 대외 원조 옹호론자들은 해외 원조가 미국의 새로운 수출시장을 개척할 뿐만 아니라 위기를 막고 민주주의와 번영을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회는 종종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대규모 지출에 반대한다. 그 결과 1990년대 말에는 국제개발처가 연방지출의 0.5퍼센트도 원조하지 못했다. 사실 인플레이션을 겪고 난 뒤라 1998년 미국의 대외 원조 예산은 1946년의 50퍼센트도 채 되지 못했다.


top


후기


경제를 넘어서



이 책의 각 장에서 설명했듯이 미국의 경제 시스템은 노동력과 농업, 소기업, 대기업, 금융시장, 연방준비제도, 정부와 같은 경제 주체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더욱이 ‘자유시장’에 대한 철학적 신념을 통해 더욱 완벽해진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유시장이란 시장 모델이 말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 실제로 미국은 정부를 통해 민간기업을 규제하고, 자유시장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만족시켰으며, 창의적인 경제기구의 도움을 받고 경제 전반을 안정시키는 조치를 취해왔다.

이 책은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움직여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은 종종 고통과 혼란을 가져왔다. 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떠났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제조업 부문의 구조 개편으로 인해 공장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고통 속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 조셉 A. 슘페터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주의는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새롭게 살아난다. 하나의 기업, 심지어는 산업 전반에 걸쳐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미국인들은 글로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작지만 단단히 무장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당장은 일자리를 잃어버릴지 모르지만 잠재력이 큰 산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제조업에서는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대신 컴퓨터나 유전공학 같은 새로운 첨단산업에서의 일자리는 빠르게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소프트웨어 분야와 같은 서비스 산업도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성공은 또다른 문제를 낳는다. 오늘날 미국 사회를 가장 괴롭히는 걱정거리는 성장이다. 경제적 성장은 미국이 성공을 거두게 된 핵심이었다. 경제적인 파이가 커지면서 새로운 세대는 파이를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실 경제적 성장과 그것이 가져다준 기회는 미국 사회에서 계급간의 분열을 최소화시켰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계속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 전역에 있는 많은 시민단체들은 삶의 질이 떨어질 게 두려워서 오히려 지역개발을 반대하기도 한다. 그들은 질문한다. 차들로 넘쳐나는 도로, 대기오염, 콩나물 교실 등등. 그래도 성장이 가치 있는 것일까? 오염은 어느 정도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열린 공간을 얼마나 희생시켜야 할까? 이같은 질문이 지구 차원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국가는 기후 변화나 오존층 파괴, 산림 파괴, 해양오염과 같은 환경상의 도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국가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는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가스의 방출을 제한하기 위해 석유로 돌아가는 공장이나 가솔린으로 굴러가는 자동차를 억제할 방법이 있는 걸까?

미국은 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큰만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최적임자이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를 이미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미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는 미국이 무슨 권리로 환경을 보호한답시고 다른 국가에게 성장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 어느 정도 경제적 도전에서 승리를 거둔 국가라면 위와 같은 질문들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강력한 경제는 사회 발전의 선결 요건일 뿐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꼽아보더라도 공공교육의 전통, 환경 규제, 차별 금지의 법제화, 사회보장과 의료보장 같은 많은 제도를 통해 미국은 언제나 그런 원칙을 확인시켜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기도 한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은 1968년에 이런 말을 했다. “경제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국민총소득에는 ‘아름다운 시나 성실한 결혼생활, 지적인 시민들의 논쟁, 공무원들의 단합된 힘 따위는 포함되지 않는다. 국민총소득은 우리의 위트와 용기를 재는 척도도 아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 우리의 열정과 조국애를 평가하는 잣대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척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이유만 빼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다.”


top


경제 용어 풀이


가격 지지(Price supports) 농민들이 악천후나 과잉생산과 같은 요인으로 농산물 가격이 떨어졌을 때 연방정부에서 일정 수준으로 가격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것.

가격 고정(Price fixing) 일반적으로 하나의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대기업 여럿이 합의하에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을 고정시키는 행위.

가격 차별(Price discrimination) 특정한 구매자에게 다른 구매자들보다 이익을 더 주는 행위.

개방 거래 시스템(Open trading system) 국가들 간에 서로 상대방의 시장에 공정하고 비차별적으로 접근하도록 허용하는 거래 시스템.

경기침체(Recession) 일정 기간 동안 전반적인 경제 활동이 의미 있게 하락하는 것.

경제성장(Economic growth) 한 국가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능력이 증가하는 것.

고정환율제(Fixed exchange rate system) 서로 다른 통화를 교환할 때 이미 정해진 수준으로 고정하고, 주고받을 때의 변동폭을 무시하는 것.

공동 시장(Common market)  다수국이 외환 및 무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서로 거래에 따른 관세나 장벽을 없앤 시장. 공동 시장 이외의 국가에서 물건을 수입할 때는 정상적으로 관세를 붙인다.

공황(Panic) 갑자기 은행에 대해 불신을 느낀 예금주들이 현금을 한꺼번에 인출해가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현금 인출 사태가 벌어지는 것.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준비금은 그 예금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많은 현금이 인출되면 현금지불 능력이 없어지고 은행은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

공급(Supply) 일정 기간 동안 어떤 값으로든 생산자들이 기꺼이 판매할 수 있는 예정된 양.

관리변동환율제(Managed float regime)  통화의 변동에 따라 비율을 정하는 환율 시스템. 하지만 급격한 변동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개입한다.

관세(Tariff) 한 나라의 세관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하여 부과하는 세금.

국제수지(Balance of payments) 특정 기간 동안 한 나라와 다른 나라들 사이에 오고간 경제적 거래를 집계한 기록.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어떤 국가의 물리적인 경계 안에서 생산해낸 국가의 생산량 또는 소득과 소비의 총가치.

규제 철폐(Deregulation) 정부가 기업에 대해 규제를 하지 않는 것.

규제(Regulation) 권위 있는 기관이 법에 따라 어떤 산업이나 활동의 구조와 행위에 대해 특정한 법이나 규칙을 공식적으로 정해 발표하는 것.

금본위제(Gold Standard) 주어진 금의 무게로 통화를 환산하는 통화 시스템.

기업농(Agribusiness) 현대 미국의 경제에서 기업적 성격을 지닌 대규모 농장을 가리키는 용어.

노동력(Labor force) 미국에서 측정할 때는 고용되어 있거나 일자리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수를 가리킨다.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 주식과 채권을 거래하는 세계 최대의 거래소.

뉴딜 정책(New Deal) 1930년대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출하기 위해 만들었던 미국 경제 개혁 프로그램.

다우존스 산업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 30개의 상위 종목으로 구성된 주가 지수로, 보통 미국의 주가와 채권 가격의 일반적인 동향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덤핑(Dumping) 미국에 수출하는 상품의 판매 가격이 공정한 시장 가격보다 낮은 것. 이런 판매는 실제로 미국의 같은 제품의 생산자에게 위협을 주며 물질적으로 피해를 입힌다.

독점(Monopoly) 시장에서 물건과 서비스를 단독으로 판매하는 것.

레세페르(Laissez-faire) ‘내버려두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경제나 정치에서 정부의 간섭이 없을 때 경제 시스템이 가장 잘 돌아간다는 것.

무역적자(Trade deficit) 한 국가의 상품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하는 것.

무역흑자(Trade surplus) 한 국가의 상품 수출액이 수입액을 초과하는 것.

무역수지(Balance of trade) 일정 기간 내에 물건과 서비스의 수출, 수입만을 계산한 국제수지의 일부. 만일 수출액이 수입액을 초과하면 무역수지가 ‘호전되었다’고 말하고,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하면 무역수지가 ‘악화되었다’고 말한다.

뮤추얼 펀드(Mutual fund) 끊임없이 새로운 주식을 사고 기존의 주식을 팔며, 그 돈을 이용해 다른 회사의 다양한 유가증권에 투자하기도 하는 투자회사. 돈은 개인에게서 모아 다양한 포트폴리오의 주식에 투자한다.

미국 증권업협회 자동호가 시스템(National Association of Securities Dealers Automated Quotation System, Nasdaq) 5,000개 종목의 첨단 벤처기업들이 상장되어 있는 미국의 장외시장. 세계 최초의 전자결제 주식시장으로, 모든 시세 과정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처리된다.

미국증권거래소(American Stock Exchange) 미국의 주요 증권거래소 중 하나로, 중소기업의 주식과 기업채권을 주로 취급한다. 대기업의 주식을 주로 거래하는 곳은 뉴욕증권거래소이다.

민영화(Privatization) 정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민간 부문의 기업으로 전환하는 행위.

반독점법(Antitrust law) 시장 내에서 독점적 지위를 억제하기 위해 취하는 정책 또는 조치.

배당금(Dividend)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얻는 현금 소득. 보통 소유 주식에 비례하여 수익금을 받는다.

베어 마켓(Bear Market) 주가 하락기에 주식소유자가 주식을 팔아서 하락의 모멘텀을 만든 시장.

벤처 자금(Venture capital) 대체로 위험성이 높고 새로운 기업에 대해 투자하는 자금.

변동환율제(Floating exchange rate system)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세력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 환율이 결정되는 유동적인 제도.

보통주(Common stock) 기업의 소유권을 나눈 것.

보조금(Subsidy) 정부가 물건이든 서비스든 내수 생산자들이 외국 기업에 대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직럭A♣막?경제적인 혜택을 주는 것.

보호주의(Protectionism) 비효율적인 국내 생산자가 외국의 생산자와 경쟁할 수 있도록 수입을 제한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부족분 지불제도(Deficiency payment) 특정 물건에 대해 실제 시장 가격과 농민이 생각하는 적정 가격 사이의 차액 전체 또는 일부를 농민들에게 보상해주는 제도.

부가 급여(Fringe benefit) 고용주가 정기적인 월급이나 임금에 더하여 건강보험, 생명보험, 성과급 따위를 고용인에게 제공하는 간접적인 혜택.

불 마켓(Bull market) 주가가 계속해서 오르기만 하는 시장.

비관세 장벽(Nontariff barrier) 관세가 아닌 수입 감시 시스템이나 다양한 세금 징수와 같은 정부의 수단으로 수입을 제한하거나 국제간의 거래를 제한하는 것.

사회보장(Social Security) 미국 정부가 퇴직자 스스로 적립한 돈과, 일하는 동안 고용주가 납입한 적립금으로 퇴직자에게 연금혜택을 제공하는 것.

사회주의(Socialism) 정부가 생산의 기본 수단을 소유하며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라는 특징을 가진 시스템.

사회규제(Social regulation) 해로운 기업행동(환경을 오염시킨다든지 근로자를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일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위를 금지하고 중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주도의 제한 조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 근로자들을 한 공장에 함께 배치하여 도구나 기계, 원료를 제공해준 다음 물건을 생산하게 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주는 공장 시스템이 출현한 것. 산업혁명은 특히 1770년에서 1830년 사이 영국의 직물공장에서 빠르게 진행되었다. 더욱 광범위한 의미로는, 세계경제에서 구조적인 경제 변화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상업은행(Commercial bank) 당좌예금이나 보통예금, 정기예금과 같은 광범위한 예금계좌를 제공해주고, 개인과 기업에 대출을 해준다. 반면에 투자은행은 기업채나 지방채를 판매하는 데 관련된 일반 업무를 하는 중개회사 성격을 띤다.

생활 수준(Standard of living) 개인이나 단체가 일반적이거나 적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최소한의 필수품, 안락함 또는 만족스러움을 평가하는 기준.

생산성(Productivity) 일정 기간 동안 생산 요소(생산 자원)의 투입량에 대한 산출량(물건과 서비스)의 비율.

서비스(Services) 유형의 경제적 물건이 아니라 교통, 금융, 보험, 여행, 통신, 광고, 유흥, 데이터 처리, 컨설팅처럼 생산한 그대로 소비하는 것이다.

선물(Futures) 특정한 질과 양의 일용품을 미래의 특정한 날짜에 특정한 가격으로 공급해줄 것을 요구하는 계약.

소득세(Income tax) 개인이나 기업의 순수입에 따라 정부가 과세하는 것.

소비자 물가지수(Consumer price index) 소비자가 구입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 변동을 나타내는 지수. 미국 통계국에서 집계한다. 

소비세(Consumption tax) 소득이 아닌 소비에 붙는 세금.

수출 보조(Export subsidy) 정부가 공공복지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는 기업을 장려할 목적으로 지급하는 돈.

수출(Exports) 자국에서 생산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다른 나라의 구매자에게 판매하는 것.

수요(Demand) 일정 기간 소비자가 어떤 가격으로든 기꺼이 살 수 있는 물건과 서비스의 총량.

수입(Imports) 다른 나라에서 생산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국내로 들여오는 것.

수익(Revenue) 기업이 물건이나 서비스를 팔아서 얻는 소득.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인플레이션이 계속되어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경제 상황.

시장(Market) 구매자와 판매자가 동일한 혹은 유사한 상품에 대해 값을 결정하고, 물건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곳.

시장경제(Market economy) 생산의 수준과 소비, 투자, 저축을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세력이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국가의 경제.

신속 절차(Fast track) 미국의 국제무역협상을 승인하고 이행하기 위해 특정 기간 안에는 대통령이 제출한 협정 내용에 대해 의회가 가부可否만 표결하도록 한 절차.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 미국의 통화를 관리하는 제1의 은행(중앙은행)으로, 통화를 발급하고 기업에 대한 신용 공급을 조절한다. 워싱턴 D.C.에 있는 7명의 이사회와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 그리고 그 아래의 25개 가맹 은행으로 구성된다.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연방준비제도의 업무를 처리하는 12개 연방준비은행 중 하나로, 미국 전역에 분포한다. 연방준비은행 밑에 설치되어 있는 25개의 가맹 은행과 함께 미국 중앙은행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예산 적자(Budget deficit) 연간 정부 지출이 수입을 초과한 것.

예금보험(Deposit insurance) 미국 정부가 특정 한도의 은행 예금액을 보장해주는 것. 현재는 10만 달러이다.

예산 흑자(Budget surplus) 연간 정부 수입이 지출을 초과한 것.

유가증권(Securities) 자산(주식)이나 채무 증권(채권)의 소유권을 증명하기 위해 전산이나 종이에 기록한 증서.

인플레이션(Inflation) 모든 물건과 서비스의 전반적인 가격 수준이 오르는 것.

인적 자원(Human capital)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서 발휘하게 되는 힘, 교육, 훈련, 기술 따위.

자유거래(Free Trade) 국가간에 거래를 막거나 철폐해야 할 관세나 규제가 없는 상태.

자본주의(Capitalism)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노동자로부터 노동력을 사서 상품생산을 행하는 경제 체제.

자유기업제도(Free enterprise system) 재산과 생산 수단의 사적인 소유권을 인정하고, 수익을 생산의 동기로 삼으며,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도입하고, 공급과 수요에 의해 물건이나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경제 시스템.

자산(Asset) 보통 돈으로 측정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재산.

자본(Capital)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데 이용되는 물리적인 장비(건물, 기계장비, 인력기술).

자본 시장(Capital market) 기업의 보통주와 장기 채권(만기일이 1년 이상인 채권)을 발행하고 거래하는 시장.

장외시장(Over-the-counter) 뉴욕증권거래소처럼 조직화된 주식거래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증권을 거래하는 수단을 가리키는 상징어. 장외시장에서의 거래는 중개인과 딜러가 전화나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재정정책(Fiscal policy) 충분한 고용과 비인플레이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큼의 돈을 지출하고 세금을 징수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정부의 정책.

전자상거래(Electronic commerce)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통해 이루어지는 거래.

주식(Stock) 기업의 자산에 대한 소유권 지분.

주식거래(Stock exchange) 주식이나 채권을 팔거나 사는 조직화된 시장.

중앙은행(Central bank) 한 국가의 통화를 관리하는 제1의 은행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경제의 신용 공급을 조절하는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다.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준사법 규제 기관으로 연방증권법을 집행한다. 이 법의 목적은 투자자를 보호하고 공개적으로 거래되는 주식에 대한 정보를 공시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위원회는 또한 증권을 사고파는 회사를 규제하고, 투자 조언을 하는 사람이나 투자회사에 대해 규제를 한다.

지적 재산(Intellectual property) 특허권, 상표, 판권 등으로 증명되는 소유권. 인간의 머리에서 창조해낸 생산물을 소유하고 사용하고 배분하는 권리를 가리킨다.

채권(Bond) 기업에서 만료일이 되면 채권소유자에게 그 기간만큼 이자와 원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증서.

통화정책(Monetary policy) 고용 창출과 경제 성장, 가격 안정, 국제 거래의 안정적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화량, 통화 가치, 신용 공급에 영향을 주는 연방준비제도의 경제정책.

통화량(Money supply)  경제활동에 유통되는 돈의 양(동전, 지폐, 수표).

투자(Investment) 주식이나 채권과 같은 유가증권을 구입하는 것.

평화 식량 지원 프로그램(Food for Peace) 미국의 농산물을 미국 밖의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프로그램.

할인율(Discount rate) 상업은행이 연방준비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붙는 이자율.

혼합 경제(Mixed economy) 생산과 소비, 투자, 저축에 있어 정부와 민간기업이 다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제 시스템.

환율(Exchange rate) 한 나라의 통화를 다른 나라의 통화와 교환하는 비율.


top


Information Resource Center
Public Affairs Section
Embass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eoul, Korea